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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깅업 Sep 04. 2024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쓰는 법

무라카미 하루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독후감

    최근 나의 주된 관심사는 글을 잘 쓰는 방법이다. 취미로 글쓰기를 시작한 후 필력에 대한 한계를 많이 느끼기 때문이다. 글을 잘 쓰고 싶은데, 애초에 기획도 어렵고, 맛깔나게 쓰는 건 더 어렵다.


    일차적인 고민은 글의 기획 자체에 있었기 때문에 '창의성'에 대한 책을 3권 연달아 읽었다. 3권의 공통점을 추려서 내린 결론은, 창의성의 속성은 (마법)이 아닌 (물리)라는 것이었다. 많이 보고, 많이 쓰고, 계속해서 다듬어야 한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땅에서 천천히 길러내는 것이다. 말이 쉽지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걸 알게 되니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



    그래서 계속 읽고, 쓰고, 다시 보고 있다. 원리까지 이해하고 나니 이제 기획은 어느 정도 영감만 떠오르면 잘 된다. 사실 회사에서 하는 일도 기획이나 스토리텔링의 영역이 많아서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내가 쓴 글을 내가 다시 읽을 때 글의 맛이 살지 않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많이 느낀다. 술술 읽히지 않고 읽다가 툭툭 끊기는 부분도 많고, 너무 객관적으로 쓰려다 보니 읽는 입장에서 와닿지 않는 대목도 많다. 맛깔나게 쓰는 게 너무 어렵다.


"훌륭한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내가 읽은 3권의 창의성 책에 모두 등장한, 창의성 분야 개근상 '피카소' 선생님의 말씀이다. 맛깔나게 쓰는 게 어려우면 맛깔나게 쓰는 사람들의 기술을 훔쳐야 한다. 그래서 다음으로는 필력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의 책을 봐야겠다 싶었다. 물론 내 관심분야이기까지 하면 금상첨화.



    그래서 우리나라가 너무나 사랑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에 관한 여행 에세이,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을 읽었다. 1999년 작, 무라카미 하루키의 25년 전의 필력이지만 역시나 배울 게 많다.


1) 공감유도 인트로


    이 책의 머리말, 즉 책을 펴서 처음 읽는 글은 아래와 같다.


    어떤 여행이라도 많든 적든 간에 나름대로의 중심 테마 같은 것이 있다. 시코쿠에 갔을 때는 매일 죽어라 하고 우동만 먹었으며, 니가타에서는 대낮부터 알싸하고 감칠맛 나는 정종을 실컷 마셨다. 되도록 많은 양을 보고 싶어 홋카이도를 여행했고, 미국 횡단 여행을 할 때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팬케이크를 먹었다. (후략)
    이번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여행의 테마는 위스키였다. (12 p)


    머리말은 책의 시작이기 때문에 독자에게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 건지 보여줘야 한다. 여행기라는 에세이는 결국 개인의 일기다. 아무리 유명한 작가라고 해도, "2024년 9월 4일 수요일, 날씨 맑음"으로 시작하면 아무도 안 읽는다. 나중에 개인적인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라도, 독자를 붙잡아두는 인트로는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시작해야 한다.

    하루키는 '어떤 여행이라도 많든 적든 간에 나름대로의 중심 테마 같은 것이 있다.'는, 여행에 대해 누구나 공감할만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읽는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떠올릴 수 있도록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들을 제시한다. 이렇게 단 한 문단으로 독자를 유혹하고, 두 번째 문단부터 바로 여행기로 들어간다.


2) 에세이는 솔직해도 된다


    여전히 머리말. '이런 이야기를 할 거예요'를 알려주는 부분의 마지막에 하루키는 다음과 같이 쓴다.


대단치 않은 책이지만, 읽고 나서(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신다고 해도) "아 그렇네, 나도 혼자 어디 먼 곳에 가서 그 고장의 맛있는 위스키를 한번 마셔 보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든다면, 필자로서는 무척 가슴 뿌듯한 일이 될 것이다. (14 p)


    자신의 책을 사야 할 독자한테 '대단치 않은 책'이라고 스스로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을 넘어 '공감하며 읽어달라'라고 넌지시 부탁까지 한다.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고 책의 의도를 설명까지 한다. 근데, 그게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서 좋다.

    앞서 말했지만 에세이는 결국 개인의 일기다. 그렇다고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쓰는 일기라면, 독자를 끝까지 붙잡아두기 힘들다. 가끔은 독자에게 말을 걸고, 솔직해지는 것도 필요하다. 독백을 듣는 것보다는 대화를 하는 편이 몰입도가 높으니까.


    그래서 내가 쓴 글들 중 그나마 반응이 있던 글들은 공감이 갈만한 이야기를 썼거나, 넌지시라도 독자를 의식한 글들이었다. 지금까지 쓴 글들은 한 권의 책으로 모아서 갈무리했으니, 앞으로는 스타일 변화를 해봐도 되겠다 싶다. 어쨌든 많이 읽혀야 글을 쓸 맛도 나니까.


3) 하루키의 최애는 '의인화'?


    하루키는 당연하게도, 기본적으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이다. 본문으로 들어가서 마주한 첫 문단부터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스코틀랜드 서해안에는 갖가지 매력적인 모양을 한 크고 작은 섬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마치 천상에 사는 누군가가 기세 좋게 붓을 휘둘러 먹물방울을 흩뿌려 놓은 듯한 모습으로. (19 p)


    정말 멋지지만, 이런 표현력은 사실 연습으로 되는 영역은 아닐 것 같다. 아니, 가능은 하더라도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 것이다. 그에 반해 하루키가 굉장히 자주 쓰지만 나도 조금만 노력하면 훔칠 수 있을 것 같은 기술이 있다. 그게 바로 '의인화'다.




    이 책은 당연하게도 술이 주인공이고, 원문 초판으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도 4D로 술의 맛과 향을 전할 기술은 발달하지 못했다. 결국은 글로 그 느낌을 전달해야 한다. 가끔은 학식이 짧은 나 같은 사람들한테는 너무도 어려운 비유를 쓰기도 하지만, 의인화 덕에 굉장히 직관적으로 와닿는 비유도 많다.


실제로 마셔보면, 보모어 위스키는 사람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진다. 거기에는 "내가 말이지" 하고 나대는 듯한 직접적인 자기주장은 없다. 한마디로 말해 "이건 이렇다"라는 식의 단정적인 요소는 희박하다. 그 대신 난롯불 앞에서 정겨운 옛 편지를 읽을 때와 같은 고요함과 따사로움, 정겨움이 배어 있다. (63 p)


세상에는 입을 열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말문이 트이면 온화한 어조로 몹시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있는데(그리 많지는 않지만), 아일랜드는 그런 느낌이 드는 나라다. (78 p)


그 맛은 때때로 잉그리드 버그만의 미소처럼 은근하고 크리미 한 것이 되기도 하고, 모린 오하라의 입술처럼 하드 한 긴장감이 감돌기도 하고, 혹은 로렌 바콜의 눈동자처럼 하염없는 쿨함을 내비치기도 한다. (맥주의 맛을 설명하는 데 여배우를 끌어다 붙이는 것은 적절한 비유가 못 되는 것 같지만). (97 p)


    이런 식이다. 읽으면서 이런 의인화는 정말 잘 통하겠다고 느꼈다.


    사람마다 학식과 접하는 컨텐츠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하루키가 아드벡 위스키를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는 클래식 음악의 두 가지 버전을 비교하며 설명하거나 라프로익 위스키의 맛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초기작의 문체와 비교했을 때는 좀 힘들었다. '만약 이 책이 유튜브라고 한다면' 그냥 바로 30초 스킵해 버렸을 것이다. 내가 모든 글을 QWER과 연관 지으면 일반인 독자들이 넘기게 될 것과 동일하다. 관심사와 아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너무 지엽적인 소재나 비유는 공감시키기 어렵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소재는 다르다. 우리가 5명의 사람을 만나면,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해도 다른 면도 반드시 있다. 위스키를 마실 수 있는 정도의 나이인 20세만 돼도, 웬만한 유형의 사람은 만나보게 된다. 나이가 들고 사람에 대한 경험이 쌓일수록 공감하기 쉬운 소재가 '사람'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을 소재로 한 비유나 표현은 비교적 높은 확률로 많은 사람들에게 적중한다. 그리고 30년 넘게 산 나도 충분히 써볼 수 있을만한 스킬이다. 이게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힌트다.


이제는 훔쳐볼 시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차이는 항상 상상했던 것보다도 크다. 특히나 글로 배운 기술을 써먹는 것일 때는 더더욱 크다. 괜히 전 세계 어디서든 'How To'에 대한 책이나 자기 계발서가 잘 팔리는 게 아니다. 읽어도 적용이 안되기 때문에,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새로 나온 책을 또 사서 읽게 되는 것이다.

    '의인화'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고, 사람에 대한 경험도 제법 많은 편이다. 하지만 실천을 늘 어렵다. 대학교 4년을 열심히 공부하고 대외활동하고는 회사에 입사해서 엑셀 VLOOKUP도 제대로 할 줄 몰라 바보가 된 신입사원 때처럼, 분명 알 것 같은데 막상 하려니 어렵다. 결국은 일 잘하는 대리가 될 때까지 계속해보는 수밖에 없다.

    앞으로 글을 쓰면서 여기서 배운 스킬들을 조금씩 써먹어보려 한다. 혹시나 이 글을 보고 이후의 글을 보는 분들이 계시다면, 적당히 한쪽 눈 감고 봐주시면 감사하겠다.


이 브런치는 어디까지나 나의 성장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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