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없었다는 것은 핑계일 수밖에 없겠지만, 한동안 미술 관련 글을 쓰지 못했었네요.
한동안 다른 분야에 관심이 가있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미술 이야기도 간간이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부만 보여주는 그림의 대가라면 카라바조에 관한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카라바조의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인데 워낙 유명한 미켈란젤로가 앞에 있었던 터라
그는 그의 고향의 이름인 카라바조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Caravaggio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은 묘하게 성격 면에서도 약간의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괴팍한 성격에 사회성이 좋은 인물은 아니었다고 하죠.
교황에게 대드는 것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일화를 보면 소위 한 성격하는 인물이었죠.
카라바조 역시 자기 분을 못 참고 많은 사고를 치고 다니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미켈란젤로는 그런 성격과 달리 보는 사람들이 감동할 수밖에 없는 명작을 많이 남겼습니다.
사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성격적인 결함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 가운데에도 카라바조의 인생사는 정말 극적입니다.
살인을 포함해서 폭행 등의 죄를 짓고
열다섯 번 정도의 수사기록과 일곱 번 이상의 수감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광기 어린 성격 때문에 인격적으로 본받을 만한 사람은 전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사람이 그린 그림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점도 정말 신기합니다.
게다가 많은 그림이 성경 내용을 기반으로 한 소위 성스러운 작품이라는 점이죠.
카라바조에 관해서 이런저런 자료들을 찾아보고 나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자신의 삶처럼 모순적인 양면성을 잘 녹여낸 작가라는 점입니다.
단순하게 강렬한 명암법을 사용한 것 이상으로 모델의 선택이나 모델의 표정 등에서
해당 시대를 넘어서는 고민을 많이 한 작가라는 생각을 많이 해봤습니다.
카라바조 이후에 카라바조에게 영향을 받은 많은 작가들이 나오지만,
카라바조만큼의 강렬함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위 작품은 1597~1599년에 그려진 '나르키소스'입니다.
카라바조의 비교적 초기 그림인데요, 개인적으로 카라바조의 삶과 작품들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그림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나르키소스의 신화를 보면 모두의 사랑을 거절했던 나르키소스가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서 계속 자신의 모습만 그리다가 죽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비친 모습을 표현하는 방식이 꽤나 독특합니다.
나르키소스의 모습을 보여줄 때는 나르키소스를 사랑하는 에코의 시선이 표현되고,
보통 자신의 모습에 반한다는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화사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 많은데요.
좌 :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 에코와 나르키소스
우 : 루이 장 프랑스와 라그르네 - 에코와 나르키소스
카라바조의 그림에서는 에코도 없이 나르키소스만 그리고 있는 데다가,
유독 물에 비친 모습이 어둡게 표현이 되어있죠.
자신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의 어두운 모습을 보고 있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어둡다고만 하기는 어려운 것이 반사가 잘 되는 흰옷 부분은 밝게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대비가 높은 상황에서, 전반적으로 어둡게 표현되는 방식, 거기에 그림자의 경계가 강하게 드러나는
Hard Light를 사용한 이미지를 사진이나 영상에서 Low Key라고 합니다.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Low Key를 찾아보기는 쉽습니다만,
물에 반사된 모습은 특히나 밝고 어두운 부분의 차이가 심하게 나면서 전반적으로 더 어둡게 표현되어 있죠.
Low Key는 아무래도 우울하고 묵직한 느낌을 주게 되는데요.
반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어둡고 묵직하게 표현하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겁니다.
게다가 이미지에 그려지는 모습이 신화 속에 등장하는 절정의 미남을 그렸다고 보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어 보이는 외모이기도 합니다.
위의 그림은 1500년경에 그려진 나르키소스와 제임스 배리의 주피터와 주노입니다.
이마에서 코로 내려오는 부분이 약간 비현실적인 느낌이 나는 것을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신화 속 인물의 외모를 표현할 때는 저런 식으로 이상화한 표현이 많이 사용된 편임에도
카라바조의 나르키소스에서는 그런 이상화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나체를 그린 것도 아니고, 옷을 입혔다는 점도 독특합니다.
실제로 카라바조는 모델 역시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길거리의 사람들을 주로 썼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소위 거룩한 그림이지만, 모델의 모습이 의외로 친근해 보이는 느낌이 있죠.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친근해 보이는 모델이 보여주는
거룩한 장면이라는 이질적인 느낌에서 오는 부분도 큰 것 같습니다.
거기에다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내용에서 시점을 살짝 비트는 매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그림들에서는 나르키소스가 '자신의 모습에 반했다'에 집중하고 있는 반면,
카라바조의 그림에서는 자신의 모습에 반해서 '죽었다'에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죠.
금방이라도 뛰어들 것 같은 자세를 한 상태로 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림의 상당 부분을 어둠 속에 감추어놓았던 것처럼 카라바조의 그림에서는
죽음, 고통, 공포 등과 같은 부정적으로 보기 쉬운 소재와 표현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런 부정적인 부분과 대비되는 구원, 연민, 희망 등도 보이고 있죠.
이런 부분들을 종합해 보면, 카라바조는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이는 개념이나 사물의 충돌을 이용해서
강렬한 대비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그림에서 서사를 보여주기보다는 강렬한 한 장면을 따로 떼서 보여주는 느낌을 많이 줍니다.
그리고자 하는 것이 있을 때 단순하게 보여주기 보다 양면적인 모습을 같이 보여주려고 노력한 흔적을
카라바조의 수많은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카라바조의 삶을 바라보면
이런 모순되어 보이는 모습이 삶과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워낙에 범죄를 저지르고 쫓기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받는 극단적인 상황을 자주 겪은 인물이죠.
스스로도 광기와 죄의식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런 부분들이 작품에 녹아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카라바조는 이런 광기와 죄의식이 잘 드러나는 주제를 여러 번 그렸습니다.
특히 죽음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요.
그중에서 참수라는 잔인하게 표현되는 소재를 많이 그렸습니다.
카라바조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는 메두사가 그 시작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597년에 그려졌다고 하니 앞서 이야기한 나르키소스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 그림을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해서 사형장을 찾아가서 관찰도 했다고 하니
무척이나 공을 들인 그림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래 그림이 동그란 테두리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나무 방패에 그려져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메두사의 머리를 아테나의 방패인 아이기스에 장식되었다는 내용을 따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메두사를 보여주고자 했다면, 이런 모습만을 보여주기보다는 서사를 보여줄 수도 있었을 텐데
앞서 나르키소스에서도 에코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것처럼 메두사를 물리치는 페르세우스의 영웅적인 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메두사의 잘린 목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는 순간의 공포를 표현한 듯한 표정과 머리카락의 뱀들 역시 생생하게 묘사해서 유쾌한 그림이라고 말하긴 정말 어렵겠죠.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하게 메두사를 그린 그림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살짝 비튼듯한 부분이 있습니다. 저 메두사의 얼굴이 카라바조 본인의 얼굴이라는 점입니다. 메두사를 그릴 당시에도 카라바조는 범죄 관련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주를 받고, 영웅에게 죽임을 당하는 대상으로 자신을 그려 넣은 것은 이런 상황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중에 이야기해 볼 다윗과 골리앗 그림에서 역시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는데요. 스스로를 목이 잘린 인물의 모델로 사용한다는 것이 카라바조가 평생 가지고 있었던 죄책감과 관련이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카라바조는 성화를 많이 그렸지만, 무거운 주제를 다룬 그림도 많았습니다.
특히나 참수와 관련된 그림들도 꽤 많이 있는데요.
주제가 워낙 무겁기도 하지만, 같은 주제를 그린 다른 그림들과의 차이를 보이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1599-1602에 그려진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논개와 비슷한 이미지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자기 나라에 쳐들어온 적장을 찾아가서 신뢰를 얻고, 술에 취하게 한 뒤에 목을 베어서 돌아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워낙에 강렬한 내용 때문인지, 많은 미술작품으로도 남겨진 내용입니다.
위 그림에서는 카라바조 특유의 명암 대비가 강렬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유디트에게 흰옷을 입혀서 더욱 주목받게 하는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정말 연극에서 사용하는 Spotlight를 준 것 같은 느낌이 있죠.
이미지의 빈 곳을 빨간 커튼으로 채워 넣어서 이미지의 밀도감도 충분히 채워주면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강렬함도 더해주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여기서 독특하게 볼 수 있는 부분은 유디트의 얼굴입니다. 적장을 분노한 눈으로 강렬하게 쏘아보는 하녀와 죽임을 당하면서 놀란 적장의 얼굴과 달리, 유디트의 얼굴은 뭔가 힘들어 보이고,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 있습니다.
아래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봐도 알 수 있지만,
유디트는 나라를 구한 영웅이기 때문에 적을 단죄한다는 강렬한 이미지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Book_of_Judith
많은 그림에서 유디트를 아주 강한 여성의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클림트의 유디트는 확실히 좀 튀는 것 같긴 합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런 강한 이미지로 표현되는 것이 마냥 어울리지는 않습니다. 유디트는 전쟁터에 나가본 적도 없고, 이전까지 사람을 죽여본 적은 더더욱 없는 과부로 나옵니다. 아무리 굳은 마음을 먹고 거사를 치르는 것이라 해도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는 사람이 목을 자를 때는 카라바조가 그린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것이 더 현실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사실적인 부분을 걸고 이야기하자면, 목을 베는데 옷에 피 한 방울도 안 튀는 부분은 어색하게 바라볼 수 있겠죠.)
이런 면에서 카라바조의 유디트가 다른 그림들과 달라 보이는 것은 유디트의 표정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란히 한곳을 바라보고 있는 하녀와 유디트는, 옷, 피부, 표정 등 다양한 부분에서 서로 대비를 이루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그 외에 세례 요한의 머리를 가진 살로메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을 봐도 원하는 머리를 가지게 되어서 자랑스럽거나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렵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에 나오는 골리앗 역시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이라고 합니다. 이때는 살인죄로 쫓기도 있던 터라 사면을 구하기 위해서 그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자신이 이렇게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용서를 구한다는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의문과 추측이 있지만, 결국 사면되기 전에 죽었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그런 삶 속에서 자신의 양면적인 부분을 고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이나 신화 등에서 나오는 엄격한 선악 구분을 하지 않고,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부분들은 자신의 삶의 영향이 분명히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삶을 옹호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삶에서 느낀 부분들 때문에 카라바조의 그림이 단순하게 성경이나 신화의 장면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고민해서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카라바조의 강한 명암 대비에 반해서 그의 스타일을 따라 한 사람들을 카라바기스티라고 한다고 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Caravaggisti
하지만, 이들의 그림을 보면, 카라바조의 형식을 따라 했을 뿐 고민까지 따라 하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그림이 많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유디트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 있어서 가져와봤습니다. 못 그린 그림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카라바조의 그림과 달리 유디트를 단편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형식이 유행을 하면 이를 보고 따라 해볼 수 있고, 실제로 따라 해보는 것이 자신의 실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깊이 고민해 보지 않고 무작정 따라 해보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소위 원조와 아류작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이 특정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에 관한 부분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걸 보면 저도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참 많이 드네요.
단지 따라 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런 부분을 더 고민해서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든 작가 역시 많습니다.
루벤스나 렘브란트와 같은 화가들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겁니다.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고, 정말 멋진 작가들입니다.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이야기해 보고도 싶은 분들입니다.
그 외에 개인적으로는 카라바조가 가졌던 광기나 폭력성을 잘 살리면서 명암 대비도 강렬하게 사용한 작가로 프란시스코 고야가 많이 떠올랐습니다. 고야 역시 초창기에는 비교적 밝은 그림을 그리다가 청각 장애를 가지게 되면서 점점 어두워진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데요.
그의 유명한 작품인 1808년 5월 3일이나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와 같은 작품에서 묘하게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면서 느꼈던 묵직함이 느껴졌습니다. 물론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양면적인 대비보다 한쪽으로 치우쳐진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지만, 처음 카라바조의 그림을 봤을 때 느껴졌던 강렬함을 고야의 그림을 보면서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죽음을 다룰 때 연민의 감정을 같이 담아내는 작품이 있었는가 하면, 성스러운 주제를 세속적인 느낌이 들도록 그리는 부분도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면서 찾아볼 수 있는 재미 중 하나입니다.
카라바조는 평소에도 뒷골목을 돌아다니면서 그곳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또 그들을 모델로 썼다고 합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그런 작품들이 적어지지만, 초창기에는 풍속화에 가까운 그림도 그렸습니다.
1594~95년에 그려진 카드놀이 사기꾼과 점쟁이 집시에서는 아직 깊은 명암 대비를 보이지는 않지만, 순진한 청년과 이를 이용하는 인물들이 잘 드러납니다. 왼쪽 그림에서는 두 명의 사기꾼이 서로 짜고 패를 알려주고 있고, 오른쪽 그림에서는 점을 봐주는 척하면서 반지를 빼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카라바조가 뒷골목에서 놀면서 이런 상황을 보거나 경험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죠. 그리고 이런 모델 역시 자신이 로마의 뒷골목을 돌아다니면서 구했다고 하니, 그는 이런 생활을 즐기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신화 속 인물이나 성인 등을 묘사할 때도 지극히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느낌을 종종 보여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 그림은 1593년에 그린 어리고 병든 바쿠스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정말 재미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바쿠스는 술의 신이니까 술을 많이 마시겠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병이 났다는 관점도 재미있었고, 심지어 병에 걸렸다고 한들, 손톱에 저렇게 때가 끼고 입술이 바래서 보잘것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신을 표현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주 노골적으로 그려진 모습이 독특했습니다.
1602년에 그려진 성 마태와 천사 역시 퇴짜를 맞고 다시 그려졌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 작품이 소실되어 정말 아쉽게 생각하는 작품입니다.
아래 왼쪽이 첫 번째 작품인데요. 신약성서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의 저자이자 12사도 중에 한 명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행색이 초라합니다. 게다가 글도 잘 모르는지 천사가 손을 잡고 직접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태는 사도가 되기 전에 세리라는 직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글을 모르진 않았을 것 같은데 표현은 육체노동을 하던 계층처럼 표현을 했습니다. 다분히 의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카라바조는 마태를 성스럽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당에 걸 그림인데 이런 그림을 좋아하긴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퇴짜를 맞고 다시 그린 그림이 오른쪽에 있는 그림입니다. 수직 구도로 공중에 떠있는 천사를 보여주면서 거룩한 느낌을 보여주고자 했고, 마태의 머리에는 후광도 달았습니다. 그래도 고집을 부리고 싶었는지 보잘것없어 보이는 탁자와 의자, 맨발 등을 여전히 남겨놓았습니다. 이런 부분을 보면 미켈란젤로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조각의 콧대가 너무 높아 보인다고 했더니 손에 한 줌의 돌가루를 들고 조각상으로 올라가서 깎는 척하면서 그대로 내려왔다는 이야기죠. 두 명의 미켈란젤로는 자존심이 강한 만큼, 의뢰인의 요구에도 자기 고집을 완전히 꺾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찌 보면 이런 고집이 있었으니 거장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었겠죠.
1602년에 그려진 의심하는 도마와 같은 작품에서도 의심을 굉장히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실제로 손을 넣어보지 않고 직접 보고 믿게 되었지만, 카라바조는 손가락을 직접 넣어보는 도마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의 이 부분(요한복음 20장 24절부터 나옵니다)의 핵심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는 말처럼 의심하지 않는 믿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카라바조는 여길 비틀어서 의심에 더 방점을 찍고 있죠. 성스러운 믿음을 표현하기보다는 세속적인 의심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외에 카라바조의 작품에서는 성스럽게 표현하거나 담백하게 표현하는 것이 어울릴 것 같은 장면을 에로틱하게 그리거나 세속적인 느낌이 나게 그린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역시 앞서 이야기한 대비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영상을 만들다 보면, '대비'라는 단어에 관해서 고민해 보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었을 때 시선이 끌리는 영상은 흔치 않습니다. 보통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데요.
선택하는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 사이의 대비를 만들어야 하고,
집중하고 싶은 것과 집중하고 싶지 않은 것 사이에도 대비를 만들어야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이런 부분은 영상이라는 넓은 영역뿐만 아니라 색보정이라는 조금 더 좁은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선택과 집중은 그렇지 않은 것과의 대비를 만드는 과정인데
어떤 요소로 대비를 만들 것인지 고민을 하게 되는 입장에서
카라바조의 삶과 미술 작품들을 보니 배우는 것도 많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단순하게 빛과 어둠의 대비를 넘어서 다양한 요소들을 대립적으로 내세우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요.
카라바조의 삶을 본받아서는 안되겠지만, 카라바조가 했던 고민은 지금 영상을 만드는 입장에서도
다시 한번 돌아봐도 좋을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PS
처음에는 명암법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라는 생각으로 카라바조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요. 이런저런 내용들을 찾아보다 보니 카라바조가 감추고 보여주고자 했던 것인 단순히 명암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글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그림 하나하나를 보면서 빛을 어떻게 바라보고 사용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당연히 좋겠지만, 이런 식으로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는 경험이네요.
PS.2
색보정 수업도 열게 되어서 댓글로 남겨봅니다.
오래간만에 세 반을 모두 수업을 열게 되었습니다.
수업을 리뉴얼 하고서는 세 반을 전부 운영하는 것은 처음이네요.
이번 수업은 평일 반으로 진행을 해봅니다.
평일반 수업을 진행해달라는 요청도 있었고, 저희 일정과도 맞물리면서
매주 화요일, 수요일 수업으로 진행해봅니다.
이전 수업을 진행해보니 몰아서 하는 수업은 밀도감이 더 높은 느낌이 있습니다.
모집은 8월 4일부터 8월 11일 24시까지 진행을 합니다.
기본반은 8월 16~1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합니다.
관련 내용과 신청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기본반 모집 링크 : https://cafe.naver.com/teamcsraca/427
실습반은 기본반 수업 한 주 뒤인
8월 23일~24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진행합니다.
실습반 모집 링크 : https://cafe.naver.com/teamcsraca/428
심화반은 실습반 수업 한 주 뒤인
8월 30일~31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진행합니다.
심화반 모집 링크 : https://cafe.naver.com/teamcsraca/429
수업 리뉴얼에 관한 내용은 아래 링크에 조금 더 자세히 써보았습니다.
https://cafe.naver.com/teamcsraca/418
더운데도 찾아와 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재미있는 수업 진행해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오는 이번 수업도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