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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N Feb 03. 2019

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빛나는 것

1993년 3월 2일

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빛나는 것

1993년 3월 2일



지금 우리 가족은 궁지에 몰린 쥐라도 되는듯한 모습이란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이번 주말, 주문진에서 근무 중인 네 아빠는 수중에 가진 돈이 자동차 주유비만큼도 되질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차를 두고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오셨단다.

털레털레 무거운 걸음을 해서는 통닭 한 마리를 사들고 들어오더라고.

내가 매 끼니를 묵은지로 만든 참치김치찌개나 라면으로 때우고 있었거든.

아빠 주머니 속엔 동전까지 탈탈 털어서 만원 정도가 남았대.

내 주머니 속엔 오천 원이 남아있는데.

이럴 줄 알고 며칠 전에 연희 분유 네 통부터 쟁여두었단다.

정말 큰일이다. 집안을 비닐봉지처럼 거꾸로 뒤집어 탈탈 털어도 몇백 원 짤그랑 떨어질 거야.

기다려봐도 아빠의 월급이 감감무소식이구나. 회사 사정이 영 좋지 않은가 봐.

그리 크지 않은 건설 하청업체거든.

엄마가 집에서 짬날 때마다 꼼지락거리며 부업을 해서 벌어놓은 돈도 아직 한 푼 나오질 않았고.

이래저래 한숨만 늘어가는 요즘이야.


결혼한 이후로 모든 일이 다 돈 새는 구멍이었어.

신혼살림이니 그래도 번듯하게 장만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구입한 가구며 전자제품들이 그 시작이었지.

내가 너를 임신한 뒤 직장을 그만두고 사진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가계 적자를 면치 못했고.

그것을 어떻게 메꿔보기도 전에 아빠가 회사에서 받은 고물 중고차 수리비 때문에

엄마가 직장에 다니면서 모아놨던 돈을 몽땅 쏟아부어 넣었지 않았겠니.

산 넘어 산이라고, 그 차로 사고가 나는 바람에 합의하고 보상금을 지불하느라 계돈까지 미리 빼서 써야 했어.

한숨을 좀 돌릴 수 있나 싶었는데, 네가 세상에 태어났단다.

아니 네 탓을 하고 있는 건 아니야.


이곳저곳에 손을 벌려서 여기까지는 왔는데 더 이상 손을 뻗는 게 지겹구나.

흉 될 것 없이 정정당당하게, 남부러울 것 없이 이날 이때까지 살아왔는데

어렵다는 소리를 남에게 하는 게 솔직히 자존심이 상해.

솟아날 구멍은 어디에 있을까.




또 다른 고비가 성큼 다가오는구나. 좀 있으면 네가 태어난 지 100일이 되는 날이거든.

마음 놓고 기뻐해야 할 일인데, 그렇지 못해서 미안해.


사실 100일 잔치에 대해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단다. 허례허식이라고 생각해.

번지르르한 장소를 빌려서 소문을 내는 게 그리 썩 내키지 않아.

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한상 떡 벌어지게 음식을 차리고 사회자를 섭외해야 하지.

더 싫은 건 준비과정보다 행사 당일날의 요란함이야.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정신 사나운 마이크, 거나하게 술에 취한 분위기, 객들의 발에 묻어온 매캐한 먼지.

100일 잔치는 수고한 산모와 갓 태어난 아기의 건강을 위해 마련한 자리가 아닐까?

위로하고 격려해야 할 자리에 이런 야단법석이 다 무어란 말이야.


자본주의 사회는 돈을 기반으로 굴러간단다. 뭐든지 돈이지.

축하의 의미로 선물을 받아도 마냥 기쁜 마음이 될 수 없어.

다음 잔치가 있을 때 암묵적으로 돌려줘야 하는 룰이 있거든.

잔치가 끝나면 꼭 돈과 선물이 얼마나 들어왔냐고 대화가 오간단다. 모두 숫자놀음이야.

성대하게 잔치를 벌여 객을 많이 유치할수록 남는 장사지. 

진정한 의미의 축하라고 할 수 있을까?


휴, 너에게 무슨 죄가 있겠니. 아직 음식을 씹어 삼키지도 못하고 우유병만 빠는 아가인데.

가족끼리 상을 차리고 기념사진 찍는 정도로 조촐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네가 맏이인 데다가 네 아빠도 장남이라서 집안 어른들 보는 눈이 따가워 결국 100일 잔치를 하기로 했단다.




요즘, 대한민국은 맞벌이가 유행이야.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지.

가족원이 문화생활을 풍족히 누리면서 저축까지 가능할 수 있도록 말이야.

엄마도 너를 출산한 뒤 많은 고민을 했단다. 하지만 결국 난 네가 더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렸어.

인격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에 몇 푼 때문에 너에게 정서적 결핍을 안겨줄 순 없다.

적어도 네가 사랑이 무엇인지,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 나이가 될 때까지는 내가 곁에 있어줘야만 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을지언정 타인의 손끝에서 자라난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단다.

삶 속엔 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빛나는 것이 가득 존재하니까.





LEN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

인스타그램: lotus_hee_illust

메일: choyeonhee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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