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어김없이 친구와 한 시간째 뜨거워진 전화기를 이불 위에 올려두고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남자 친구 없는 여자들의 시답지 않은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고, 딱히 끊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ㅡ 동갑이래.
ㅡ 아서라! 너 동갑 싫다며!
ㅡ 싫다고 했지. 근데 그냥 딱 한 번만 만나보라는데..
ㅡ 너는 그 우유부단한 성격부터 고쳐야 해. 왜 거절을 못하냐고
폰 옆에 놓인 책 표지를 들춰 보며 잠시 한눈을 팔았다. 나 역시 알고 있고, 고치고 싶은 나의 단면이었지만 친구의 입에서 정작 그런 말이 나오자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싶었나 보다. 몇 마디 더 물어봐도 시큰둥한 나의 반응을 눈치챈 건 그쪽이었다.
ㅡ 그럼 그냥 만나봐. 어차피 약속했을 거 아냐. 뭐하는 사람이래? 돈은 잘 번다니? 생긴 건?
ㅡ 음.........몰라...
사실 알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랑이란 걸 했던 남자가 나보다 한 살 연하였던 걸 생각하며 자꾸 내 안에서 거부반응을 일으켰던 탓이다. 사랑했었다. 그런데 미래가 불확실했고, 속물 같은 여자들처럼 나도 그런 이유로 이별을 선택했다. 시간이 지나고 후회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후회했기에 또다시 그런 이유로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일 따윈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앞섰고 그 후로 난 연상을 고집해왔다.
기분 나쁜 공기가 코로 훅 들어왔다. 눈뜨자마자 숨이 막혔다. 남들은 피서지로 향하는 7월 28일, 나는 연수원으로 갔다. 스물아홉 먹은 처녀가 맨날 늦잠 잔다고 아침부터 욕을 먹은 바람에 배가 불러 자연스레 1교시부터 졸음이 밀려왔다. 얼마쯤 잤을까. 조용한 강의실 정적을 깨는 진동소리,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은 마른 책상 위에서 저절로 움직이는 내 폰을 보며 황급한 마음에 거절 버튼을 눌렀다. 모르는 번호라서 그냥 무시하고 수업을 받았는데 문자가 띡! 울렸다.
ㅡ 오늘 약속 잊지 않으셨죠? 이따 6시에 카페베네에서 봐요.
아.. 오늘이구나.. 황급히 고개를 숙여 내가 입은 옷을 확인했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냥 한 번 볼 사람인데 옷차림을 확인했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다행히 옷은 원피스였다. 아침부터 푹푹 찌는 날씨 덕분에 나는 반바지에 눈길 한 번 주고, 보수적인 대한민국을 욕하며 치마 쪽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었다.
ㅡ 여보세요? 네, 저 지금 들어가요.
ㅡ 아, 저 여기요.
문 뒤로 쏟아지는 햇살 때문에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두 걸음 정도 떼어서 가까이 간 순간, 난 그냥 뒤돌아서 나가고 싶었다. 단 몇 초의 시간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 수 있다는 인간의 신기한 능력을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진심, 정중히 사과하고 나갈까를 고민하던 찰나 그가 일어나서 내게로 왔다. 케빈 클라인 청바지에 분홍색 셔츠(그것도 이 한여름에 굳이 긴팔), 아.. 그리고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양복 조끼..... 아.. 이게 무슨 패션 테러리스트도 아니고,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을 행여 누가 볼까 봐 신경이 쓰였다.
그는 소개팅한다고 한껏 멋을 내고 나왔으리라. 이건 내가 아무리 패션의 선구자여도 "회복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패션센스를 장착하고 왔을 테니, 그다음은 절망이었다.
청바지에 흰 티가 어울리는 둥글둥글 곰도리푸 같은 남자, 절대 과하지 않은 내 이상형과는 0.000001%도 근접하지 않은 남자를 보며 나는 또 나의 우유부단함을 탓하고 있었다. 내가 뭐 엄청나게 눈이 높은 것도 아닌데... 세상은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를 주문처럼 외치며 2층으로 향했다. 다행히 2층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6시면 저녁시간이었으니 없는 게 당연한데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ㅡ 저는 삼성물산 다녀요.
ㅡ 아, 네....
ㅡ 뭐하는 회사인지 아세요?
ㅡ 아니요.
나의 성의 없는 대답이 안 들렸을 리 만무한데 그는 내가 보내는 신호를 깡그리 무시하고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는 최대한 교양 있는 여자로서 경청하려고 노력했으나, 그는 선을 넘었다. '아, 그래서 어쩌라고?', '네네, 잘난 거 알겠습니다.', '이 남자 뭐지?'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다가, 어느 순간 쟁반 위에 돌돌 말려진 영수증의 숫자를 보며 그 시간을 견디던 내가 보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일관성 있게 내 머릿속을 꽉 채웠다.
ㅡ 벌써 여덟 시네요.
ㅡ 그럼 이제......
'밥 먹으러 갈래요?'라고 말하기 전에 치고 들어가야 한다. 두 시간 내내 입속에 맴돈 말을 얼른 내뱉었다.
ㅡ 너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들어갈게요.
카페를 나오니 어수룩한 어둠이 깔려있었다. 차까지 바래다주겠다는 호의를 끝까지 거절하고 신호등에서 가볍게 인사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온 나의 뒷모습을 보며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남편은 그 날 나와 헤어지고 혼자 맥도널드에 가서 빅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돌아갔지만 내가 보낸 시그널을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ㅡ "따르르르릉"
ㅡ 막내야, 왜 전화 안 받냐?
거실 소파에서 부모님과 보던 9시 뉴스가 끝나갈 즈음, 방에서 울리는 벨소리를 듣고 핸드폰을 본 순간 멈칫했다. "동갑"이라고 적힌 글씨가 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이런 멍청한 사람을 봤나.. 받고 싶지 않아 머뭇거리는데 아빠의 음성이 들려왔다. 조용히 문을 닫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내가 전화를 받은 건 순전히 아빠 때문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아빠가 누구냐고 물어올 것이고, 한 번 보고 말 사람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보통 소개팅을 하고 나면 "잘 들어갔어요?"라고 문자를 보내는 게 일반적인 남자들의 수법 아니던가?
'뭐지? 뭐지 이 남자?'
ㅡ 죄송해요. 더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랄게요.
ㅡ........
"여보세요"라는 최소한의 예의조차 사치였다. 일단 이 멍청한 사람에게 더 이상 돌려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전화를 받자마자 돌직구를 날렸다. 순간의 침묵이 흘렀다. 말해놓고 심장이 뛰었다. 통화내용을 들키지 않으려고 침대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쓴 게 화근이었다. 사실 급하게 전화를 받으려고 뛰어와서, 잘못을 들킨 아이마냥 숨어 들어갔으니 심장이 뛰는 게 당연한 것인데.. 이상하게 오랜만에 반응하기 시작한 심장소리가 싫지 않았다. 질러놓고, 미안한 마음이 엄습했다. 내가 너무 심했나... 잠깐의 침묵 사이 나는 혼자 서울까지 다녀온 듯했다.
ㅡ 음..... 그냥 우리 친구 할래요?
침묵을 깨고 던진 여자의 뜬금없는 말에 그는 웃었다. 그리곤 어제 만난 친구처럼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의 잘난 척이 사그라들었기에 들어줄만했고, 얼굴을 보지 않으니 목소리는 매력적이었다. 그의 옛날이야기를 듣다 보니 조금씩 마음의 빗장이 풀렸다. 특별할 것 없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핸드폰이 뜨거워졌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다.
"얼굴이 삭아 보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오빠같이 보일 거예요. 하하."
"뭐 나쁘진 않네요."
"내 이름은 알아요? 진짜 너무하네, 제 이름은 조원재예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들. 그래서 여자 친구랑 통화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 시시껄렁한 대화 끝에 그가 남긴 마지막 한 마디.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 같은, 아니 절대 만나고 싶지 않았던 그 사람과 그렇게 나는 이어지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아무튼, 결혼]
아무튼 시리즈를 좋아해서 어떤 이야기를 엮어볼까 고민하다가 저희 부부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연애소설로 만들어보았습니다. 2년 전에 조금 써둔 원고의 먼지를 털어 세상 밖으로 꺼내놓았고, 올해 완결을 목표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많이 사랑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