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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듀이 Oct 09. 2021

난 가끔가다 과음을 해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사진은 참고용일 뿐



유독 숨 가쁘게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날들이 있다. 하루 종일 정신이 없어 끼니도 잘 못 챙겼음에도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 입맛조차 사방으로 달아나 찾을 수 없는 그런 날. 거칠어진 혓바늘과 세포 하나하나가 뒤집어진 비늘 같은 목구멍.


씻지도 않고 침대에 앉아 한참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내 방을 부유하는 먼지를 관찰하다 보면 하루 내리 바싹 탔던 목이 그제야 돌아와 물 한 잔을 생각나게 한다. 그럼 나는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아. 지금이다.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부엌으로 향한다. 휴지를 서너 번 돌돌 말아 물에 적신 뒤, 냉장실 아랫목에 소박히 서있는 소주병을 꺼낸다. 소주병 라벨지 부분에 젖은 휴지를 말아서 냉동실로 직행. 이젠 아주 차갑고 냉정해질 시간이다. 과학의 힘을 빌어 젖은 휴지로 둘러진 소주는 내가 샤워하는 동안 무섭도록 차가워질 것이다.


샤워와 함께 머릿속은 바쁘게 움직인다. 이 샤워가 끝나기 전에 좋아하는 안주를 무엇이든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아, 급해, 맷돌아 굴러라. 소주에는 주로 회, 육회, 숙회 등 날 것을 좋아하지만, 자극적인 양념, 국물류, 심지어 느끼한 음식에도 곧잘 어울린다. 무엇이든 걸치기만 하면 챡- 하고 어울리는, 옷걸이가 좋은 모델 같달까.


어쨌든 안주가 준비되면, 살얼음이 얼 정도로 차가워진 소주를 꺼내 손목의 스냅을 가한다. 방정맞게 흔드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딱 세 번의 스냅. 좌-우-좌향, 9시-6시-12시 방향. 가열차게 돌아가는 회오리에 자연스레 씌익 지어지는 웃음. 벌써 약간의 만족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고 있다.


그렇게 빈 속에 털어 넣는 첫 잔은 이어질 잔들의 마중물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데, 이때 정신을 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또다시 냉장실에서 냉동실로 옮겨가는 소주가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시대 전형적 직장인의 초상이니까. 또 목이 타는 내일을 방어하는 것도 이성을 가진 월급쟁이 노동자로서의 임무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금방 사라져 버리는 소주병은 정신을 산란케 하는데 그때는 주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왜 멍청이처럼 유리병으로 사놨지, 페트면 좋았을 텐데. 640-360... 280ml나 차이가 나잖아. 그럼 반 병만 더 마실까, 아 소주는 남으면 맛이 없는데... 그때 거짓말처럼 눈에 들어오는 저 아래 넣어둔 버번. 아 저거 뚜껑 언제 열었더라. 공기 한 번 쐬어주고 숙성시키면 장난 아니라던데. 그걸 마시는 게 오늘 정도면 되는 건가. 그럼 가볍게 프레츨이랑 치즈 하나 꺼내는 게 좋겠어. 깊어가는 위로의 밤. 그렇게 고된 밥벌이의 하루가 저문다. cheers my friend, 오랜만에 하는 혼술, 오늘도 잘 지냈다.


사실 소주뿐만 아니라 청주, 맥주, 위스키, 와인, 꼬냑, 막걸리 등 세상 모든 종류의 술을 좋아한다. 청주는 달달하면서도 깔끔해서 좋고, 한 여름에 차게 얼린 잔에 담아 마시는 생맥은 천국을 맛보게 해 주며, 다양한 위스키는 그 역사를 혀에 담게 해 절대적 우위의 경험을 전하고, 와인보다 몇 배는 풍부한 꼬냑의 향은 인간이라면 매료되지 않을 수 없으며, 쌀밥 먹고 자란 내게 막걸리는 숙명 같은 것이니까.


그러나 그중 원탑을 꼽으라면 나는 손을 들고 외칠 것이다. 그건 바로 소주라고. 오바 쪼금 더 보태서 내게는 평생 버릴 수 없는 조강지처 같은 존재랄까. 내 인생의 희로애락을 옆에서 함께한 오랜 친구. 도수가 오르내리고, 디자인이 바뀌고, 새 브랜드의 소주가 등장해 '나는 물 맛이 다르다'며 외치고, 심지어 과일향이 섞을 때조차... 늘 내 옆에서 내게 기쁨을 배가시키고 슬픔을 나눠 준... 이쯤 되면 이 시대 젊은이의 기쁨과 슬픔은 얼추 소주와 함께하는 것이 섭리가 아니던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늘은 뭐랑 마시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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