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같이 일하려면 일 년에 세 번 정도 연구 결과를 출판해야 하고, 그건 아주 힘든 일이에요. 당신의 독일어가 이론적인 부분을 잘 설명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받아주기가 어렵겠어요.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으니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너무 낙담하지 않기를 바라요.”
박사 과정 진학을 위해 석사 지도교수에게 가능성을 물었다. ‘박사’라는 이야기를 꺼내면서부터 영 자세가 삐딱하던 그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거절의 답신을 보내왔다. 실력이 안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꽤 오랜만이라 충격이 컸다. 내 독일어가 그 정도였던가. 그가 말하는 ‘언어’가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의 실력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석사 과정을 지나며 15페이지에서 20페이지 정도 되는 소논문을 10개가량 써냈고, 학점은 박사 승낙을 위한 기준 점수를 한참 웃돌았다. 내 독일어가 그렇게 엉망이었다면 그의 동료 교수들이 내게 준 점수는 힘들게 공부하는 유학생에게 주는 동정의 점수였던가. 독일어로 웬만한 소통이 가능한 상황임에도 언어가 거절의 이유가 된다는 건 “원어민 수준이 아니면 안 돼.”라는 소리로 들렸다. 그건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고 된다 하더라도 당장은 시간이 더 요구되는 일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독일에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필드에서 요구되는 언어 수준이 그 정도라면, 내게 남은 일은 번번이 모든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뿐이지 않나. 그가 남긴 거절의 사유들은 마치 박사가 애초에 독일인들에게만 허락되는 자리인 것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거기서 나는 그들과 나의 경계를 구분 짓는 아주 얇고 투명한 선을 보았다. 발을 디딘 후에야 덜컥 걸려 넘어지는, 지나가기 전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아주 투명한 선.
흔히 인종차별이라고 불리는 대표적인 유형들, 이를테면 “니하오“라던가 “칭챙총“ 같은 것들은 너무나 일상적이라 이제는 딱히 특별한 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나의 경우는 오히려 대학 안에서 소위 말해 „배운 사람“들로부터 느껴지는 은근한 무시가 더 상처가 됐었다. 한 번은 인턴을 하기 위해 학교에 속한 한 연구소에 지원을 했고 인사 담당자와 아주 간단한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는 대뜸 이런 질문을 했다.
“혹시 인터넷 잘하세요?“
인터넷이라니! 자료 검색이나 엑셀과 같은 기술적인 역량을 묻는 게 아니라 고작 인터넷을 할 줄 아냐는 거다. 내 평생 이런 질문을 받아보리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인터넷이요? 이 코로나 시국에 내가 어떻게 공부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소논문들에 인용한 참고문헌들을 그럼 도서관에서 전부 빌려다가 썼겠어요?’ 분노로 다다다 쏘아대고 싶은 생각이 들다 이내 자기 의심이 피어올랐다. 화를 내기엔 담당자의 그 눈망울이 너무나 악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이었다.) 혹시 문장 그대로의 뜻 말고 다른 의미가 숨어있지는 않을까? 그가 내뱉은 그 문장을 그대로 외워 친구에게 물었다.
“면접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는데, 내가 이해한 게 맞아? 인터넷 할 줄 아냐고 물어본 거야?”
“음… 네가 이해한 게 맞는데, 보통 이런 질문은 잘 안 하지. 너무 당연하니까?”
그들에게 당연한 것이 왜 내게는 당연하지 않을까. 이런 황당한 질문을 듣고도 ‘악의가 없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더 깊은 상처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입장인 것이 서러웠다. ‘무지’라는 방패를 베어 낼 칼은 존재하지 않는다. “몰랐어.”라는 말 한마디면 용솟음치던 천년의 분노도 찬물을 뒤집어쓴 듯 힘을 잃는다. 그래서 자신들이 정의한 ‘아시안’의 이미지에 상대를 가두고 판단을 내리는 무례한 이들을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는 여전히 고민스럽다. 가만히 있자니 한국, 나아가 아시안들에 대한 편견을 더더욱 고착화할 것이라는 죄책감이 들고, 일일이 반박하자니 너무나 큰 에너지 소모와 상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좀 배워!”라는 날카로운 절규는 그들에게 닿지 않는 공허한 외침일 뿐. 전투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지사다.
이런 날이면 나는 늘 방문을 걸어 잠갔다. 독일인은 물론이고 독일어까지도 꼴 보기 싫어져서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한국 드라마를 정주행 하거나 새로운 유튜브 채널들을 찾아다니며 허송세월을 하고는 했다. 보이지 않는 그 얇은 선이 언제 모습을 드러내 발목을 잡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의심 렌즈’가 되어 일상의 모든 사건과 등장인물들을 왜곡해 출력했다. 시간이 갈수록 코로나를 핑계로 친구들과의 식사 모임에 나가지 않았고 안전하다고 느끼는 소수의 몇몇 친구들에게만 빗장을 풀었다. 어떤 날은 마치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도 해보려 발버둥 치지 않고 가만히, 그저 아래로 아래로 끌어당기는 절망의 블랙홀 속에 저항 없이 가라앉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서서히 고립되어갔다.
그럴 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친구들이었다. 며칠 전, 오랜만에 과 친구들과 만나 브런치를 먹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박사 선발 과정에서 들었던 교수의 코멘트를 친구들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러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말을 잇지 못했고, 한 친구가 울그락 불그락한 얼굴로 말을 시작했다.
“뭐? 그건 명백히 차별적인 언사야. 너 한국어로 논문 썼어? 독일어로 썼잖아. 과에서 요구하는 언어 최소기준도 이미 맞췄고. 그런데도 언어를 이유로 거절하는 거, 그게 차별이지.”
활활 타오르는 분노를 가득 담아 나를 대신해 교수의 욕을 한 바가지 하던 친구의 말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본인의 친구들을 모아 성명서를 만들어 교수에게 보내겠다는 걸 뜯어말리며, 입가에는 슬쩍 미소가 번졌다. 몇 개월 간의 고통이 내게서 훌쩍 떠나버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더 잘했다면 듣지 않았을 말이야.’하며 비난의 화살이 나 스스로를 향하는 것은 멈추지 못했던 때였다. 친구들이 보내 준 지지는 사실 그 당시 무엇보다 듣고 싶었던 말이자, 진작에 스스로에게 해주었어야 하는 위로였다. 인간은 스스로가 인지하고 있는 것들도 가끔은 타인의 입을 통해 들음으로써 확신을 얻게 마련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겹겹이 걸쳐 입은 누더기를 벗어던진 듯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세상은 변했지만 차별이 없는 사회는 아직까지 요원하고, 우리는 어쩌면 계속해서 상처 받고 외로울 것이다. 그러나 상처를 주는 것도 사람이지만 치유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다. 마음이 다치는 상황에서 나를 지지해주고 그 행동이 틀렸다 소리 높여 말해줄 수 있는 동료가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한 받침대가 되어준다. 옆 사람의 손을 꼭 붙잡고 걷는다면 보이지 않는 선에 발이 걸린다한들 넘어지지 않을 것이고, 넘어진다 해도 쉽게 일어날 수 있다. 그날 평소에는 멀고 복잡하게만 느껴졌던 ‘연대’라는 개념이 한 올 한 올 풀려 머리 위로 내려오는 듯했다. 목숨을 구해줄 동아줄처럼 나는 친구들이 보내는 연대를 붙잡았다.
이제 남은 일은, 올라가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