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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이 Mar 27. 2018

집에서 입는 옷  1

느지막이 일어나 사과를 먹고 밥을 먹었다. 누워 있다가 김장재료를 사온 엄마의 눈치를 보며 침대에 앉아 책을 읽는 척했다. 엄마가 나가고 나서 바로 엎어져 잠을 잤다. 엄마 일을 도와주러 가야했지만 그럴 의욕이 없었다. 정신이 차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저녁이 다 되어 일어나 시리얼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진순이 밥을 주고 비빔면을 만들어 먹고 미드를 한 편 시청했다. 드라마가 끝나고 진순이 저녁 산책을 다녀왔다. 오랜만에 평화로운 산책이었다. 집에 와서 진순이 발을 닦아 주고 간식을 줬다. 작은 간식통에 소분해서 간식을 채워두고 <뜨거운 사이다>를 봤다.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먼지만도 못하게 산 것 같아서 괜히 책상 앞에 앉아서 일기를 쓴다. 


나는 사실상 살아갈 동력을 잃은 것 같다. 나는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아마 뭔가를 하게 되어도 발전 없이 주어진 일만 하면서 지겹다고 나가떨어질 유형이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네. 솔직히 어떻게 벗어나야할지 잘 모르겠다. 아니다. 되게 쉬운데 내가 안 하고 있는 거겠지. 남들 눈엔 명확히 보이는 문제겠지. 나에게도 쉬웠으면 좋겠는데.



뭔가 사고 싶은 게 있고 새로운 지향을 업데이트한다는 게 삶의 욕망과 여유와 관련이 있다는 걸 요즘에서야 깨닫고 있다. 점점 선택의 범위가 줄어들고 사고 싶은 게 생겨도 참는 일이 잦아지면서 점점 짜증보다는 그런 상황에 익숙해지고, 필요해서 구입했더라도 다음 달에 갚아야 할 카드 값부터 생각하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과소비랄 게 없는데 결국 내가 번 돈보다 많이 청구되고, 남는 게 없이 마이너스만 쌓인다.


이렇게 계속 살게 되겠지.    



무기력한 삶이다. 무기력이란 침대에서 일어나기 힘든 것이다. 씻어야 하지만 씻을 수 없는 것이고 밥을 먹어야 하지만 먹기가 귀찮고 심지어 입맛도 없어지는 것이다. 때로는 움직이고 싶어도 몸이 잘 안 움직이고 때로는 어딘가 아픈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날은 무기력에게 잡아 먹혀 트위터도 못하는 날이 있다. 나는 몸도 일으키기 힘들지만 타인에게는 게으름이고 꾀병으로 보이는 상황이 벌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왜 이런 당연한 일을 못하지? 


정말 심할 땐 취소할 수 있는 약속은 취소하고, 아쉬워도 수업을 빠지고, 대체인력이 있다면 알바도 쉬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어쨌든 납득 가능한 이유가 필요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들이밀 수 있는 핑계거리는 금방 동이 났다. 단순히 나의 피해의식일수도 있지만 의심이 늘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치를 봐야 했으니까. 나의 거짓말이 들키지 않도록, 거짓말보다 나의 병에 대해 알게 될까봐 끊임없이 괜찮은 척을 해야 했기 때문에 점점 예민해지고 상대방을 살폈다. 침대에 누워있느라 외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달라고 하겠는가. 누군가 내게 몸이 아파서 쉬겠다고 하면 그 말이 거짓일지라도 잘 쉬었으면 바랐을 텐데 왜 타인은 내게 그런 호의를 베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점점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는 너무 자주 아픈 사람, 성실하지 못한 사람, 항상 지쳐있는 사람이 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상대방의 표정에서 ‘또?’라는 표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어서 ‘진짜야?’라는 의구심까지.     


매일 일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힘들어? 

활동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아파? 

그렇게 맨날 집에만 있으니까 더 가라앉는 거야 좀 움직여.     


처음에는 저런 말을 들어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도 한심했기 때문이고 나에게 문제가 있으니 나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런데 어느 순간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내가 아프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벌써부터 아프면 어쩌나’, ‘아파도 어쩌겠어’ 같은 말을 했다. 처음에는 내가 할 일을 누군가가 대신 해야 하니 그 점이 미안했다. 그런데 사실 내가 하는 일 중에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은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하루 미뤄진다고 큰 일 날 일은 전혀 없었고 대부분 집에서도 처리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내가 하는 일이 되게 중요했구나 느낀 적이 없었는데, 젊은이의 건강을 걱정하는 말 앞에서, 아파도 어쩔거냐는 무관심의 말에서 내가 모르던 책임과 일의 중요성을 마주하게 됐다. 그리고 사실은 그냥 내가 아프지 않을 때처럼 그냥 아무 신경 쓸 것 없이 굴러갔으면 하는 개인들의 이기심과 걱정하는 척 한심하다 여기는 말이란 걸 알았다. 걱정의 말도 때로는 화살이 된다. 


어떤 사람은 눈치 보지 않고 쉴 수 있고, 주변에서 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해주고 인정해준다. 누군가의 아픔은 타당한데 누군가의 아픔은 문제가 있고, 아프다고 뭔가를 바라지는 말아야 한다. 아파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아플 때 컨디션 조절도 능력이란 말을 하는 사회에서는 아픈 것도 권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서는 안 되는 상황이란 게 있다는 것도 무섭다. 조금만 너그러울 수는 없을까.    



점점 저런 소리 듣는 게 끔찍해져서 집 밖에 나갈 일을 하나씩 줄이다 보니 자연스레 집에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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