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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영 Jan 04. 2021

감성적인 기술은 어떻게 떠오르게 되었나?

HCI의 세 가지 패러다임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그리스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다고 믿었다. 천동설(Geocentrism)이 받아들여지던 시기에는 천동설을 뒷받침하는 연구와 주장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16~17세기경 과학적 기술이 발전하면서 더욱 정밀한 측정을 통해 점차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고, 이를 바탕으로 천문학자 및 과학자들이 기존의 지식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서 결국은 오늘날까지 지동설(Heliocentrism)이 큰 지지를 받게 된다 (Theodossiou, E., et al., 2002). 


이와 같이 지식에 대한 관점은 새로운 가설이 정설이 되거나 기존의 학설이 뒤집어지는 등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크게 바뀌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믿음의 흐름을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부른다. 패러다임이란, 한 분야에서 유사한 관점의 연구가 공통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기로 정의할 수 있다 (Kuhn, 1970). 이 시기에는 점차 비슷한 지식이 쌓여가지만, 추가적으로 잇따르는(successive) 연구가 기존의 지식을 다시 정의하고 구성하며(re-frame)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이것이 바로 패러다임의 변화(paradigm shift)이다. 


천동설과 지동설처럼 기존의 지식을 완전히 뒤집는 거대한 변화는 아니지만, 인간이 기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관점에 있어서 몇 가지의 두드러지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었다. 




역사적으로 컴퓨터, 더 넓게는 기계의 발전에 따라서 인간이 컴퓨터를 대하는 시각에는 몇 번의 큰 변화가 있었다. Harrison et al. (2007) 은 지금까지의 HCI를 크게 세 가지의 패러다임으로 나누었다. 


** 패러다임 안에서 공통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관점의 연구/개발이 활발히 일어나며 결과가 쏟아져 나오는 현상을 파도에 빗대어 웨이브(wave)라고 표현하기도 하므로 이하 "패러다임"과 "웨이브"라는 용어를 섞어서 사용하도록 하겠다.


First Wave: 인간공학/인체공학 Human Factors 


초기의 컴퓨터는 도구의 연장선이었다. 근본적인 관점은 사람이 컴퓨터(기계)를 사용함에 있어서 효율성과 실용성의 극대화였다. 첫 번째 패러다임은 "인간공학"(Human-Factors & Ergonomics)으로 정의된다.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군사적 기계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으며, 사람의 움직임을 공학적으로 분석하여 기계에 적용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초기의 주된 관심사였다. 사람과 컴퓨터의 관계는 실재적(tangible)으로 운용되는 방식이었고, 보다 직감적으로 빠르게 사용할 수 있는 기계를 개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용도에 따라 최적화된 크기, 음성인식 또는 빛 감지등 센서가 탑재되는 위치 등 사람이 사용하기에 가장 도움이 되고 필요한 요소를 분석하고 적용하는 연구는 첫 번째 패러다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Second Wave: 인지주의 & 정보처리 Classical Cognitivism & Information Processing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계의 조작법보다는 정보와 데이터의 중요성이 떠오르며 인간공학적이었던 관점이 정보처리(information processing) 위주의 인지주의적(cognitivism) 관점이 주를 이루게 된다. 이 시기에는 사용자가 특정한 상황에서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사용자가 의도하는 대로 정보를 처리하고 보여주는 것(human-machine communication)을 새로운 "효율성"의 척도로 삼게 된다.


사용자와 컴퓨터가 소통하는 것을 하나의 "모델"로 정의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예측하고 최적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정보처리를 목적으로 사용자-컴퓨터로 정의된 모델은 활용도가 높아서, 컴퓨터의 내부적인 시스템, 사용자-컴퓨터의 관계, 그리고 사용자 사이에서의 소통에도 적용될 수 있었으며, 최적화가 가능한 효율성이라는 특징으로 인해 한 모델이 다른 모델보다 더 뛰어난지 평가가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터치스크린에서 사용자의 입력값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기술, 빠르게 움직이는 피사체를 순간적으로 잡아내는 카메라 기능 등 사용자가 필요로 할 법한 다양한 상황의 예측과 그에 상응하는 정보처리 기술의 개발은 두 번째 패러다임의 관점으로 볼 수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웨이브의 공통점은 발전의 가능성을 문제점에서 찾았다는 점에 있다. 무언가가 잘 작동하지 않거나, 비효율적인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며 전체적인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첫 번째와 두 번째의 패러다임이 컴퓨터, 더 나아가 기술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패러다임이 포함하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 인간공학적인 효율성과 정보처리 중심의 최적화된 모델에서는, 관찰과 분석을 통해 나온 데이터가 목표와 다른 방향으로 나온다면 그것은 틀렸다고 결론지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세 번째 패러다임의 중심에 있는 연구자들은 그것을 틀렸다가 아닌, 다르다라고 표현한다. 굳이 하나의 목표에 맞추지 않고, 관찰된 특이한 현상을 풍부한 서술을 통해 설명하고 이해하려 한다.


과학적 방법론에서는 예상 결과(e.g., hypothesis; 증명하고자 하는 가설)를 명확하게 정의한다. 기대값이 명확하게 정의될수록 데이터를 기반으로 과학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이 수월해진다. 하지만 사람이 사용하는 기술의 맥락에서, 오직 하나의 보편적인 목표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생기는 것이 불가피하다. 


영어밖에 모르는 사용자가 한국어로 만들어진 최적의 시스템을 사용했을 때의 효율성 한국어 사용자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의 예상 결과값과는 크게 다를 것이다. 이것은 시스템이 (또는 사용자가) 틀린 것일까?


사람의 관절을 면밀히 분석하여 만들어진 가장 효율적인 게임 컨트롤러를,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게이머가 사용할 때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Bødker(2006)는 이런 딜레마를 "두 번째 웨이브가 세 번째 웨이브의 도전을 만났다"라고 표현한다.



 

Third Wave: 현상학적 관점 Phenomenogically-Situated


현상학(Phenomenology)적인 접근법[1]은 기술이 만들어내는 현상과 그로 인한 사용자의 경험을 탐구하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세 번째 웨이브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웨이브에서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관점과는 결을 조금 달리한다. 기술이 다양하게 발전하고 사용자가 크게 늘어나게 되자 기술이 쓰이는 범위가 더욱 다양해졌다.


초기의 스크린은 오직 텍스트 위주의 정보전달이 목적이었지만, 최근에는 다양한 형태의 정보의 전달 및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로봇의 표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도 스크린이 활용되고 있다


세 번째 웨이브에서의 기술은 의미를 추구(meaning-making)하며, 사용자를 조금 더 감성적으로 대하고, 기술적인 한계에 사용자를 가두지 않으며, 사람들의 문화적/사회적 배경까지 고려한 시스템을 만든다. 

 


기존의 실무적인 목표를 벗어나서 소수민족의 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거나, 난치병 환자들의 정서적인 지지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기술을 개발함에 있어서 사용자의 사회적인 위치(social situation)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특정 그룹의 사용자를 위해 만들어진,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대변하는 기술은 사용범위가 좁아지고 비용이 더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특수한 목적성 때문에 그 자체로 (또는 그 시도조차도) 충분히 가치 있을 수 있다. 이는 마치 교과서의 내용만을 공부해서 좋은 점수를 받는 학생이 아닌,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며 특기를 살려주는 학습법과도 비슷하다.


세 번째 웨이브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더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업무 지향적인 목표보다는 사용자의 감정과 만족감처럼 수치화하기 어려운 가치에 집중하는 방향성에서는 여태껏 기술이 추구하던 효율성을 잠시 내려놓기도 한다. 인간적인 가치를 기술에 반영하고 더 나은 방향을 고심하는 세 번째 패러다임은 가히 감성적(emotional)이고 인도적(humane)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공학적인 첫 번째 웨이브와 정보처리 중심의 두 번째 웨이브를 거쳐 기술에 의한 현상과 경험에 집중하는 세 번째 웨이브에 다다랐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세 가지의 패러다임이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며, 각각 기술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글의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기술의 발전이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다는 수확 가속의 법칙(The Law of Accelerating Returns)을 설명한다(Kurzweil, 1999).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기술의 발전이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획기적인 기술이 발명되고 보급될 때마다 사람들의 삶이 아주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생각해보자


페이스북의 CEO인 마크 주커버그(Mark Zuckerberg)는 2018년의 포스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페이스북이 그저 재미만을 위한 서비스가 아닌, 사람들의 행복(well-being)을 위한 서비스인지 확인해야 할 책임감을 느낍니다."

"We feel a responsibility to make sure our services aren’t just fun to use, but also good for people's well-being."


눈부신 기술의 발전은 더 효율적이고 편리한 삶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스마트폰의 보편화를 통한 카메라의 쉬운 접근성과 인터넷의 보급 그리고 익명성을 보장하는 메신저의 등장으로 인해 사생활이 유출되고 큰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사건이 터지듯이 강한 빛에는 필연적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생긴다. 그렇기에 IT기술을 주도하는 리더들은 그들이 개발하는 기술이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점을 분명히 자각하고 윤리적인 기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자율운전기술이 탑재된 자동차(self-driving car)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났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우리가 맞이할 새로운 기술들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기술이 가져올 변화와 현상에 대해 윤리적으로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다면, 기술이 잘못된 방향으로 쓰였을 때 또는 기술의 허점이 발생했을 때 더욱더 큰 피해를 불러올 수 있다.


사람중심의 기술을 추구하는 세 번째 패러다임 안에서 특정 기술이 깊게 논의되면 논의될수록 더욱 성숙한 기술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세 번째 패러다임의 관점으로 우리에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감성적인 기술을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다가올 기술에 대한 들뜬 호기심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각주:

[1]  현상학(Phenomenology)은 경험자의 의식을 통해 드러나는 현상 (e.g., 개인적 경험, 사회적 현상 및 사건 등)을 전달, 설명하고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Moran, 2002, p. 4-6). 다른 사람에게 온라인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현상을 현상학적으로 접근하면, 사용자의 의식을 통해 "메시지를 주고받는" 경험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이 경험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나아가 이 행위가 어떤 개인적/사회적 영향을 끼치는지 탐구할 수 있다. 




참고문헌:

Bødker, S. (2006, October). When second wave HCI meets third wave challenges. In Proceedings of the 4th Nordic conference on Human-computer interaction: changing roles (pp. 1-8).


Harrison, S., Tatar, D., & Sengers, P. (2007). The Three Paradigms of HCI. In Proceedings of the 7th ACM Conference on Designing Interactive Systems. New York: ACM Press. P. 1-18. (p. 1).


Kuhn, T. S. (1970).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Chicago: Univ. of Chicago Press.


Kurzweil, R. (1999). The age of spiritual machines: When computers exceed human intelligence. Viking Press.


Moran, D. (2002). Introduction to phenomenology. Routledge.

Resende, M. S., Busch, W. P., & Pereira, R. (2017). The Three Waves of HCI: A Perspective from Social Sciences. 4.


Theodossiou, E., Danezis, E., Manimanis, V. N., & Kalyva, E. M. (2002). From Pythagoreans to Kepler: the dispute between the geocentric and the heliocentric systems. Journal of Astronomical History and Heritage, 5, 89-98.




이미지 출처:

http://wouldyoulike.org/featured/%EC%9A%B0%EC%A3%BC%EA%B4%80%EC%97%90-%EB%8C%80%ED%95%98%EC%97%AC-%ED%8C%A8%EB%9F%AC%EB%8B%A4%EC%9E%84%EC%9D%98-%EC%B2%9C%EB%AC%B8%ED%95%99


https://www.news1.kr/articles/?3076843


https://dataworks-ed.com/blog/2014/07/the-information-processing-model


https://www.brainline.org/article/assistive-technology-glossary


https://www.iberdrola.com/social-commitment/social-technology


https://www.smithsonianmag.com/blogs/national-museum-of-natural-history/2017/11/29/3d-technology-key-preserving-indigenous-cultures


https://www.stylus.com/huggable-robots-support-users-emotional-nee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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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shannon100.com/tech/what-is-the-ideal-size-for-a-smartphone-screen


https://qz.com/745104/easy-questions-that-computers-are-terrible-at-answering


https://www.wired.com/2017/01/apple-iphone-10th-anniversary


https://www.linkedin.com/pulse/dark-side-technology-its-crisis-ethics-sarah-mccue


https://www.techm.kr/news/articleView.html?idxno=4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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