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읽어줄 지는 알 수 없는 허공에 띄우는 편지
안녕하세요.
보통 편지는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고 본론을 전하고 마무리 인사를 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끝냅니다.
그런데 저는 누가 이 편지를 읽을지 모르겠고, 어쩌면 저 자신의 기분에 취해있는 것일 수도 있어서 그런 일반적인 편지의 형식으로는 쓸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우선, 저는 잘 지냅니다.
요즘은 세상이 가끔 아름다워 보일 지경입니다.
그 정도로 잘 지내고 있어요.
저의 브런치스토리는 우울과 불면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어느새 살만한 수준의 상태까지 왔습니다.
아직 병원도 다니고 약도 복용하지만 일상에서의 만족도가 많이 높아졌어요.
아, 마침 오늘 병원 다녀왔었네요?
근래 세 달 정도는 선생님께 좋은 이야기만 늘어놓았던 것 같아요.
아마 오늘 했던 이야기가 제일 건강하고 멋졌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진료가 끝날 즈음 눈물이 고이더라고요.
이건 괜찮은 척이 아니라 진짜 괜찮다는 걸 솔직하게 말한 뒤 드는 벅참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소울> 아시나요?
픽사의 애니메이션인데 저는 신혼여행 갔을 때 숙소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좋다좋다 말을 많이 들었고 그런 작품은 생각보다 별로인 경우가 많은데 <소울>은 정말, 좋더라고요.
세상으로 찾아오는 수많은 생명의 영혼들에게 필요한 건 '살아갈 자격'이 아니라 '살아갈 용기'라는 것은 저라는 사람이 사고하는 방식에서는 스스로 떠올릴 수 없는 깨달음이었거든요.
반복되는 일상, 오늘이 매우 별로였지만 다시 내일이 찾아오고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 주어지는 우리의 삶이 생각보다 어둡고 우울하고 지치고 보잘 것 없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줬어요.
그리고 애니메이션이라서 가능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풍경들이 정말 따뜻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었더군요. 세상이 저렇게 느껴진다면 정말로 살만하긴 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퇴근할 때 영화 속 묘사된 세상처럼 창 밖의 비오는 풍경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눈에 이상한 필터가 낀 것 같았죠. 그리고 <소울>을 봤던 기억이 연결되었습니다. 기뻤습니다.
제가 기뻤던 이유는 우울과 불면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열심히 노력하고 치료받았으면서 상태가 개선되는 걸 느끼면 불안해 했었기 때문입니다.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과 유머가 없는 처절할 정도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에 익숙해져서일 겁니다. 그리고 내가 괜찮은 상태가 되면 나의 약한 부분을 우울과 불안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이 두려웠었습니다. 난 아직 괜찮아질 준비가 되지 않았고 잘 지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기분을 느꼈었어요. 예전에는요.
지금은 괜찮아진 게 그대로 받아들여 지더라고요.
스스로의 생각과 기분을 걱정과 왜곡없이 받아들였어요.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거 우리 잘 알고 있잖아요.
그리고 최근 러닝을 시작했습니다.
뛸 땐 솔직히 너무 힘들고... 힘들기만 하고 재미가 없어요.
뛰고 나면 얼굴이 토마토처럼 상기되고 바람이 불어오면서 제 땀을 식혀주는데, 그 때가 좋더라고요.
그리고 민소매 운동복을 입고 다른 사람의 시선 신경쓰지 않고 달릴 때 은근 즐거워요.
아, 뛰고 나면 또 세상이 영화처럼 보여서 과정이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음에 또 뛰고 싶어져요.
러너스 하이라고 해서 뛰면서 힘들었던 구간을 지나면 신체가 확 편안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때가 온대요. 저는 뛰는 거리가 짧아서 그런 걸 느끼긴 힘들대요. 그치만 뛰고 나서 느끼는 이 마음도 충분한 러너스 하이라고 생각해요. 아직 스스로 러너라고 생각하는 건 부끄럽지만 언젠가 러너로 세상을 느끼는 날이 오길 바라고 있어요.
이렇게 내용 없이 내 이야기만 늘어놓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쓰는 데까지 써보겠습니다.
아, 제가 마지막 글을 올린 이후 가장 큰 변화는 결혼을 했다는 것 아닐까요?ㅎㅎ
금요일마다 글을 올리겠다며 카페에서 노트북을 붙잡고 있을 때 옆에 있어줬던 사람이랑 결혼했어요.
전 비혼주의자였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결혼에 대해 스스로 개념과 확신이 서지 않았던 상태였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비혼주의자들이 다 결혼에 대해 잘 모르고 부정적이라는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저 자신이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당시의 저는 정말 그랬어요. 남들이 다 한다고 결혼하면 정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불행해질 거라 확신했었고 그런 사람은 결혼하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확장되는 가족의 관계와 역할도 받아들일 수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서로 평생의 반려자가 되어주면 삶이 단단해질 것 같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지금 앞서 말씀드렸던 것 같이,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불행만이 글이 된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불행에서 조금씩 멀어질 때마다 나는 글을 쓸 수 없게 되겠구나 싶었죠.
불행하지 않은 나에게는 쓸 만한 이야기가 없을 거라고 믿었고
한동안은 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뭘 써보려 해도 빈 물통에서 물 한 방울 떨어지길 기다리는 기분이 들어 금방 때려치곤 했습니다.
친한 언니 중에 글쓰기를 좋아하는 언니가 있는데요.
그 언니가 해준 말 중에 뭐라도 써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으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들을 당시에는 그게 어떻게 되나 싶었어요.
글을 안 쓰고 못 쓰는 상황은 저를 초조하게 만들었거든요.
내 어딘가의 퇴화가 진행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이렇게 편지가 쓰고 싶어졌던 걸 보면 그 언니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디에 쓰는 게 좋을까 생각하다가 브런치를 떠올렸는데 예전의 제가 금요일마다 글을 올려보겠다고 만들어 놓은 게 있는 거 있죠? 게다가 오늘은 금요일이고요.
이상한 우연이 함께하는 하루네요.
조금 있으면 남편이 귀가할 거고 같이 저녁을 차려먹은 뒤 완전히 해가 지면 저는 뛰러 나갈 겁니다.
새로 산 주황색 민소매 운동복을 입고 보라색 헤어밴드를 끼고 달릴 거예요.
방금 창 밖을 봤는데 비가 조금 그친 것 같아요.
이 편지를 읽을 누군지 모를 당신께 또 언젠가의 금요일을 기약하며 편지를 마치겠습니다.
- 스스로 잘 지낸다고 대놓고 말하는 것이 아직은 어색하고 부끄러우면서 이렇게나 길게 써버린 진이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