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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준 Mar 15. 2019

나는 왜 기자를 꿈꾸게 되었을까

오늘은 밤샐 각오를 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많다. 그래서 글을 좀 쓰려고 한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기자를 꿈꾸게 되었다.

어느 평범한 하루 였다. 하지만 조금 다른 점은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침울한 분위기에서 수업을 하셨고저녁에 어머니가 울고 계셨고 학원에서는 적막감만 흘렀다. 그 날은 4월 16일이었다. 어머니가 우는 것이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았지만 나의 감수성이 조금은 부족했거나 그냥 내가 병신이었다.

4월 17일 아침에 지금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신 1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잠시 묵념을 하자 했다. 그때도 나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날 우리학교 학생회는 발빠르게 학생들에게 또 선생님에게 모금 및 관련 물품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충남 아산의 그냥 그런 지방고에서 왜 이런 것 까지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근데 시간이 지나고...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이런 병신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왜 이전에는 몰랐을까 너무도 스스로가 한심했다. 사실 나는 그랬다. 고1때 어떻게 하면 공부를 하지 않을까 고민했던 아이다. 야자때는 그저 딴짓하게 바빴고 몰래 폰을 하다 들키면 잠시 혼나고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갖었다. 사실 지방고라 몇명 빼고는 공부하는 사람이 많지도 않았다. 

 공부를 하게된 계기는 그렇다. 한 친구가 있었다. 입학하고 야 개는 공부 못하게 생겼다. 그냥 잘 노는 아이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드림반에 들어간 것이다. 개를 이겨보고자 시작한 공부가 나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한 공부였다. 3월 모평때 524를 찍었다. 유일하게 할줄 아는게 영어밖에 없었으니...이것도 외국에서 3년간 국제학교 다니면서 그나마 배워서 이런거지 아니였으면 그냥 554찍을 뻔 했다.

 이렇게 공부를 하고 중간고사때 211를 찍었다. 정말 미친듯이 공부했다. 중간고사 기간때 하루 3시간 이상 잔적이 없었다. 부모님도 당연히 걱정했다. 애가 뭘 잘못먹었나라고 생각할 정도 였으니 이후 모평때도 비슷한 성적을 받았다.

 다시 꿈으로 돌아와. 고1 여름방학때 1달간 미국 여행을 다녀왔다. 학교에서는 공부하라고 했는데 형의 사정이 있어서..형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1달간 휴식을 갖기로 했다... 참... 이때가 나의 꿈을 설계한 시간이다.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왼쪽에 계시던 삼촌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꿈을 설계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그때 와 알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것을 느꼈다.

 한국에 돌아와 많은 글을 썼다. 인생에서 그렇게 많은 글을 쓴 적은 없었다. 글을 쓰면 생각을 넓혔다. 쓰면 쓸수록 더 많은 사유를 하게 되었고 성찰을 하게 되었다. 스스로 반성하며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고 느꼈다. 그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근데 글을 쓰다 보니 논리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당시 나와 함께 정치에 관심있던 친구와 함께 토론동아리를 만들었다. (지방고고 나름 신생학교고 학종을 밀어주던 학교라 자율동아리는 담당 선생님만 구하면 그냥 다 승인해줬다.) 아까 말한 가장 존경하는 1학년 담임쌤께 동아리를 부탁드리고 만들었다. 이름도 내가 지었지만 참 구리다. '아고라'다.ㅋㅋㅋㅋㅋㅋㅋ 같이 만든 친구는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정치학과에 갔다.(인생 핀놈)

 1학년 1학기를 끝내고 2학기가 되니 학교에서 드림반으로 오란다. 내가 공부한 이유가 이것이었으니 난 모든 학원을 포기하고 들어갔다. 당시 국어를 담당하는 교사가 두명이었는데 또 말하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이 하는 수업은 토론수업 그리고 다른 수업은 그냥 모평, 수능 풀이었다. 

 당연히 토론수업으로 가고 신나게 토론을 했다. 나의 한계도 많이 느끼는 시간이었다. 다른 애들보다는 잘했지만 여전히 논리 구성이 조금은 빈약하고 다른 사람이랑 한다면 쳐 발릴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년간 계속 글을 썼다. 대부분 세월호에 관한 글이었다. 내가 병신이란 것을 계속계속 생각했다. 2015년 4월 16일 그리고 2016년 4월 16일 그런 병신을 떨쳐내기 위해 학교에서 세월호 배지를 나눠줬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으니 선생님들도 나름 신기하셨나부다.... 

1학년 2학기때 친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때 3일동안 장례식장에 갔다. 처음으로 친구의 눈물을 보았다. 그 친구는 참 밝은 친구였는데, 참 밝은 친구였다... 이때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느꼈다...

 형은 원래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었다. 형이 지망하는 대학은 한진 소유의 한 전문대였는데 아마 승무원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그 대학 ㅇㅎㅈㅁㄷ 그 대학이다. 당시 그 대학의 항공운항과는 여자만 뽑았는데 형은 그 대학을 꼭 가고 싶어했다. 당시 뭔 깡이었는지 모르지만 사회책에서 보았던 국군간호사관학교의 사례가 기억나 국가인권위원회에 그 대학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는 진정을 내 인권위 권고까지 받아냈다. 그 대학은 몇년 뒤부터 남성도 함께 선발하겠다고 인권위에 답변했었다.

 나는 이걸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공부하던 나를 본 어머니는 당시 학교일에 관여를 많이 했기에 담임이랑 친하게도 했고 이것을 생기부에 써달라고 담임쌤한테 말했다. 그렇게 학교에 이것이 알려졌다. 당시 법정쌤이 이걸 온 교실에 가서 말했단다... 이 쪽팔려.. 그렇게 나는 무슨 전투적인 학생으로 알려졌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이 대학에 오는데 굉장히 큰 영향을 줬다. 면접을 봤던 모든 대학에서 이 이야기를 했다... 컨설팅을 해줬던 경희대 입사관 출신 쌤은 이걸 강조해서 자소서를 쓰라 했다. 난 싫어지만 어떡하냐 대학은 가야지... 

 그렇게 온 한국외대에서 입학하자마자 학내 언론에 들어가려 했다. 면접 보러 왔을때 국제학사에 있던 교지 '외대'를 보고 엄청 꿈꿨었다.. 근데 와 보니 독립언론이 있네? (뉴스타파를 엄청 좋아했었다.) 그래서 바로 지원하고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근데 기자생활은 상상과는 달랐다. 지루한 회의를 보고 돌아가는 길에는 하.... 이걸 계속해야 하나 생각했다. 그때 조금씩 알아갔다... 왜 부모가 기자를 반대했는지 말이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말씀하셨다. 나는 그저 너보다 먼저 살아본 사람으로 왜 이 길을 반대하는지 너가 나중에 알것이다. 근데 이건 리얼 진짜였다. 근데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이런 나를 그래도 믿고 밀어줬다. :-(

 근데 있지. 생각해보면 그냥 이전처럼 생각없이 살고 싶을때가 많다. 그저 그냥 행복하고 많이 웃고 그 시절이 좋았다. 중학교 2학년때 롤링페이퍼를 받았는데 그때 나는 그냥 웃음이 좋은 친구였다. 내가 웃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다고 했다. 나는 웃음이 많았다. 

 근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웃을때보단 울때가 많고, 많은 생각에 치여 이전처럼 행복하지도 않다. 이제는 웃음이 의무감처럼 느껴져 아 웃어야지 지금이라도 웃어야지 라고 생각한다. 

 행복하고 싶다. 이전처럼 그냥 있어도 웃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그냥 있으면 우울하다. 군대때문이 아니다. 우울한건 고1때 공부를 시작한 이후 였으니. 고등학교때는 사실 우울함은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 시간에 공부 한자를 더 하자는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좀 내려놓고 싶다. 

 그게 쉽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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