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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희정 Oct 02. 2018

나는 지금 더블린시

비자를 주세요

엔젤라가 내 앞으로 온 우편을 건넨 것은 은행에 다녀온 이 후 일주일이 더 지나서였다. 계좌가 만들어졌으니 이제 3000유로를 입금하고 잔액증명서를 뽑으면 되었다. 해외송금을 하는 데에만 적어도 사흘이 소요되는 까닭에 결국 그 단순한 ‘잔액증명서 뽑기’에만 자그마치 2주가 걸렸다.

스쿨 레터, 은행 서류, 영문 보험증서 등 필요한 서류들이 모두 구비되었고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이민국에 가 비자를 받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소문을 들어보니 비자를 받는 일도 그리 쉬워 보이진 않았다. 누구는 아침에 갔다가 번호표도 못 받았다더라, 또 누구는 전 날 밤부터 가서 밤새 기다렸다더라. 그중, 후자의 누구는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엔젤라에게 오늘은 외박을 하겠노라 얘길 하고선 커다랗고 빨간 담요 하날 챙겨 나왔다. 늦은 시간,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와 이민국으로 향했다. 구글 맵스를 따라 도착한 그곳에는 두 눈으로 믿기 힘든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접이식 의자, 침낭, 텐트 등과 함께 사람들은 길거리 바닥에 앉아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커진 눈과 벌어진 입으로 놀라움을 말하고 있는 내 표정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와, 이민국은 처음이지? 하는 표정의 그들을 지나 줄의 끝으로 보이는 곳에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깊은 밤이 가져온 추위는 생각보다 대단했고 나름 커다란 담요를 주섬주섬 챙기며 새벽의 추위에 버틸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던 건 나의 큰 오산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나씩 굳기 시작한 탓에 체온 유지를 위해 손가락을 쥐었다 펴는 동작을 시도해보았으나 손가락 가죽이 찢어질 듯 한 고통만이 따라왔을 뿐이었으며 게다가 윗니 아랫니는 빠른 속도로 서로 부딪치며 딱딱거리는 소리를 냈다.

 

동이 트고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지나가더니 어느새 길거리는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러고도 이민국이 어서 우리들에게 따뜻한 실내와 푹신한 소파, 아니 심지어 딱딱하고 삐걱대는 의자여도 좋으니 엉덩일 붙일만한 실내의 공간을 내어주길 바라며 회빛의 하늘 밑에서 내 마음도 모른채 신나게 불어대는 찬 바람과 함께 한참을 기다렸다. 어느새 나를 포함한 그 긴 줄은 건물을 두 바퀴 째 빙 둘러, 나의 옆엔 나보다 한 바퀴나 뒤의 순서인 사람들이 나와 다른 온도의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긴 줄을 보는 건 롯데월드에서 아틀란티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줄 이후론 처음이었다.

내가 받은 종이에 쓰인 번호는 75, 이 정도면 등교를 해서 수업을 듣고 점심때 돌아와도 괜찮은 번호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학교에 가는 건 만약 내 차례를 놓친다면 밤새 기다린 보람을 그르칠 수 있는 도박에 가까운 일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위험한 모험을 좋아한다. 


학교에 가 친구들 얼굴을 보니 괜히 더 반가웠고 어릴 적 시장에서 잃어버렸던 엄마를 찾았을 때처럼 서러운 감정도 밀려들었다. 두 팔을 벌려 그들을 안으며 오늘 새벽 내가 겪은 추위에 대해 설명했다. 그들은 너도나도 이해한다며 Poor Lucy라는 말로 나를 위로했다. 수업 내내 머릿속은 이민국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종이 땡 치자마자 나는 첫 번째로 달려 나와 이민국으로 향했다. 빠르지만 무거운 걸음이었다.


그토록 오래 기다리며 힘들인 나였기에 괜히 그들이 우리 집단을 딱하게 여겨 아주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해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두꺼운 유리벽으로 막혀있는 각 창구의 직원들은 영화 마틸다에 나오는 유치원 원장 선생님 같은 인상을 내비쳤을 뿐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단호한 말투를 사용했고 다시 묻거나 쓸 데 없는 질문이라 판단되는 것들에는 소리를 지르거나 무시를 해 버렸다. 잘못한 것도 없었지만 어깨는 자꾸만 움츠라들었다.


마침내 나는 받아냈다, 연푸른색의 영롱한 비자카드를.

그렇게 추위 속에서 하루를 꼬박 버텨낸 나의 하루도 저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푹신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침대 깊숙이 파묻혀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뗘졌다. 이제 정말로 아일랜드라는 나라에서 나의 머무름을 허락해 주었다. 나의 아일랜드 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눈을 감았다. 행복한 꿈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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