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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영 Feb 15. 2021

인생의 은사를 만난다는 것

첫 느낌과 인연

얼마 전, 친구와 서로 좋아하는 음악을 공유하다가 이런 얘기가 나왔다.


"대체로 좋아하는 음악은 처음 3초 안에 결론이 나는 것 같지 않아? 왠지 인연이란 것도 그렇더라. 첫 느낌이 좋은 사람이 있어."




가장 좋아하는 책을 꼽으라면 딱 떠오르는 한 권이 있는데, 바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Tuesdays with Morrie)"이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은 루게릭 병을 앓는 대학시절 은사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 매주 화요일마다 찾아뵈며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한 제자의 이야기이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읽었을 때, 죽음을 앞에 두고도 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내는 장면들은 잔잔한 감동을 자아냈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던 책으로 기억한다. 읽는 내내 과연 내 인생에 이렇게 큰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 나타날까 하는 기대감도 어느 정도 품었던 것도 같다.


대학원 입학 전까지는 "평생 안고 갈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이라 했을 때 그다지 생각나는 분은 없었다. 물론 기억에 남는 분들은 있었지만, 학문적인 가르침이라기보다는 학교라는 곳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신, 내 어린 시절을 빛나게 만들어주신 고마운 분들이 아련히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대학원을 준비하며 꽤 많은 연구실을 조사해보고, 여러 교수님들과 이메일을 주고받거나 간단한 면담을 했었다. HCI, 특히 과학/공학의 기술 분야 연구실이 대부분 그러하듯 정확도와 효율성을 조사하고 개발하는 양적 연구(Quantitative Research)를 주요 과제로 다루는 연구실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눈길이 가던 연구실은 대체로 커뮤니티와 직접 교류하며, 숫자보다는 개인적인 경험, 믿음 또는 의견에 집중하는 질적 연구(Qualitative Research)가 중심이었다. 내심 끌렸던 연구실은 두 곳이 있었는데, 캐나다 동부에서 노인을 위한 기술을 연구하시는 교수님이 리드하시는 연구실과 (공교롭게도, 이 교수님은 당시 안식년 때문에 자리를 비우고 계셔서 새로운 학생을 받지 않으신다는 회신이 왔다.) 현재 지도교수님과 다른 한 분이 공동으로 리드하시는 Everyday Design Studio라는 연구실이었다.


연구실 및 리드하시는 교수님이 어떤 분인지 조사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연구 과제와 관심 분야에 관련하여 게재하신 논문을 여러 편 읽어보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현재 지도교수님이 오래전에 하셨던 프로젝트를 보고, 그야말로 한눈에 반해버리게 되었다. "떠나보냄"(Bereavement: 여읨, 사별)에 대한 연구였다.


Image Source: http://willodom.com/portfolio/portfolio/passing-on-putting-to-rest/

"떠나감, 그리고 묻는 것 (Passing On & Putting To Rest)" (Odom et al., 2010)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는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남게 되는 디지털 형태의 소유물을 다룬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인터넷 보급률이 빠르게 늘고 스마트폰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디지털 소유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물리적인 물건들과는 다르게 디지털 형태의 소유물은 부식되지도, 빛이 바래지도, 풍화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먼저 떠나간 사람이 남겨놓은 새로운 형태의 소유물을 어떻게 보관하거나 간직하는지, 또는 어떻게 떠나보내는지 여러 사람들의 경험을 듣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통찰력 있는 방향성을 분석하여 제시한다.


이 논문을 처음 접했을 때, 꽤나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내가 지금까지 공부하고 알아왔던 "기술"은 더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미친 듯이 앞을 향해 달리는 열정이었다면, 교수님의 논문에서 추구하는 기술은 마치 산책하듯 걸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한 번씩 따스한 인사를 건네는 포근함이 있었다. 기술을 보는 완전히 다른 시각을 처음 알게 된 순간에 강렬하게 든 생각은 "나도 이런 일을 하고 싶다"였다. 교수님과 연락이 닿아 여러 번의 면담 후 처음 뵌 자리에서, 교수님은 나에게 "그래서, 너는 어떤 주제에 관심이 있니?"라고 물어보셨다. 결국 석사과정을 지나 박사과정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오랜 시간 인격적으로, 또 학문적으로 교류하고 싶은 지도교수님이 되어주셨다.


대학원 관련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을 꼽으라면 아마 "잘 맞는 연구실 또는 지도교수님을 찾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라는 것이었다.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전 세계 어떤 연구실을 가더라도 현재 지도교수님 보다 더 좋은 분을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매우 바쁜 스케줄에도 지도하시는 학생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매주 한 시간 이상 일대일 면담을 하시고, 연구에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절대 개인적으로 부탁하시는 일이 없고, 실수를 해도 절대 혼내는 일이 없으시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논문을 어떻게 써야 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쓴 초안을 한줄한줄 주석을 달아가며 첨삭해주셨던 부분이다. 요즘도 여전히 논문, 장학금 신청서, 연구 제안서 등 어딘가에 제출을 해야 하는 글은 꼭 한 번씩 읽어보시고 피드백을 주신다. 아카데믹한 글을 쓰는 부분에 있어서, 본인도 직접 첨삭을 받으며 배우셨기 때문에 다른 지도방법을 모르겠다 하시면서 기꺼이 본인의 시간을 내어주신다. 대학원 과정을 시작하며 본인도 모르는 것이 많으셨고, 지도교수님들께 보고 배운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작년 말 석사과정을 마치며 교수님이 지도하신 첫 번째 졸업생이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Passing On & Putting To Rest 프로젝트는 교수님의 석사 학위 프로젝트였으며, 석사과정을 마치며 발표한 논문이라고 하셨다. 내 학위 프로젝트를 지도해주시면서 종종 본인의 석사과정을 떠올리며 이것저것 말씀해주셨는데, 연구의 구성, 시행착오 그리고 논문을 쓰는 과정까지, 본인이 겪었던 경험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하셨다. 교수님은 석사과정을 2008년에 시작하셨는데, 나와 꼭 10년이 차이가 난다. 자기 계발 워크샵의 단골 질문인 "10년 뒤의 본인은 어떤 모습일 것 같나요?"의 명확한 답이자 목표는 나의 지도교수님이다. 또렷한 롤모델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고 엄청난 행운이다. 아직 한참 부족한 실력이지만 매일 교수님을 보며 자극을 받고, 안일해질 때마다 스스로 채찍질을 하며, 매 순간 감사하게 된다.


10년,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이 흘러서 내가 지도하게 될 학생이 생긴다면 아마도 같은 말을 할 것 같다.


"나도 교수님께 이렇게 배웠단다."




대부분의 인연이 그러하듯, 소중한 인연은 어느새 살며시 다가오곤 한다. 너무 조급해할 필요도 없고, 애써 찾으려고 무리할 필요도 없다. 인연이라면 이어질 것이고, 인연이 아니라면 떠나갈 것이다. 그저 주어진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서로의 길이 겹치게 되고, 그곳에서 만난다.


돌아보면 그러했다.

내 삶에 또 하나의 색을 더해주는 인연을 처음 마주할 때의 느낌은 꽤나 특별했고, 오래 기억에 남는다.


친한 친구가 그랬고,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도 그랬었다.

신기하게 면접을 보고 난 후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을 때면 결과가 좋았다.


나를 이끌어줄 은사님도 결국은 인연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으며 막연하게 기대했던 나의 첫 은사님은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





참고문헌:

Odom, W., Harper, R., Sellen, A., Kirk, D., & Banks, R. (2010, April). Passing on & putting to rest: understanding bereavement in the context of interactive technologies. In Proceedings of the SIGCHI Conference on Human Factors in computing systems (pp. 1831-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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