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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래 Feb 28. 2022

전부 보여주거나 일부만 보여주거나_2


앞서서 피렌체와 북유럽 지역에서 발달했던 그림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들은 소묘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런 묘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서 볼거리가 아주 많은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전부 보여주기라는 관점에서 그려진 그림을 많이 소개했었죠.


https://blog.naver.com/ahisfy/222278847248



이번 글에서는 일부만 보여주는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해보려고 합니다. 일부만 보여주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어둠으로 가리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그리는 방식을 가지고 누가 원조다 이런 이야기를 하긴 어렵지만, 시작 지점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앞서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이상적이고 비례에 맞는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과 달리 레오나르도는 분위기를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아래 두 그림은 모두 성 모자를 그렸습니다. 왼쪽은 미켈란젤로가, 오른쪽은 레오나르도가 그렸는데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미켈란젤로는 세밀한 묘사에, 레오나르도는 분위기의 표현에 더 집중한 것처럼 보입니다.








미켈란젤로 - 도니 톤도 1504 ~ 1506 / 레오나르도 다빈치 - 암굴의 성모 1483 ~ 1493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레오나르도는 분위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불필요한 부분을 어둠 속으로 넣어서 과감히 생략하는 기법을 종종 쓰곤 했습니다. 모나리자나 흰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죠. 레오나르도의 소묘 실력이 부족하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처럼 선이 도드라지는 느낌은 덜 한 것 같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 모나리자 1503 ~ 1516 / 흰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1489 ~ 1491




그림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라는 단어 역시 쉽게 정의하기 어렵긴 합니다.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은 주 피사체의 상태가 될 겁니다. 피사체가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표정에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표정에 따라서 평온한 상태인지, 화나거나 슬프거나 하는 등의 감정이 드러나게 되고 이런 감정이 분위기를 만드는 데 가장 먼저 기여할 겁니다. 그다음으로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 등을 통해서 그 사람의 신분이나 직업, 처한 상황 등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피사체 하나만을 놓고 분위기를 이야기하긴 어렵습니다. 주요 피사체를 제외한 다른 부분, 예를 들면 피사체를 둘러싼 공간을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다른 요소들의 크기, 밝기, 색상 등도 영향을 줄 것이고, 해당 공간의 밝기, 광원이 있다면 광원의 방향, 그림자의 딱딱하고 부드러운 정도 등도 분위기를 만드는 데 중요할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니 영화제에서 상을 주는 의상, 분장, 미술, 조명과 같은 요소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정보가 아닌 분위기를 전달하고자 한다면,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피사체 외에도 다양한 요소를 더 많이 고려하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빛에 관한 부분을 조금 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서 중세 미술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고, 여기서 빛이 정말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https://blog.naver.com/ahisfy/222219755405




신의 은총을 보여주는 빛은 어디에나 가득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세 미술은 어두운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빛이 닿지 않는 곳은 얼마든지 있고, 조명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는 당연히 어두운 부분을 보게 되는 경우가 아주 많았을 겁니다. 광원으로부터 멀면, 빛이 덜 닿고, 이 때문에 어둡다는 점과,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게 되는 점을 옛날이라고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그림자 덕분에 우리는 부피감, 깊이감을 더욱 명확하게 느끼게 되죠. 이렇게 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을 앞서 이야기한 종교적인 이유에서인지 그동안 그림에는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렇게 불필요한 배경 부분을 어둡고 흐리게 표현하는 스푸마토 기법을 통해 깊이감을 잘 표현했고, 이는 레오나르도가 그린 그림이 가지는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기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부분은 수백 년이 지난 최근의 영상에서도 비슷하게 고민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잘 사용한 스푸마토 기법은 피사체의 윤곽선을 흐리게 표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와 같이 비교적 선명 또렷하게 그리는 예술가들의 작품보다 전반적으로 또렷함이 약해 보이는 특징이 있습니다. 대신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이런 느낌을 더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죠. 최근 몇 년간 유행했던 빈티지 렌즈를 써서 얻고자 하는 느낌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된 렌즈인 만큼, 최신의 렌즈보다 선예도가 떨어져서 살짝 이미지가 뭉개지는 것처럼 보이이기도 합니다. 또 코팅이 온전하지 않아서 생기는 난반사 등도 생길 확률이 높습니다. 그 외에 광각 쪽에서 왜곡이 심하거나 렌즈의 블레이드가 독특해서 보케가 특이하게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단점이지만, 이런 부분을 오히려 하나의 미학적인 요소로 채택해서 사용하는 작가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분위기에 집중하고자 하는 관점은 그 뒤의 많은 후배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겁니다. 재미있는 부분은 이런 분위기를 보여주는 방식이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로 넘어가서 더욱 꽃을 피운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물론 무작정 피렌체에서 넘어가서 발전한 것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베네치아에는 이미 묘사보다는 분위기를 중시할 수 있는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어떤 계기가 더해지면서 더욱 발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하나의 문화나 기술이 다른 곳으로 전해지면서 그 지역에 맞게 발전해가는 과정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부분인 것 같습니다. 참고로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의 활동이 더 많았는데요. 피렌체 출신이기는 했고, 밀라노라는 곳이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삼각지점 정도에 위치한다는 점에서도 그 사이의 교두보 역할을 한 것처럼 보는 것도 재미있는 시선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교라는 관점에서는 피렌체와 베네치아가 조금 더 명확하게 대비되는 점이 있는 만큼 이 부분을 들어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여기서 피렌체와 베네치아 두 지역의 차이는 크게 지리적인 요인과 정치적, 사회적인 요인으로 나누어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피렌체는 지도상에서 이탈리아의 북서부 지역에 위치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로마와 가까운 편이죠. 르네상스가 다시 되살리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되살리고자 하는 대상이 그리스, 로마의 고전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로마와 가까이 있다는 점은 많은 정보를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교황과 교황청이 있는 곳이죠. 교황청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소위 거룩하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예술 작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고, 이는 그리스 로마 미술에서 보이는 이상적인 아름다움과도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는 이런 요구에 걸맞은 조각과 그림을 완벽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구현해냈고요.



게다가 피렌체를 주름잡던 가문이 메디치 가문이라는 것도 이런 회화의 흐름에 기여했을 것 같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은행업으로 부를 축적한 가문입니다. 피렌체 안에서냐 부러울 것이 없었겠지만, 귀족 가문이 아니라는 점이 하나의 아쉬움이었겠죠. 조선 시대에도 부를 쌓은 중인들이 양반 족보를 산 것처럼, 메디치 가문도 신분세탁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교황도 세명이나 배출했고요. 이런 성향을 가진 가문에서 엄숙하고 거룩한 예술 작품을 선호했겠구나 하는 점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결과물은 앞서 이야기한 글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었죠. 아래 그림에서 동방박사의 행렬로 가장한 메디치가의 행렬을 볼 수 있습니다.

베노초 고촐리 - 동방박사의 행렬 1459





반면 베네치아는 이와는 꽤나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리적으로 이탈리아의 동북쪽에 있으며 항구도시이기도 하죠. 이 때문에 무역을 통해 발전한 도시입니다. 무역이 발달한 도시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가는 만큼, 조금 더 자유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동로마 제국과의 교역이 활발했습니다. 동로마 제국, 그중에서 수도인 비잔티움은 동서 교역의 중심지로서 엄청난 부가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이전에 클림트 글에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황금으로 치장한 화려함이 돋보이는 성당 등이 많이 있었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미술을 보면 모자이크와 이콘 등에서 아낌없이 황금을 사용하는 것도 볼 수 있죠. 다만, 이런 화려함과 달리 정교한 묘사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베네치아는 이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화려한 양식에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이런 배경을 가진 상태에서 피렌체의 그림을 봤다면, 그 정교한 해부학적 지식, 원근법 등에 영향을 받으면서 한 편으로는 너무 딱딱하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한 편으로 약간의 여유가 있어 보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 더 와닿았을 수도 있죠. 이런 흐름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긴 어렵지만, 베네치아에서는 조각 같은 소묘보다는 분위기나 채색에 더 집중하는 그림을 그리는 경향이 보입니다.



그렇다고 피렌체에는 이런 분위기가 없었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레오나르도 이전에 마사초와 같이 명암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있었고, 그 뒤에 있던 보티첼리와 같은 화가 역시 명암을 잘 보여주는 작품을 그리기도 했으니까요. 다빈치 뒤에도 코레조와 같이 명암을 더 극명하게 구분하려는 작업을 한 화가도 있습니다. 그리고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로 흐름이 옮겨가게 된 데에는 앞서 이야기한 메디치 가문이 몰락하게 된 것과 같이 정치적인 이유도 있으니까요.

마사초 - 삼위일체 1427 / 보티첼리 - 팔라스와 켄타우로스 1482





여러 가지 작품들을 찾아보면서 알게 된 코레조라는 화가의 그림들이 저에게는 인상적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레오나르도가 잘 사용한 대기 원근법과 명암법을 이어받고, 발전시켜보려고 노력한 화가라고 생각합니다.


레오나르도가 명명하고 잘 사용한 스푸마토 기법은 멀 수록 흐려지는 대기 원근법과 이에 더해 멀어질수록 어둡게 표현하는 명암법 두 가지가 적절하게 섞여있는 개념입니다. 이런 부분이 극적으로 잘 드러난 작품이 아래에 보이는 세례 요한(좌)과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우)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 세례 요한 1507 ~ 1516 /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 1501 ~ 1519




코레조는 레오나르도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아래 두 그림은 코레조가 그린 성모와 예수, 성 요한 그림입니다. 뒤에 보이는 배경이 꽤나 어둡게 묘사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토니오 다 코레조 - 성 요한과 있는 성모자 연도 미상 / 성 요한과 있는 성모자 1176




madonna and child with saint john 라는 이름으로 구글에서 이미지 검색을 했을 때 밝은 배경의 그림이 많이 나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위와 같은 형태는 일반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왼쪽의 레오나르도가 그린 성 모자 그림과 오른쪽에 라파엘로가 그린 성 모자 그림의 분위기만 봐도 꽤나 차이가 나는 편입니다. 코레조가 그린 성모자 상은 아무래도 다빈치의 그림을 더 많이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 암굴의 성모 1483 ~ 1493 / 라파엘로 산치오 - 초원의 성모 1506




코레조는 레오나르도가 잘 사용한 스푸마토 역시 잘 사용했습니다. 아기 예수에게 경배와 같은 그림을 보면 이런 부분이 잘 표현된 것을 볼 수 있죠. 개인적으로 코레조의 그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그림입니다. 어둠 속에 잠기는 배경이나 부드러운 윤곽선을 보여주는 방식이 레오나르도의 그림을 보고 많은 연구를 해서 그린 그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토니오 다 코레조 - 아기 예수에게 경배 1526





코레조는 거기에 명암법을 따로 분리해서 조금 더 발전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명암법, 카아로스쿠로라는 표현으로도 많이 불리는 방식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밝음과 어두움의 대비를 극명하게 만들고, 불필요한 부분을 어둠 속에 잠기게 만들어서 보여주고자 하는 부분을 더욱 강조할 수 있는 방식이죠. 다양한 명암법이 있고, 나중에 이야기해 볼 카라바조의 명암법은 굉장히 다듬어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중에서 코레조가 그린 그림에서는 불필요한 부분을 어둠에 잠기게 하기보다는 밤에 조명을 켜고 그린 그림과 같은 느낌을 주는 그림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그림이 아래 보이는 거룩한 밤이 아닐까 싶습니다.

코레조 - 거룩한 밤 1523




그 외에도 아래 그림과 같은 작품들도 비슷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두운 상황에서 화면에 광원이 있고, 이로 인해서 그림자가 지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들입니다.

코레조 - 유디트와 그 식모 1510 / 코레조 - 동산의 고뇌 1523




명암 대비를 뚜렷하게 볼 수 있는 상황은 보통 밤이죠. 낮에는 그림자가 생기더라도,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밝기가 있기 때문에 극적인 대비를 보여주기가 어렵습니다. 사람 눈이 어두운 부분의 변화에 더 민감합니다. 이 때문에 어두운 가운데 밝은 부분이 있는 것이 밝은 가운데 어두운 부분이 있는 것보다 강렬하게 다가오죠. 특히나 이 그림들이 그려지던 시기에는 현대적인 조명이 없었던 만큼, 밤에는 촛불을 비롯해서 아주 어두운 등을 사용해야 했고, 이런 명암의 극적인 모습을 보는 경우가 있었을 겁니다. 이런 면에서 어두운 상황에서 조명을 이용한 명암법은 가장 먼저 떠올려볼 수 있는 방식이기도 했을 겁니다.



잠시 영상 이야기를 해보자면, 재미있는 것은 영상에서도 이렇게 광원을 하나의 소도구처럼 사용해서 대비를 만드는 작품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광원은 코레조가 사용한 것처럼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용하는 듯한 부분들을 찾아볼 수 있죠.

영화 설국열차의 횃불 장면




그런데 의외로 이런 조명을 그린 그림이 앞서 이야기한 시대에는 그리 많이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일단, 밤에 조명을 켜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비싼 일이었습니다. 불을 밝힐 수 있는 연료가 제한적이었고, 

밀랍과 같이 냄새가 나지 않는 조명은 무척이나 비쌌죠. 그래서 평민들은 밤에 등을 밝히기가 어려웠습니다. 예술가들 역시 처음부터 돈이 많은 것은 아니었던 만큼, 밤에 조명을 켜서 이를 보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부분은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야간 신을 촬영하는 것이 주간 신을 촬영하는 것보다 여러모로 비용이 많이 필요합니다. 할리우드에서 사용하는 야간 촬영은 엄청난 조명이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을 보면 의외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큰 틀에서는 바뀌지 않은 것들도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개인적으로 색보정할 때도 밤 촬영본이 낮 촬영 본보다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노이즈와 같은 문제도 있지만, 밤을 정말 밤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손이 많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앞서 잠시 이야기해 봤던 종교적인 이유를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중세 시대에는 밤을 그리는 경우가 별로 없었습니다. 빛을 신의 은총으로 표현하던 시대이니 밤은 대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죠. 중세 시대의 그림을 보면 밤을 그린 그림이 별로 없습니다. 굳이 오해를 살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죠.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인본주의적인 가치들이 많이 중요해졌지만, 그렇다고 종교가 힘이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종교는 힘이 강했죠. 그래서인지 밤을 그린 그림 세 점 모두 성경의 내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두 개는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표현하고 있죠. 이건 악을 그린 것이 아니라 성스러움을 더 강조하고자 그린 그림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여담으로 이런 그림들을 보면서 여성의 누드를 그리고 싶었으나 일반 여성의 누드를 그렸다가는 천박하다는 욕을 먹을 테니 여신을 그렸다고 이야기하면서 누드를 그리던 화가의 전략이 떠올랐습니다. 어두운 밤에 조명으로 인한 대비를 그리고 싶지만, 함부로 그렸다간 악함을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욕을 먹을 수 있으니 성경을 소재로 그려서 이런 부분을 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코레조는 성경이 아닌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그림도 많이 그렸습니다만, 이런 그림은 낮을 배경으로 그린 것이 아주 많고, 명암을 표현하더라도 밤이라는 느낌이 드는 그림은 별로 없습니다.

안토니오 다 코레조 - 가니메데스의 유괴 1532 / 주피터와 이오 1531 / 레다와 백조 1532




조명을 화면에 보여주는 명암법은 떠올리기가 쉽고, 강한 주목성을 가진다는 특징이 있지만, 어느 정도 단조로운 면이 있습니다. 조명이 있는 곳이 중요한 부분일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서 표현할 수 있는 부분들이 제한이 생길 수 있죠. 그러다 보니 조명을 이용한 명암법을 사용하더라도 해당 광원이 화면에 보이지 않도록 해서 더욱 풍부한 표현을 해볼 수 있습니다. 코레조의 그림에서도 이런 시도를 한 듯한 그림이 보입니다. 성 제롬이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비탄과 같은 그림에서 이런 부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전의 그림보다 빛의 방향성이 더욱 잘 보입니다. 명암 대비로 인해서 부피감이 더욱 잘 보이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사진이라는 개념이 없었겠지만, 전반적으로 밝은 이미지와 달리 표정이나 행동이 과장되어 보이기 때문에 어느 한순간을 극적으로 담아낸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안토니오 다 코레조 - 성 제롬 1515 ~ 1518 / 십자가에서 내리심 1525



앞서서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로 흐름이 넘어갔다고 하면서 코레조의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신기하게 코레조는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중간 지역에 살기도 했습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중간에 있었다는 점도 참 재미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는 레오나르도도 마찬가지였고요.



베네치아의 화가 중에 이런 흐름에서 극적인 느낌을 더욱 강하게 표현한 화가는 틴토레토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베네치아 출신의 대표 화가를 꼽으라면 티치아노를 이야기해 볼 수 있습니다. 티치아노는 색채를 표현하는 데에 정말 능했고, 분위기를 표현해 내는 능력도 탁월했습니다. 퀼트 소매를 한 남자와 같은 그림을 보고 있으면, 미켈란젤로가 티치아노의 그림을 보고 데생을 소홀히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죠. 특히나 성모 승천과 같은 그림은 색채, 구성이 정말 시선을 잡아 끄는 명작이 아닌가 싶습니다.

티치아노 - 퀼트 소매를 한 남자 1509 / 성모 승천 1516 ~ 1518




그럼에도 티치아노가 아닌 틴토레토를 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그린 그림이 빛과 어둠의 명암을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린 그림은 다른 화가의 그림보다 강렬한 대비를 잘 보여줍니다. 게다가 티치아노에게서 미술을 배운 만큼, 강렬한 구도 역시 잘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노예의 기적은 성 마르코에 대한 신심이 깊었던 노예가 허락도 없이 순례를 하고 와서 눈을 뽑고 다리를 자르는 형벌을 집행하려는데 기적이 일어나서 어떤 상해도 입힐 수 없었고, 결국 주인도 참회했다는 이야기를 다룬 그림입니다. 격정적인 장면과 기적을 행하기 위해 나타나는 성 마르코까지 박진감 넘치는 장면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의 대비가 강하게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틴토레토 - 노예의 기적 1548





거기에 더해서 어두움 속에서 깊이감을 표현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화가이기도 합니다. 최후의 만찬이나 성 마르코의 시신 발견과 같은 그림은 어둠과 대각선 구도를 통한 깊이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틴토레토 - 최후의 만찬 1594 / 성 마르코의 시신 발견 1564




그동안 깊이감을 표현하기 위한 구도를 많이 사용해왔지만, 소실점을 중앙이 아닌 다른 곳에 두면서 중앙에 둔 것에 비해서 역동성을 더 살리는 노력을 한 것 같습니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소재로 가장 유명한 그림은 레오나르도의 그림일 텐데요. 물론 레오나르도의 그림이 인물을 모은 구성 면이나 후광을 자연스럽게 창으로 표현하는 모습 등에서 세련된 느낌이 더 들긴 합니다만, 틴토레토의 그림이 더 역동적으로 보이긴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 최후의 만찬 1492 ~ 1498





틴토레토는 매너리즘이나 바로크 그림에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데요. 이런 역동적인 그림을 그리는 방식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화가가 등장합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는 카라바조입니다.



앞서 최후의 만찬을 이야기했는데요. 아래 그림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 처음 식사라고 할 수 있는 엠마오의 만찬입니다. 왼쪽은 틴토레토가 그린 그림이고 오른쪽은 카라바조가 그린 그림이죠.

틴토레토 - 엠마오에서의 만찬 1542 / 카라바조 - 엠마오에서의 만찬 1601




둘 다 예수님이 살아돌아오신 것에 대한 놀라움을 담고 있지만, 카라바조의 그림에서는 인물들의 표정 등을 더욱 잘 읽을 수 있습니다. 소위 명암법 이야기를 하자면, 카라바조를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카라바조부터 이어지는 명암법의 흐름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만큼, 다음 글에서 이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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