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라희정 Aug 22. 2018

나는 지금 더블린시

낯선 땅에서 살아가기

그토록 기다리던 주말이 왔다.

아직 시차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던 나였기에 더블린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맞은 토요일은 마치 가뭄에 단비처럼 반가웠던 참이었다. 모처럼만에 알람 소리 없이 일어난 아침, 창문을 완벽히 가려놓은 암막 블라인드를 올려보니 눈부신 햇살이 정오가 넘은 시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기지개를 켠 후, 1층의 부엌으로 내려가 토스트기에 식빵을 넣었다. 여느 때처럼 정원을 가꾸고 있던 엔젤라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니 웃으며 잘 잤느냐고 물었다. 지금까지 자다니 대단하구나 하는 말과 함께. '오늘은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여유로움을 만끽해야지, 그리고 요 앞 편의점에 가서 초콜릿과 젤리들을 사 와야지' 생각하던 찰나 엔젤라가 언제나처럼 얼굴에 미소를 띠고는 물었다.

"오늘은 뭘 할 거니?"

"글쎄요, 딱히 계획은 없어요, 오늘은 집에서 좀 쉬고 싶은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젤라의 표정이 바뀌었다.

"친구들 좀 만나지 않고? 더블린 시내에 나가면 구경할 게 얼마나 많다고. 피닉스 공원엘 가 봐, 기네스 박물관에도 가 보고."

"...."

"오늘은 대청소를 해야 해. 주말마다 대청소가 필요하니 네가 밖에서 시간을 보내줬으면 해"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단호하고 딱딱한 어조, 그녀의 본심 같아 보였다.

"음, 그럼 조금만 쉬다 3~4시쯤 나가도록 할게요."

"아니. 지금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아. 당장 네 방 청소를 해야 하거든"

너무도 매정하게 느껴졌다. 이 집이 나의 포근한 안식처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게 단순한 나의 바람이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집을 나와 근처의 공원으로 향했다. 언덕들이 굽이진 공원에는 수많은 동네 개들이 주인과 함께 산책 중이었고, 벤치에 앉아 그들을 구경했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태어나 처음 보는 대형견들이 많았다. 평소 지나가는 강아지를 볼 때마다 걸음이 느려지는 나였기에 공원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어느새 내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엔젤라가 챙겨준 점심이 담긴 비닐봉지를 꺼냈다. 그 속엔 삼각형으로 예쁘게 잘린 샌드위치, 초콜릿 바, 풋사과, 사과주스가 담겨있었다. 사과를 꺼내 옷으로 쓱 닦은 후 한 입 베어 먹었다. 서걱하는 소리가 새들의 지저귐과 어우러졌다. 지나가던 꼬마가 내 옆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이 동네에선 보기 드문 외국인이라 내가 신기했던 모양인지 그는 내게 물음표 공격을 해왔다. 몇 마디 나누기 시작한 찰나 아이의 부모가 저 멀리서 부르며 얼른 오라며 손짓했고 꼬마는 그쪽으로 달려가며 뒤돌아 힘차게 손인사를 건넸다. 동네 친구가 생길뻔한 순간이 아쉽게 지나갔다.

해가 뉘엿거릴 때 즈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굳이 동네를 돌아서 집으로 들어갔다.   


   


Til getting visa.

나는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나라에 살기 위해선 비자가 필요했다. 우선 크게 필요한 서류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가 아일랜드 현지 학교에 다니기 위해 등록했다는 입학증명서였고, 또 하나는 현지 은행계좌에 1년 치 머무르기에 충분한 만큼의 돈이 들어있다는 잔액증명서였다. 그 둘만 이민국에 가서 증명하면 되는 일이 그다지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이 곳이 우리나라라고 가정한다면.

수업이 끝나고 학교에서 지정해준 해당 은행에 찾아갔다. 줄을 서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었고 나는 계좌를 만들러 왔다고 말하였다. 은행 직원은 빼곡히 적힌 노트의 타임테이블을 보여주며 가능하다고 가리킨 날짜는 그 날로부터 대략 2주 후의 목요일이었다. 비자법이 새로이 바뀐다며 이번 달 안에 그것을 받지 못하면 1년짜리가 아니라 8개월짜리 비자를 받게 될 거라는 이민국의 통보가 있었던 터라 나는 마음이 급했다. 큰 맘먹고 온 이 땅에서 8개월 만에 돌아가긴 싫었다. 내 어두워진 표정을 읽었던 걸까 은행원이 덧붙였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해요”

무더운 사막의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말하길, 집에서 약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던드럼 쇼핑센터에 있는 지점에 가면 예약제가 아닌 선착순이기 때문에, 그곳에 아침 일찍 가서 줄을 선다면 빠르게 업무를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은행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은행을 빠져나왔다. 다음 날, 학교는 가지 않았다. 학교를 가는 것보다 은행 열기 30분 전에 미리 가 줄 서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집을 나서 버스를 기다렸다. 정류장까지 서둘러 걸었다. 평소 타던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가 던드럼행 버스를 또 한 번 기다렸다. 배차간격이 큰 탓에 한 번 놓치면 답도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 탄 버스는 던드럼 근처의 정류장에 나를 내려주었다. 상쾌한 맑은 아침 공기와 대비되게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분주했다. 던드럼은 생각보다 훨씬 컸기에 우선 은행을 찾는 일부터가 문제였다. 바삐 걷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물어물어 도착한 그곳에는 이미 인산인해였다. 더 놀라운 것은 옆에 지나가던 여자 둘이서 나누는 대화였다.

"벌써 마감이라니, 말도 안 돼."

"내일은 더 일찍 오자."

멀쩡한 내 귀를 의심했다. 은행 직원에게 가서 재차 확인하니 역시나 그는 내일 다시 오라는 말 뿐이었다. 쉬운 일이 없었다. 다음 날, 힘든 여정을 반복했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도착했으며 헤매는 일도 없었기에 내가 첫 번째로 왔을 거라 생각했던 건 내 오산이었다. 그곳에는 벌써 나와 같은 이유로 온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바닥에 앉아 줄을 이뤄있었다. 제일 뒤로 가서 나도 그곳에 앉았다. 극도의 긴장감과 함께 기다리던 9시가 되었고 어제 보았던 남자 직원 한 명이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노트에 이름을 적었다. 내 앞에서 끊기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 짧은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그가 내 앞에 섰고 나에게 말했다.

"What's your name?" 

드디어 첫 번째 단추가 무사히 채워졌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지금 더블린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