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 북서울 미술관에서 진행하는 테이트 미술관 특별전을 다녀왔습니다.
7호선의 끝자락 하계역 쪽에 있습니다. 저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울시립 남서울 미술관이 있어서 종종 가보곤 하는데요.
북시립 미술관은 멀다 보니 저도 처음 가봤습니다. 엄청 깔끔하게 잘 구성되어 있더라고요.
빛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 영상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기도 했는데요.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 제목은 꽤나 이상합니다. 너무 넓은 주제를 이야기하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회화, 조각, 사진, 영상 그 외의 어떤 시각적인 매체를 다루더라도 빛에 관해서는 다 고민을 하게 되거든요.
이 제목은 요리 관련 박람회에서 제목을 '맛'이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의문을 조금 가지고 들어갔는데요. 돌아보고 나서는 이런 제목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크게 두 가지 의문을 가지고 이 전시를 바라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빛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개별 예술가들이 빛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크게 어떤 시대적인 흐름이 있었고, 그 안에서 개별 예술가들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라는 관점인데요.
보통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 때문으로 보입니다만, 시대마다 빛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습니다.
이전에 블로그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중세에는 빛 하면 신의 은총 이런 이미지였거든요.
https://blog.naver.com/ahisfy/222219755405
그러다가 르네상스가 오면서 빛 때문에 생기는 명암 이런 것을 의미 부여보다는
극적인 효과를 드러내기 위해서 기술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뉴턴의 광학과 같은 개념이 나오면서 빛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시도들이 나오죠.
빛은 알갱이가 있는 입자다 이런 것부터 해서 빛의 스펙트럼을 비롯해서 색상환 이런 개념들이 나오는데요.
또 여기에 반대해서 괴테는 색채론을 내면서 빛을 그렇게 분석적으로만 볼 게 아니라
색은 빛과 어둠에서 나오는 것이고 이것을 감정과 엮어서 보자는 주장도 나오고요.
이런 시대적인 흐름이 있어왔고, 작가 개개인이 이런 흐름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겠지만,
조금 더 독특한 생각을 더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을 해왔습니다.
이런 두 개의 축을 생각하면서 기본적으로는 시간의 흐름을 가지고 가지만,
시간을 뛰어넘어서 작가들의 생각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으면 과감하게 같은 공간에 배치를 해서 보여주기도 합니다.
여담으로 제가 미술에 관심이 있긴 하지만, 취미로 하고있다보니 모르는 부분들이 많은데요.
특히나 영국의 작가들은 윌리엄 터너와 같이 아주 유명한 작가를 제외하면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전시에서 그동안 몰랐던 작가들을 알게 되었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입구 밖에는 입장하기 전에 볼 수 있는 작품이 있는데요. 데이비드 바첼러의 브릭레인의 스펙트럼 2 라는 작품입니다.
다양한 색이 마구 빛나고 있는 전광판을 볼 수 있습니다.
이분의 다른 작품은 안에서 후반부에 볼 수 있는데요.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는 기회가 닿으면 해보겠습니다.
https://www.tate.org.uk/art/artworks/batchelor-spectrum-of-brick-lane-2-t12800
높게 쌓여있는 다양한 빛을 보니까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백남준의 다다익선이 생각났는데요. 많이들 아시는 유명한 작품이죠.
안전이나 부품의 결함 등의 이유로 2년간의 수리를 마치고 올해 시험 운전을 다시 시작했다고 합니다.
기계이고, 이제는 많이 사용하지 않는 CRT 부품을 수급하는 문제도 있고, 해서 외관이 아닌 이미지를 보여주는 부분을 LCD로 대체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정상 운영이 된다고 하면 한 번 가서 다시 보려고합니다.
아무튼 이런 생각을 하고 방향을 틀자마자, 백남준의 작품이 있었습니다. 촛불 TV라는 작품입니다.
생각한 게 얻어걸리니까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https://njp.ggcf.kr/%EC%B4%9B%EB%B6%88-tv/
이건 테이트 미술관에서 가져온 것은 아니고,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대여해온 것이라고 합니다.
빛이라는 전시장에서 직관적으로 빛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죠. 저 초는 실제로 타고 있는 초였는데요.
제가 갔을 때는 거의 새것이더라고요. 다른 분들이 올린 자료 등에서는 많이 녹아있는 초를 촬영한 사진도 봤는데요.
광원은 정보와 같다고 한 말을 백남준 아트센터 설명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디지털 정보가 대부분 빛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맞는 말인 것 같죠.
그리고 어릴 때 이런 생각을 해봤는데 TV를 보면서 저 안에 사람들이 들어있다는 생각 같은 걸 해보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그런 걸 구현해놓은 작품 같다는 생각을 하니까 이런 부분도 재미있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뒤가 뚱뚱한 브라운관 TV를 아예 본 적이 없는 친구들도 이제는 많을 텐데
그런 친구들이 저 작품을 보면 TV라고 생각은 할까? 아니면 뭐라고 어떤 생각을 할까 하는 점이 좀 궁금했습니다.
촛불 TV를 지나서 실내로 들어가면 1. 빛, 신의 창조물이라는 소제목이 적혀있는 방이 나옵니다.
시작부터 볼 거리가 많은데요. 제 눈에 먼저 들어온 작품은 윌리엄 터너의 대홍수입니다.
https://www.tate.org.uk/art/artworks/turner-the-deluge-n00493
William Turner - The Deluge 1805
가로 세로가 2.3미터에 1.4 미터 정도라고 하니까 상당히 큰 작품이죠. 크기 때문에 눈에 들어오는 것도 있지만,
그림을 보면 격정적인 순간이 잘 드러나다 보니 눈을 더 잡아끄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 작품을 그린 윌리엄 터너는 컨스터블과 더불어서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두 작가의 작품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글이 길어지다보니 일단 이번 글에서는 컨스터블에 관한 이야기는 넘겨볼까 합니다.)
윌리엄 터너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영국 20파운드에 들어가는 인물이니까요.
정말 국민들한테 사랑받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영국에서 주는 엄청 큰 미술상의 이름이 터너 상인만큼 영국 국민들한테도 사랑받는 화가인데요.
소위 낭만주의로 분류되는 화가이지만, 빛을 정말 많이 연구했다는 점에서는 인상주의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모네가 터너의 그림을 보고 많이 연구했다고 하니 인상주의에 영향을 줬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명확한 형태보다는 분위기를 그려내는 듯한 그림이 많아서 추상화처럼 보이는 그림도 많습니다.
빛에 관심을 가졌고, 평생 관심을 놓지 않았지만, 점점 말년으로 갈수록 추상화되는 듯한 경향을 보이는 데에서 모네와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모네의 말년작 '수련' 등을 보면 추상화되어가는듯한 느낌이 나죠.
Monet - Water_Lilies 1914-26
다시 돌아와서 대홍수라는 작품에서 빛은 과거 중세에 사용하던 빛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 영상에서도 이야기했었지만, 중세에는 빛이 신의 능력이나 권위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대홍수 역시 성경에 나오는 타락한 인간에 대한 심판의 모습이죠.
멀리 보이는 빛과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 닿는 빛은 신이 내린 재앙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희망보다는 절망적인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서 비극적인 상황에 빛을 닿게 해서 그 비극을 더 자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어두운 부분은 고통과 파멸 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독특한 배치이긴 한데 터너의 대홍수 맞은편에는 또 다른 대홍수 그림이 있습니다.
제이콥 모어가 그린 대홍수 라는 작품입니다.
https://www.tate.org.uk/art/artworks/more-the-deluge-t12758
Jacob More - The Deluge 1787
제이콥 모어라는 화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 화가가 그린 대홍수는 앞서 이야기한 터너의 대홍수보다 20년 정도 먼저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좀 다르죠. 앞서 본 홍수보다 훨씬 차분합니다.
터너의 대홍수에서는 비극적인 모습을 강렬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빛을 사용했다면,
제이콥 모어의 홍수에서는 어려움이 지나고 동터오는 해를 보여주면서
희망이 남았다고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영적이고 신의 권능을 보여주는 소재로 빛을 사용하지만,
그 빛이 각각 절망과 희망을 보여주는 듯한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을 같이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윌리엄 터너의 대홍수 오른쪽에는 태양 속에 선 천사가 있습니다.
https://www.tate.org.uk/art/artworks/turner-the-angel-standing-in-the-sun-n00550
William Turner - The Angel standing in the Sun 1846
이 그림에서는 구약성경에 화염검을 들고 있는 천사를 볼 수 있습니다.
좌측에는 살해당한 아벨의 시신을 보고 슬퍼하는 아담과 이브,
오른쪽에는 유디트가 자신이 죽인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내려다보는 그림이라고 하는데요.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니까 알지, 그냥 이 그림을 보여주면, 어떤 장면인지 맞추기 어려울 것 같죠.
크기가 가로세로 80cm 정도라서 아주 큰 편은 아닙니다.
게다가 자세히 들여다봐도 형체를 명확하게 구별해 내기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앞서본 대홍수는 1805년 작품으로 터너가 30세에 전시된 작품이고 태양 속의 천사는 1846년 71세에 전시된 작품인데
터너의 작품은 후기로 갈수록 점점 추상화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태양의 빛을 표현하고자 해서인지 노란색이 주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의 빛 역시 신의 권능 등을 보여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천사가 있는 위쪽의 영적인 공간은 밝게,
슬픈 상황을 보여주는 아래쪽의 현실은 어둡게 표현한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대조는 티치아노의 성모승천과 같은 작품에서도 볼 수 있죠.
Tizian - Assumption of the Virgin 1516-18
이렇게 위와 아래를 나눠서 밝기의 차이를 만드는 방식은 세로 영상이 만들어지고 있는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 고민해 볼 수 있는 구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전에는 영상은 전부 가로로 찍어라고 했었고, 여전히 가로로 찍는 영상이 많지만,
세로로 찍는 것을 목표로 기획되는 영상 역시 많이 생기잖아요.
이런 기획을 고민하고 있을 때 고민해 볼 수 있는 구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외에도 빛을 영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첫 번째 주제를 담은 공간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들을 볼 수 있는데요.
윌리엄 블레이크는 화가이기도 했지만,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으로도 유명하다고 합니다.
시인으로의 재능은 제가 영어가 짧아서 제대로 알기 어렵지만,
독특한 그림들은 몇 가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억하는 그림 중에 컴퍼스를 쓴 그림이 많습니다.
저는 윌리엄 블레이크 하면 뉴턴이 떠오르는데요.
https://www.tate.org.uk/art/artworks/blake-newton-n05058
William Blake - Newton 1795
그림이 좀 묘하죠. 뉴턴은 영국을 대표하는 과학자인데 알몸으로
저렇게 컴퍼스를 쥐고 어정쩡한 자세로 측량하는 것이 편해 보이는 자세는 아닌듯 합니다.
실제로 블레이크는 뉴턴을 싫어했고, 이성이나 합리성보다 감성이 가지는 힘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뉴턴이 만들어낸 광학, 미적분, 만유인력 등이 이성과 논리가 중요해지는 사회를 만들게 되고
이렇게 세계관이 바뀌는 과정을 무척이나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예술은 생명의 나무요. 이성은 죽음의 나무이다.라는 말까지 했다고 하는데요.
윌리엄 블레이크 외에도 이런 뉴턴의 관점을 무척이나 싫어했던 분이 또 있었습니다.
뉴턴의 광학에 반대해서 색채론을 저술한 괴테인데요.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2047
지금에 와서 돌아보자면, 뉴턴의 광학이 대부분 맞는 말입니다만,
블레이크나 괴테가 경계하던 부분 역시 현대에는 고민해 볼 만한 부분이 있죠.
이 부분은 조금 뒤에 괴테의 영향을 받은 터너의 작품을 보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 중에 고대의 날이라는 작품도 독특하죠. 여기서 컴퍼스를 지니고 있는 분은 신이라고 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The_Ancient_of_Days
William Blake - The Ancient of Days 1794
정확히 컴퍼스는 아니지만, 손으로 컴퍼스를 대신하고 있죠.
앞서서 뉴턴이 가지고 있는 컴퍼스는 부정적으로 묘사했지만, 여기서 신의 묘사는 그리 부정적이지 않다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블레이크는 영적인 부분을 중요시 여겼고, 다양한 신화적인 그림도 많이 그렸습니다.
기독교적인 교리를 이용하는 그 역시 많이 그렸죠.
다만, 그 당시에 믿고 있던 크리스트교의 교리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이성적으로만 규정되는 사회에 반대하고, 한편으로 기독교의 교리도 반대했다는점에서 잘은 모르지만 찾아볼수록 독특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 역시 이런 종교적인 색채를 가지고 영적인 빛의 관념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아담을 심판하는 하나님
https://www.tate.org.uk/art/artworks/blake-god-judging-adam-n05063
착한 천사와 악한 천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https://www.tate.org.uk/art/artworks/blake-the-good-and-evil-angels-n05057
왼쪽 William Blake - God Judging Adam
오른쪽 William Blake - The Good and Evil Angels
이 두 작품에서 불꽃은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을 심판하는 하나님에서 불꽃은 신의 권능을 보여주는 빛의 근원처럼 표시되는 반면에
착한 천사와 악한 천사에서는 불이 악한 천사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아담을 심판하는 하나님에서 아담을 심판하는 모습이 그리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말처럼 실제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보실 수 있죠.
이런 면에서 보면 전반적으로 불꽃이 긍정적인 의도로 사용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나 착한 천사와 악한 천사는 보시는 것처럼 인종차별적인 요소 역시 가지고 있죠.
개인적으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유명한 작품들이 있음에도
뭔가 의도를 정확하게 알기 어려운 이런 그림을 선택해서 가져온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좀 생기긴 했습니다.
오히려 이런 관점에서는 조지 리치먼드가 그린 빛의 창조와 같은 그림이 더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https://www.tate.org.uk/art/artworks/richmond-the-creation-of-light-t04164
George Richmond - The Creation of Light 1826
저는 조지 리치먼드라는 화가를 잘 몰라서 그림만 보고는 앞서 이야기한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인 줄 알았습니다.
찾아보니 윌리엄 블레이크를 따르는 모임인 고대인파라는 그룹의 일원이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그 자체로 어둠을 밀어내면서 빛이 창조되는 모습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그렸습니다.
블레이크나 리치먼드 모두 조각 같은 느낌이 나는 그림을 그렸는데요.
실제로 봐도, 돌을 깎아서 만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질감 표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림의 주제적인 표현에서도 빛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빛을 통해서 나타나는 질감으로 빛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방식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런 방식으로 접근한 회화를 뒤에서 또 만나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영상을 촬영할 때 빛으로 인한 질감 표현을 고민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데
이들의 작품처럼 질감이 강조되고, 윤곽선이 강조되는 듯한 느낌의 작업 역시 고민해 봄직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방에는 아니쉬 카푸어가 만든 이쉬의 빛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https://www.tate.org.uk/art/artworks/kapoor-ishis-light-t12004
Anish Kapoor Ish's Light 2003
개인적으로 아니쉬 카푸어라는 작가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반타 블랙이라는 정말 검은 안료를 만들고 나서 예술작업에 이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면서 많은 욕을 먹었던 작가이죠.
이에 관련된 이야기만 해도 길 것 같은데요. 그 바람에 더 좋은 안료가 개발되었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런 과정에서 생긴 수많은 사건들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얼핏 보면 큰 항아리의 일부를 잘라서 만든듯한 느낌입니다.
가까이서서 안을 들여다보면 반사되는 모습은 위, 아래가 반전되어 있는데요.
곡면이 아주 완벽한 것은 아니라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울렁울렁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바넷 뉴먼의 안나의 빛이라는 작품을 참고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바넷 뉴먼이나 마크 로스코의 그림과 달리 이 작품은 저에게 막 압도감을 주는 느낌은 아니더라고요.
아마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이라는 선입견이 작동하지 않았나 싶긴 합니다.
그다음으로 넘어가면, 빛 연구의 대상이라는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본 부분입니다. 여기서도 윌리엄 터너의 작품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앞서서 터너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추상성이 강해지는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제목이 없다면 그냥 추상화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호수가 지는 석양이라는 작품입니다.
https://www.tate.org.uk/art/artworks/turner-sun-setting-over-a-lake-n04665
William Turner Sun Setting over a Lake c.1840
세부 묘사보다는 분위기를 전달하고자 해서 이렇게 그려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상주의를 알린 인상 해돋이보다 더 인상만 남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작품이죠.
이런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빛과 색의 표현을 연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제가 이전에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분위기를 잘 표현하기 위해서
스푸마토와 같은 기법을 썼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https://blog.naver.com/ahisfy/222465948105
여기서도 빛과 색의 표현을 위해서 공기 속에 산란되는 빛에 신경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앞서서 태양 속에 선 천사에서도 자세한 디테일을 찾아보긴 어렵지만,
태양에 있다는 표현에서처럼 이글이글하는 열기가 느껴지는 듯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열기 속이라면 공기도 일그러져 보일 테니 이렇게 그려지는 것이 더 어울릴 수 있겠죠.
그리고 이렇게 터너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대기의 흔들림을 보여주는 듯한 그림이 많이 있습니다.
터너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비, 증기, 그리고 속도와 같은 그림에서도 이런 부분을 찾아볼 수 있고요.
폭풍이 치는 가운데 자신을 묶어놓고 관찰한 다음에 그렸다는 눈 폭풍 속 항구 어귀의 증기선과 같은 작품에서도 대기의 흔들림을 잘 표현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왼쪽 William Turner - Rain, Steam and Speed 1844
오른쪽 William Turner - Snow Storm - Steam-Boat off a Harbour's Mouth 1842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다른 두 작품에서도 이런 대기의 흔들림 빛의 산란 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림자와 어둠 - 대홍수의 저녁이라는 부제를 가진 그림입니다.
https://www.tate.org.uk/art/artworks/turner-shade-and-darkness-the-evening-of-the-deluge-n00531
다른 하나는 빛과 색채(괴테의 이른) - 대홍수 후의 아침, 창세기를 쓰는 모세라는 긴 이름을 가진 작품입니다.
왼쪽 William Turner Shade and Darkness - the Evening of the Deluge 1843
오른쪽 William Turner Light and Colour 1843
이 두 작품은 1843년에 전시된 작품으로 같이 봐야 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소재로 보면 앞서 본 1805년 전시된 대홍수와도 관련이 있는 작품입니다.
앞서 보신 비, 증기 그리고 속도와 같은 그림과도 어느 정도 비슷한 면이 있죠.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제목에 괴테의 이론이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다는 점입니다.
괴테는 색채론이라는 책을 쓰면서 뉴턴이 이야기했던 광학을 비판하고자 했습니다.
앞서서 윌리엄 블레이크와 어느 정도 비슷한 관점이 있었죠.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분석하려는 것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괴테는 특히나 모든 색이 모여서 흰색을 이룬다는 개념을 무척이나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빛과 색을 보면서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가져야 할 인간이
모든 것을 분석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자체에 대한 불편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질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을 양적으로 치환하는 방식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것이죠.
빛과 색이 감정에 끼치는 영향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빛과 어둠은 나누어서 볼 수 있고 고유한 색이 있다고 봤습니다.
밝은 곳은 따뜻한 색조, 어두운 곳은 차가운 색조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죠.
실제로 이 두 그림에서는 명암대비와 함께 한난 대비도 사용이 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접근은 지금의 영상 색보정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부분이죠.
앞서 본 작품들과 지금 본 작품들을 보고 있지 면,
동심원 형태의 대기의 모습이 레디얼 블러를 사용한 것 같은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마스킹이랑 같이 사용해 보는 것도 제법 재미있는 접근 방식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공기의 흐름이 마치 보이는 것처럼 표현한 방식에서 한 걸음 더 적극적으로 나아간다면
고흐가 본 밤하늘과 같은 느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이번 기회에 윌리엄 터너를 찾아보고 공부하면서 정말 대단한 화가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이런 영감을 받아서 그렸다라고만 말하는 정도로는 터너가 대단하다고 말하기 어렵겠죠.
이번 전시에서는 터너가 그린 다양한 강의 도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원근법, 빛의 반사 등을 연구한 강의 도안을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tate.org.uk/art/artworks/turner-lecture-diagram-65-interior-of-a-prison-d17090
그중에서도 감옥 내부를 그린 그림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의 상상의 감옥을 모사한 작품들인데요. 그 당시에 엄청 유명한 판화 작품이라고 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Imaginary_Prisons
묘사보다 분위기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많이 유명하지만,
터너도 젊은 시절에 빛과 그림자를 묘사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었고, 그런 흔적이 담긴 도안을 여러 장 볼 수 있습니다.
흑백으로 빛이 닿는 공간의 그림자가 어떻게 생기는지 원근법과 같이 잘 그려내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이죠.
영상 작업을 할 때 조명을 어떻게 치면 어떤 느낌이 날 지 고민하는 것처럼 그림을 통해서 같은 고민을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화 촬영할 때 공간을 보여주는 컨셉아트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 외에 금속으로 된 구에 빛이 비치는 모습을 담아낸 그림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실제로 3D 모델링에서도 사용하는 방식으로 알고 있는데
이미 1800년대 초반에 작업을 하고 있었다고 하니 신기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뒤의 방으로 넘어가면 금속구는 아니지만 정말 독특한 작품을 보게 됩니다.
릴리안 린의 액체 반사라는 작품인데요.
http://www.lilianelijn.com/portfolio-item/liquid-reflections-1966-1968/
이 작품은 도대체가 뭘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찾아보면 우주를 친밀한 규모로 사유해 보려고 한 시도이다.
입자이자 파동의 역할을 하는 빛의 역설을 은유한 작품이다. 이런 설명들이 있는데요.
저 원판 위에서 돌고 있는 두 개의 구체의 움직임이 행성의 공전 이런 걸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독특한 느낌이 많이 듭니다.
다음방은 아마 많은 분들이 좋아하셨을 것 같은데요.
빛의 인상이라는 주제로 전시한 방입니다. 이름에서처럼 인상주의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방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도싯셔 절벽에서 바라본 영국 해협입니다. 존 브렛이라는 화가의 작품이고요.
모네와도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John Brett - The British Channel Seen from the Dorsetshire Cliffs 1871
제가 산 도록의 겉표지에도 사용되어 있습니다. 펼치면 한편의 포스터처럼 볼 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이 그림이 이 전시를 대표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그림인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 앞에 사람들이 진짜 오래 머물러있더라고요.
가로 세로가 2미터 1미터 정도니까 그렇게 작은 그림은 아닙니다. 보고 있으면 뭔가 상쾌한 기분이 드는 그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멀리서 한눈에 봤을 때도 뭔가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인데요.
가까이서 보면 더 놀랍습니다. 구름 같은 데를 자세히 보면 세밀하게 막 그린 느낌보다는
붓질 몇 번을 쓰윽 한 듯한 느낌인데 저렇게 표현된다는 것이 정말 신기합니다. 밥아저씨가 사용할법한 그런 붓 터치랄까요.
반면에 바다 쪽은 엄청 자잘한 붓질로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점묘법을 이용한 그림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촘촘한 붓질이 보입니다.
점묘법이 나온 것은 이보다 10여 년 가까이 뒤였으니까요. 꽤나 선구적인 그림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햇빛이 바다에 부딪혀서 밝게 빛나는 부분의 묘사는 보면서도 신기한 부분이 많습니다.
이 작가는 라파엘 전파와 관련이 있는 작가라고 하는데요. 르네상스 이전의 이상적인 예술로 돌아가자는 주의였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주제나 소재도 중세 쪽으로 기우는 등의 역시 복고적인 성향이 있었습니다.
자연을 더 섬세하게 관찰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화풍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화사한 느낌이 드는 편입니다.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해서인지 우아함이나 낭만적이라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게다가 장식적인 면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직관적으로 예쁜 그림이라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은데요.
나중에 아르누보에도 영향을 줄 것 같은 느낌인데 연결점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라파엘 전파의 영향을 받은 작가라서인지 몰라도 이 그림은 화사하고 예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그림입니다.
도록을 사러 갔을 때 이 그림의 포스터가 액자에 있는데요.
이 그림은 좀 사서 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피곤할 때 보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요.
중간에 살짝 들어가 있는 핑크톤은 저도 하늘 표현할 때 종종 사용하는 방식인데요.
150여 년 전에 이런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고, 저 정도로 구현했다는 점이 정말 놀랍죠.
회화가 가진 수많은 접근법 등을 많이 공부해 보는 것이 색보정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나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햇살의 표현도 재미있는데요.
이 부분은 존 컨스터블의 작품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기회가 되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하늘과 바다가 나오는 장면의 레퍼런스로 충분히 머릿속에 넣고 있어도 좋은 그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작품보다 1년 뒤에 인상, 해돋이 작품이 나오는데요.
실제로 모네의 작품도 이 방에서 같이 볼 수 있습니다. 일부러 크게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것을 보니
인상주의 하면, 프랑스, 모네 등을 떠올리지만, 우리도 비슷한 작품들이 있었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외에 다양한 인상주의 작품들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인상주의 하면 쉽게 떠오르는 클로드 모네의 작품도 두 개가 있습니다.
포흐빌레의 센강과 앱트강 가의 포플러입니다.
https://www.tate.org.uk/art/artworks/monet-poplars-on-the-epte-n04183
왼쪽 Claude Monet - The Seine at Port-Villez 1894
오른쪽 Claude Monet - Poplars on the Banks of the Epte 1891
인상주의 미술전에서도 몇 점 보지 못했던 모네의 작품을 여기서 보니까 신기하더라고요.
특히 앱트강 가의 포플러는 23점의 연작 중 하나라는데 이 그림을 느슨한 느낌이 들어서 가장 좋아했다고 합니다.
모네가 순간적인 빛을 잡아내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부분은 으레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죠.
근데 저는 빛을 잡아냈다는 부분보다 의도적으로 원근감을 없애려고 노력한 부분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포흐빌레의 센 강은 안개가 끼어서 실제로 원근감이 도드라지지 않는 공간을 그렸다는 점에서
이렇게 어찌 보면 심심해 보일 수 있는 풍경을 고른 의도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고요.
앱트강가의 포플러는 나무가 줄지어 서있는 깊이감이 있어야 할 공간임에도 원근감을 거의 느낄 수 없게 작업을 했죠.
연작 중에는 어느 정도 원근감이 표현되는 작품도 있습니다.
Claude Monet - Poplars on the Epte 1900
그럼에도 모네의 많은 작품들에서는 의도적으로 이런 원근감을 없앤듯한 그림이 많이 보입니다.
아마 이런 부분들이 모여서 모네의 후반기 작품은 추상으로 흘러간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영상 작업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추상보다는 구상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구상 작업이 된 그림을 보면서 영상에 관해서 많이 생각을 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좀 더 꼼꼼하게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추상이나 개념 미술을 비롯한 현대 미술에서는 영상이 아닌 다른 부분에 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이런 작품을 보는 재미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도 관람 순서에 따라서 초반부에는 구상 작품이 후반에는 추상 작품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사조 중에서 인상주의가 이 중간 언저리에 있는 것 같은데요.
모네는 구상에서 시작해서 추상으로 넘어가기 전까지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작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와 반대로 구상에 더 초점을 맞춘 인상주의 작가들도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작가들인
시슬레와 피사로의 작품도 이곳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존 브렛의 작품만큼이나 포스터가 있다면 사고 싶었던 작품이 알프레드 시슬레의 작은 초원의 봄입니다.
https://www.tate.org.uk/art/artworks/sisley-the-small-meadows-in-spring-n04843
Alfred Sisley - The Small Meadows in Spring 1880
시슬레의 다른 작품도 많이 있지만, 이 작가의 작품은 대체로 청량하고 시원한 느낌이 들어서 좋아합니다.
맑고 파란 하늘이 있는 날 햇살이 밝게 내리쬐는 느낌의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물론 눈이 온 풍경을 좋아해서 이런 풍경을 그린 경우에는 하늘이 우중충 한 경우도 있긴 하지만,
눈이 온 풍경도 굉장히 차분하고 청량한 느낌을 잘 살려서 그렸다는 느낌이 많이 납니다.
작은 초원의 봄과 같은 경우는 나무에 닿는 노란빛이나 하늘의 구름 등이 봄을 굉장히 잘 표현했습니다.
자세히 보면, 거친 붓 자국이 막 보이는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보면 잘 어우러지는 것이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해상도가 낮은 그림을 가까이서 보면 어색하다가 조금 멀리서 보면 한눈에 알아보게 되는 그런 느낌과 비슷합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서 노란색과 흰색을 잘 섞어서 쓰는 것으로 하이라이트를 잘 표현했는데
이런 접근법은 색보정 작업을 하면서 응용해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카미유 피사로의 작품도 볼 수 있습니다. 특색이 없는 작가라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저는 인상주의의 거의 모든 기법을 다 사용할 수 있는 올라운더적인 능력 덕분에 이런 평을 듣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인상주의 초기의 빛을 잡아내는 방식부터 신 인상주의라고 불리는 쇠라의 점묘법까지 다양한 기법을 모두 사용해 보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작가였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던 다른 작가들과 달리 8번의 인상파 전시회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작가로 인상주의를 끝까지 유지한 인상주의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관심이 있어서 찾아보다 보니 인품 역시 훌륭해서 다양한 작가들과 교류도 잘 했던 것으로 나오더라고요. 모난 곳이 없어서 튈 일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 단점이 된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피사로가 죽던 해인 1903년에 그려진 르아브르의 방파제가 있었습니다.
Camille Pissarro - The_Pilots’ Jetty, Le Havre, Morning, Cloudy and Misty Weather 1903
점묘법을 사용했던 작가답게 세밀한 붓질이 잘 보입니다. 이 작가의 그림은 가까이서 자세히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예술의 전당에서 모네에서 세잔까지라는 이름으로 인상주의 전시가 열린 적이 있었는데요.
여기서도 피사로의 그림을 한참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붓 터치가 모여서 구름을 만들고 물결을 만드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the-pilots-jetty-at-le-havre-camille-pissarro/CwGQjVm4zEz-dw
이곳도 3점의 연작을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구글 아츠에서 이 작품을 제외한 두 개를 볼 수 있습니다.
확대해 보면 붓질이 얼마나 섬세한지 볼 수 있죠. 딱 이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작품만 볼 수 없다는 점이 좀 아쉽긴 합니다.
피사로의 작품들 중에 도시 경관을 그린 작품들은 대체로 시선이 위로 가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이는 피사로가 높은 건물의 발코니에서 그림을 그린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히 몽마르트 대로를 그린 연작을 보고 있으면 이 당시에 타임랩스가 있었으면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인상주의 작품들을 몇 가지 더 볼 수 있습니다.
인상주의는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은 사조라고 합니다. 저 역시 좋아하는 사조입니다.
이미지에서 어떤 감정이 느껴질지 고민하는 색보정이라는 작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인상주의 작품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죠.
이분들이 인상주의를 만들어내기 전에 해왔던 작업을 고민해 보면, 작업자의 입장에서와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또 다르게 해석을 하고 진행을 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이래저래 저한테도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들이 있는 사조라서 인상주의 관련 전시는 가능하면 가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번 빛이라는 제목을 가진 전시에서 기대했던 것도 이런 부분이었는데 여기서 인상주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굉장히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신기한 점 한 가지는 이 공간에 현대미술이 같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야요이 쿠사마의 지나가는 겨울이라는 작품이 같이 있었는데요.
https://www.tate.org.uk/art/artworks/kusama-the-passing-winter-t12821
Yayoi Kusama - The Passing Winter 2005
제가 일본식 이름을 잘 모릅니다만, 그동안 쿠사마 야요이라고 주로 들어봤었는데
반대로 써있을 뿐인데도 누군지 모르고 이런 작가가 있는가보다 하고 말았었습니다.
여기서는 반대로 쓰고 있으니까 이대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이 작품의 내부를 들여다보니까 아! 이분 작품이구나 하는 느낌이 좀 들더라고요.
야요이 쿠사마하면 노란 호박에 검은 점을 떠올리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기본적으로 소위 땡땡이 무늬 좀 더 있어 보이는 표현으로는 도트 패턴을 잘 사용한 예술가이죠.
지나가는 겨울은 그냥 봤을 때는 거울에 구멍이 나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거울을 들여다보면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거울 속에 제 얼굴이 비치고요. 그 주변으로는 만화경처럼 무한한 공간이 펼쳐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요이 쿠사마 작품 중에 무한 거울의 밤을 축소해놓은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https://www.tate.org.uk/whats-on/tate-modern/yayoi-kusama-infinity-mirror-rooms
지나가는 겨울을 가까이서 보면 이런 이상한 기분을 느낄 수 있지만,
조금 멀리 떨어져서 구멍 안을 들여다보면,
구멍 바깥에 있는 거울에 반사되는 내 모습과 이상한 공간 속에 있는 제 얼굴을 같이 볼 수 있습니다.
시선의 주체가 나인데 내가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면서 내가 시선의 주체인가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들이 나를 바라보는 건가 하는 이상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요.
이 느낌이 시녀들을 봤을 때 느끼는 기분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합니다.
Diego Velazquez - Las Meninas 1656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마르가리타 왕녀를 그린 것 같아 보이지만,
곧 벨라스케스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도 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요.
그 모습이 멀리 보이는 거울에 비치는데 이 거울에 왕과 왕비의 모습이 보이죠.
그러면 이 그림을 보고 있는 내가 왕이라는 건데 시선이나 깊이감이 묘하게 헷갈리는 느낌이 들죠.
무엇보다 굉장히 깊은 깊이감을 그려낸 것이 사실 평면에 그려져 있다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림의 주체가 누군지 모르겠는 이상한 느낌이 드는데
지나가는 겨울 역시 이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과 주변 모습을 자세히 바라보게 되는 점에서
인상주의 화가들이 집중하던 부분을 저도 모르게 바라보는 기분이었습니다.
빛의 인상이라고 이름 지어진 방에 위치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이 방을 보고 나면 장엄한 빛이라는 방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사실 이번 전시 구조가 좀 독특하게 되어있는데요. 빛의 인상보다 장엄한 빛이 먼저 있긴 합니다.
다만, 관람 순서상 이 방을 건너뛰고 빛의 인상을 보고 돌아오라고 하더라고요.
방의 크기에 따라서 배치할 수 있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렇게 진행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방의 이름을 장엄한 빛이라는 지었는데 참 잘 지은 것 같습니다.
빛의 인상에서 자연의 평온한 빛을 많이 볼 수 있었다면, 이곳에서는 극적이거나 격정적인 빛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작품은 등대가 있는 토스카나 해안의 달빛입니다.
https://www.tate.org.uk/art/artworks/wright-a-moonlight-with-a-lighthouse-coast-of-tuscany-n05882
Joseph Wright of Derby - A Moonlight with a lighthouse, Coast of Tuscany
조셉 라이트에 관해서는 그동안 공기펌프 속의 새에 대한 실험과 태양계를 강의하는 철학자라는 작품만 알고 있었습니다.
왼쪽 Joseph Wright of Derby - An Experiment on a Bird in an Air Pump 1768
오른쪽 Joseph Wright of Derby - A Philosopher Lecturing on the Orrery 1768
블로그 미술사에서 곧 다뤄볼 키아로스쿠로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생각나는 그림이죠.
그러다 보니 계몽주의적인 그림만 그린 줄 알았는데, 낭만주의적인 성향의 그림도 많이 그렸더라고요.
지금 보신 토스카나 해안의 달빛 역시 그런 모습이 잘 보입니다.
주제가 어떻든 간에 이 화가는 광원이 포함된 그림을 그려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서 빛의 인상 방이 좀 밝게 구성이 되어있는 반면, 장엄한 빛의 방은 상대적으로 어두운 편인데요.
이런 상황에서 등대가 있는 토스카나 해안의 달빛을 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물에 비치는 달그림자를 정말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이 재미있는 점은 색보정에서 사용하는 마스킹을 사용한 것 같은 효과를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그림이 먼저였고, 색보정에서 이런 부분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맞겠죠.
원형 마스크와 같은 형태가 보입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밝기의 정도도 고민해 볼 수 있겠죠.
Joseph Wright of Derby - Vesuvius in Eruption, with a View over the Islands in the Bay of Naples c.1776-80
그 뒤에는 조셉 라이트가 그린 폭발하는 베수비오 화산과 나폴리만의 섬이라는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이라고 하니 폼페이 최후의 날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겠지만,
이 그림은 그가 살고 있던 시기에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해서 이를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다만, 그가 이를 직접 보고 그린 것은 아니라고 하네요.
조셉 라이트는 이 화산에 매료된 것인지 3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멀리 화산이 폭발하는 모습이 보이고, 하늘을 뚫을 것 같은 빛이 보입니다.
전경에는 사람들이 머리를 가릴만한 것을 뒤집어쓰고 대피하는 모습도 보이죠.
지상은 거의 지옥과 같은 모습인데 바다는 그저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극적인 상황에서 이런 대조를 집어넣었다는 점이 굉장히 특이한데요.
왼쪽 화산의 붉은빛과 오른쪽 달의 노란빛이 묘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외에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의 대비, 높은 밝기 대비와 낮은 밝기 대비 역시 한 번에 볼 수 있죠.
그동안 붉은색과 노란색의 대비는 잘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대비를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러모로 시선을 잡아끄는 그림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그림에서도 조셉 라이트는 달빛과 화산의 대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왼쪽 Joseph Wright of Derby - Vesuvius from Posillipo
오른쪽 Joseph Wright of Derby - View of Vesuvius from Posilippo
물론 그저 화산의 강렬함을 보여준 그림도 있습니다만,
달과의 대비를 보여주는 그림들은 단순하게 절망적인 상황만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작품을 보고 나면 더 큰 화산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존 마틴이 그린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파괴입니다.
존 마틴은 정말 생소한 화가였는데요. 크게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비평가들에게는 비난을 받은 작가라고 합니다.
이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화려하고 웅장한 장면을 잘 그리는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https://www.tate.org.uk/art/artworks/martin-the-destruction-of-pompeii-and-herculaneum-n00793
벨사살의 연회와 같이 예언을 다루는 장면이나 모세의 재앙, 대홍수와 같이
큰 규모의 종말의 성격을 가진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이 당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엄청나게 거대한 규모와 극적인 모습이었을 겁니다.
왼쪽 John Martin - Belshazzar's Feast 1820
가운데 John - The Seventh Plague of Egypt 1823
오른쪽 John Martin - The Deluge 1834
이런 그림들로 인해서 많은 인기를 누렸고 평론가들에게는 안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니
왠지 모르게 마이클 베이 감독이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 역시 큽니다. 가로 253 세로 161cm니까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고전 회화 중에는 가장 큰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폼페이 최후의 날을 그린 그림인 것 같습니다.
헤르쿨라네움은 폼페이보다 인지도가 작긴 하지만, 더 큰 피해를 입은 도시라고 합니다.
지옥도를 그린다면 이렇게 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 역시 앞서서 본 조셉 라이트의 그림처럼 원경에 있는 재해 현장과 근경에 피난하는 사람들로 나누어 그려놓았습니다.
큰 그림인 만큼, 자세히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먼저 멀리 보이는 도시의 모습이 세밀하게 그려져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솟아나는 화산이 뒤로 보입니다.
이미 붉은 화산재는 여기저기 쏟아져내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와중에 천둥번개도 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배를 타고 이미 바다를 건너왔지만, 이곳까지도 바람과 거친 폭풍에 방패로 막아가면서 대피하고 있습니다.
의외로 폼페이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데요. 대략 도시의 80%의 사람들이 대피했다고 합니다.
영상과 같이 움직임을 보여주는 시각매체가 없었을 당시에 이런 그림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림이었을 것 같습니다.
평론가들이 자극적인 유흥거리라고 조롱했다고 하는데요.
실제로도 어떤 의미를 가지고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그냥 멋진 볼거리라는 느낌이 더 많이 들긴 합니다.
장엄한 빛이라는 이름의 방에 걸맞게 정말 장엄한 느낌을 주는 그림입니다.
홍수와 화산과 같은 자연재해를 통해서 본 빛은
빛과 어둠을 선악구도나 신의 은총 혹은 재앙의 상징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부분은 처음 봤던 빛, 신의 창조물이라는 관점과도 어느 정도 닿아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빛의 신비함은 나중에 뒤에서 제임스 터렐의 레이마르 파랑에서 한 번 더 느껴볼 수 있습니다.
https://www.tate.org.uk/art/artworks/turrell-raemar-blue-t14268
무슨 윈도우 바탕화면 같은 느낌이 드는 방이기도 했는데요. 들어가 보면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느낌이 있습니다.
빛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명상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본 부분이 전시 공간상으로는 1/3 정도 지나온 정도인데 글이 꽤나 길어졌습니다.
이 뒤에 오는 현대 미술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인 올라퍼 앨리아슨의 작품도 볼 수 있었습니다.
앱스트랙트 : 디자인의 미학 다큐멘터리 시리즈에 이분의 이야기를 담은 부분이 있습니다.
시즌 2의 1편인데요. 올라푸르 엘라아손 : 세상을 보는 예술이라는 제목으로 되어있습니다.
https://www.netflix.com/title/80057883
정말 재미있게 봤던 내용이라 이 전시를 다녀와서 다시 봤는데 여기서 본 작품과 비슷한 형태를 다큐에서도 볼 수 있더라고요.
현대미술은 제가 관심을 가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아직은 여러 작품을 돌아보면서 재미를 느껴가고 있는 중입니다.
무엇보다 현대미술은 직접 봐야지 느껴지는 것이 더 큰 것 같아요.
고전 미술은 구글 아트 등을 통해서 봐도 어느 정도 몰입해서 볼 수 있는 반면,
현대미술은 특히나 직접 보면서 느끼는 것들이 큰 것 같습니다.
현대 미술 부분도 시간이 되면 글로 남겨볼까 하는 고민은 하고 있습니다만,
슬슬 바빠지는 시기라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계속 진행을 하고 있는 전시입니다.
매주 수요일을 제외하면 사진을 못 찍게 한다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사진 찍는 사람들이 없어서 방해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전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가보고 싶은 전시였습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다른 전시를 가보고 글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