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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영 Jan 04. 2021

나는 지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을까?

이 글은 누구에게 조언을 해주거나 도움을 주려는 목적은 아니며, 나의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에 대한 글이다. 과거의 내가 겪은 수많은 걱정과 고민의 시간을 추억할 현재와 미래의 나에게, 그리고 혹시라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그 누군가에게 소소하게 수다를 떨듯 들려주고 싶은 나의 이야기이다.




프로그래밍이 컴퓨터 관련 학문의 전부인 줄 알았던 대학교 시절엔 막연하게 "나는 졸업하면 대기업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되어야지" 하고 생각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어렸을 때부터 (정확히는 초등학교 때부터) 내 꿈은 의사나 대통령이 아닌 "프로그래머"였으며, 대학 원서를 쓸 때도 딱 세 군데를 지원했었다. 컴퓨터 과학(Computer Science) 두 곳과 컴퓨터 공학(Computer Engineering) 한 곳. 


치열한 과제, 시험 그리고 인턴에 치이면서 배운 것이라고는 남들보다 코딩 문제를 더 효율적이고 빠르게 푸는 것, 그리고 더욱 복잡한 알고리즘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사용해서 주어진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코딩을 잘한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내 실력이 늘어가는 배움의 기쁨도 있었고, 어려운 문제를 이해하고 스스로 풀어낼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지만, "능력 있는 개발자"의 길을 걷는 선배/동기들 사이에서, 어쩌면 다른 방향을 고민하고 생각하기엔 그만큼의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왜(Why)?라는 질문을 더욱 진지하게 마주한 시기는 아마도 3학년 중반쯤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왜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어 했고, 이렇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시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의료종사자, 심리상담가 그리고 사회복지사를 동경했었다. 전공으로 배우는 기술과 지식이 다른 사람의 삶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점이 부러웠다. 반면, 프로그래밍으로 카드 게임을 만들거나 현실에서 어떻게 쓰일지 전혀 모르겠을 논리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대학에서 배우는 지식을 어떻게 활용해야 내가 보람 있게 일할 수 있을까 궁금하고 답답했다. 답이 쉽사리 나오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 누구도 답을 대신 말해줄 수 없었고 시원한 결론이 나지 않자 슬럼프가 심하게 왔다. 도저히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아서 뜬금없이 휴학을 하고 훌쩍 배낭여행을 떠났다. 새로운 곳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기고, 나를 더욱더 돌아보게 됐던 것 같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만난 외국인 의사분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고, 그동안의 고민을 털어놓자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물론 의학을 배워서 사람을 치료하고 직접적으로 도울 수 있는 것은 맞다. 다른 분야를 동경하고 부러워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회의감을 느끼거나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IT 기술은 아무나 배울 수 없는 고급 기술이다.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과의 연결고리를 찾으면 된다."


간단히 말해서 좋아하는 것하고 싶은 것지금 할 수 있는 것을 분명하게 나눠봐야 한다는 점을 짚어주셨다. 이것은 곧 "나"를 더 차분히, 그리고 깊게 돌아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가족, 친구들 그리고 마주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좋은 기억을 만들고 싶었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행복했다. "더불어 사는 삶"이란 말을 좋아했고, 나 스스로 무언가를 이뤄내는 것보다는 공동의 목표를 바라보며 함께 노력하는 것을 좋아했다. 전공과는 단 하나도 관련이 없는,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대학생활의 마지막 여름을 보낸 회사는 매우 자율적인 분위기 및 다양한 활동의 기회 (예를 들자면 해커톤, 스피치 클럽, 업무 외 개인 및 그룹 프로젝트, 그리고 여러 가지 워크샵과 세미나)를 제공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장려하는 곳이었다. IT 중심의 회사지만 사용자 경험과 접근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개발자들도 기술적인 세미나 외에, 디자인 관련 워크샵을 꽤 많이 들었다. 그렇게 Inclusive Design을 배우게 되었다.

 

개인 또는 어느 한 집단의 제한된 관점(biases)에서 디자인을 하면 필연적으로 배제(exclusion)당하는 집단이 생겨난다. 디자인의 한계를 다방면으로 고려해보면, 그것은 발전과 보완의 방향으로 뒤집어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Inclusive Design이란, 각자의 다양성(diversity)을 존중하는 디자인의 방향성 및 방법론을 뜻한다. 다양성이란, 신체적인 특징과 문화적인 배경,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각자의 경험과 가치관을 기반으로 형성된 개인적인 관점까지 아우르는 포괄적인 특성이다. 


이러한 다양성을 초기단계부터 고려한 디자인은 결국 더 나은 접근성을 가진다.

 

예를 들어서, 자판기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자판기는 아마 높은 확률로 비장애인(fully-abled)이 디자인하고 만들었을 것이다. 고의적이진 않지만, 손이 닿지 않는 사람 (e.g.,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 색의 구분이 어려운 사람 또는 시각장애인처럼 내용물의 종류를 구별하기 어려운 사람 등등, 이용에 제한이 생기는 사람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Inclusive Design의 관점으로 자판기 디자인의 첫 단계부터 이런 다양한 특성을 고려하여 만든다면 영구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키가 작은 어린아이, 사고를 당해 회복기간 동안 휠체어를 타거나 시력이 저하된 사람 등 일시적인 불편함을 겪는 사람도 큰 어려움 없이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처음부터 다양성을 고려한 디자인의 제품은, 기존의 자판기에 추가적인 특성(또는 기능)을 더하는 것보다 훨씬 유동적인 결과물을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만들 수 있다.


아무리 큰 기업에서 일을 하더라도 (오히려 회사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어떤 사람이 내가 만든 제품을 사용하게 될까?라는 질문은 사실 개발자로서 크게 의식하지 않게 된다. 매번 주어진 문제를 풀고 효율적인 답을 찾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다양한 사람의 관점을 생각하라"는 신선하고 충격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내 손 끝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의 영향력과 사용하는 사람의 경험을 생각하며 디자인하고 개발하는 것.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이었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렵고 오래 걸렸다. 외국인 의사분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일상에서 겪게 되는 일을 하나씩 차분히 돌아보니 연결고리가 보였다.


여행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와서는 남은 시간을 최대한 의미 있게 쓰고 싶은 생각에 다양한 전공과목 및 교양과목을 듣고 배우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던 중에 Human-Computer Interaction (HCI)라는 과목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개론 수준의 강의였고, "사용자 경험의 효율성"에 집중하는 프로젝트가 과목의 중심적인 평가과제여서 처음에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로, 과목을 수강하는 중에 뵙게 된, HCI 학과에 계신 교수님의 연구 조교(Research Assistant)로 일하게 되면서 "개발" 이 아닌 "연구"라는 것을 접했다.


연구는 답이 없는 (또는 답을 쉽게 찾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지고 탐구하는 매력이 있었다. 연구자의 관심분야와 흥미에 따라서 수많은 질문이 나왔으며, 어떤 질문을 던지든 크게 제한은 없었다. 내가 궁금한 것을 탐구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닌, 내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더 깊은 공부를 해야 했다. 그래서 대학원을 진학하는 것이 (그 당시에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좋아하는 것하고 싶은 것 그리고 지금 할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것은 끊임없이 나를 자극하는 동기이자 꿈이고 내가 가야 할 방향을 가리킨다. 하고 싶은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바뀌기도 했지만 큰 틀이 정해지고 난 후에는 크게 다른 길로 벗어나지 않았다. 대부분 연구 목표, 프로젝트의 방향성, 리서치 인턴 또는 교환학생처럼 아직 세부사항이 정확히 정해지지 않았지만 막연하게 "하고 싶다"는 느낌이 강한 장기적인 목표였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당장 닥친 과제나 프로젝트처럼 단기적인 목표이고, 하나를 달성하고 나면 어느새 그다음의 새로운 목표가 나타났다.

 

매일 바쁘게 살다 보면 장기적인 목표 또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 관련지어서 생각할 여유가 없을 때도 많다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감사한 것은, 오늘 내가 어떤 일을 하든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현실이 너무 힘들거나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아져서 머리가 지끈대는 날이 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지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을까?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또 한 걸음 나아갈 힘을 얻는다.






이미지 출처:

https://www.superookie.com/contents/59e36fc88b129f15c76d92bf


https://studybreaks.com/college/digital-notes-versus-paper


https://online-learning.harvard.edu/course/introduction-functional-and-stream-programming-big-data-systems?delta=1


https://www.healthline.com/health/mens-health-doctors


https://www.spiritofadventure.at/single-post/2018/04/13/Self-reflection-for-leaders


https://www.microsoft.com/design/inclusive


https://www.crowdpic.net/photo/%EC%9E%90%ED%8C%90%EA%B8%B0-%EC%9D%8C%EB%A3%8C-%EC%BD%94%EC%B9%B4%EC%BD%9C%EB%9D%BC-%EC%8B%A4%EB%82%B4-%EA%B5%AC%EB%A7%A4-193271


https://www.herzing.edu/blog/6-tips-compiling-academic-research


https://productiveclub.com/short-term-goals-achieve-long-term-go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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