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이 끼었네. 자기는 공무원 같은 건 하면 안되겠다. 금방 그만 둘 팔자야.”
그 때 그 역술가의 말은 저주였을까, 몇 수 앞을 내다본 예언이었을까. 그의 말마따나 나는 스물살부터는 줄곧 한국에 오래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자주 어딘가를 돌아다녔다. 해외에 나가있는 게 아니면 한국에서는 직장을 옮기거나 집을 옮겼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진득하게 앉아 끝까지 뭘 하지를 못한다”며 나무란다. 아니, '이동수'씨가 매번 날 찾아오는데 어쩌라고! 그와의 질긴 인연이 내 운명이라는데.
얼마 전 이사를 했다. 한국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독일로 떠나오는 것 자체가 큰 변화였던지라, 왠지 독일에서는 정착이라는 걸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독일에 온지 일년 반 만에 무려 두 번째 이사다. 지난 번 첫번째 이사를 마치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사 박스 몇 개를 남겨두었는데, (독일에서는 박스가 아주 비싸다.) 아무래도 그 설마에 잡힌 것 같다. 먼지가 채 내려앉기도 전인 박스를 다시 꺼내 조립하면서, 끊임없이 입술 틈을 비집고 터져 나오는 실소를 멈출 수가 없었다.
이사 당일, 내 키의 반만 한 박스들과 집채만한 가방을 들쳐 메고 방과 이사 차량 사이를 부지런히 달리며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역마를 떠올렸다. 그 옛날 중요한 소식을 전하고자 길을 떠나는 관원들의 발이 되어 부지런히 역과 역 사이를 이동했던 말들. 자신의 목적지도, 정착지도 알지 못한 채 이름 모를 짐들을 짊어지고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달렸을 존재들이 못내 가엾어졌다. 그 고단함을 안쓰러이 여기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칭송하지는 못할 망정, 사람을 해치는 기운을 뜻하는 ‘살煞’이라는 글자를 붙여 불행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버리다니. 자정이 되어서야 녹초가 된 몸을 뉘이고 나무가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되어 있는 새로운 문양의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역마는 지들 좋으라고 그렇게 뼈빠지게 일한 건데, 배은망덕이 따로 없구만. 나는 적어도 나 좋자고 이사한거지!’ 괜히 일면식도 없는 구시대의 사람들을 흉보며 골을 냈지만 사실은 온몸 구석구석에서 느껴지는 근육통 때문에 이 역마살이 아주 조금, 정말 조금은 불행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역마와 같이 고단한 여정을 계속하는 내가, 그 노고를 알면서도 다른 이들과 똑같이 그들을 불행한 존재로 낙인 찍어서는 안된다고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좋아, 나라도 역마의 팬이 되어주지.
역마살의 순기능은 이렇다. 첫째, 물건에 욕심이 없어진다. 언제든 떠날 가능성이 존재하므로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면 절대 곁에 두지 않는다. 물론 소위 ‘예쁜 쓰레기’에 대한 갈망은 나 또한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계산대 앞에만 서면 번번이 ‘잠깐만, 다음에 이사 갈 때 이거 다 짐 되는 거 아니야?’하는 생각이 천둥 치듯 양쪽 관자놀이에 꽂혀 제동이 걸린다. 의도치 않은 무욕, 무소유의 삶이다. 이렇다 보니 물건에 딱히 의미도 미련도 두지 않아 무언가를 버릴 때, 단 1초의 주저함도 허락하지 않고 바로 실행할 수 있다. 북미와 유럽에서는 정리의 여왕 곤도 마리에의 정리법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Marie Kondo-ing’이라는 단어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자 하는 이들이 이렇게 많다니, 그들의 삶에 나의 역마살을 한 스푼 씩 덜어 넣어주고 싶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리라 확신한다.
둘째, 적응이 빠르다. 끊임없이 어딘가로 이동한다는 것은 적응력과 적응에 대한 확신이 있지 않고서야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사실 적응을 잘 하기에 떠도는 것인지 늘 떠돌기에 적응을 잘하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해묵은 논쟁과 궤를 같이 하는 이 물음은, 눈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이민가방 하나와 20인치 캐리어 앞에서 무용해진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정신을 차려보면 늘 또 다른 여행을 앞두고 있고, 그 여행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주 약간의 수고로움으로 시작해 흐뭇함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집을 옮기고 직장을 옮기고, 사는 국가를 옮기며 지금까지 무탈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역마살이라 볼 수 있겠다. 세상 어디에 떨어져도 그 지역의 잡초로 김치를 담가 먹을 수 있는 레벨, 그 정도는 되어야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 않겠나.
셋째, 늘 깨어있을 수 있다. 안정적인 삶을 갈망하면서도 가끔은 온갖 새로움과 불안정함으로 가득한 '여행'에 목을 매는 주변인들을 보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안정과 불안정, 익숙함과 새로움의 최상의 비율은 무엇일까 고민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다시 돌아올 곳이 있다는 ‘믿는 구석’이 잠깐의 일탈을 더 짜릿하게 만드는 것일테지만, 반복되는 일상을 계속 해서 보내다 보면 어느새 나의 껍데기가 내 하루를 대신 보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환경을 바꾸는 것은 그래서, 늘 스스로를 깨우는 것과 같다. 새로움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도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된다. <여행의 이유>에서 김영하 작가는 ‘경험 풍부한 여행자들은 눈앞의 현실에 맞춰 즉각적으로 자신의 고정관념을 수정한다’고 했다. 기존에 내가 가진 것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맞닥뜨린 현실을 헤쳐나갈 수 없고, 그리하여 어떤 틀에도 모양을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액체같은 유연함을 가지게 된다.
역마살 예찬은 여기까지. 살煞이 너무나 무시무시한 뜻을 가진 탓에 예찬이라는 단어가 병렬로 놓이는 것이 어딘지 어색하지만, 내게 역마살은 그 어떤 것도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즐길 수 있는 힘을 준 고마운 지원군이다. 낙타는 혹에 저장된 지방으로 무려 16일을 물 없이 버틸 수 있다는데, 역마살은 어쩌면 낙타의 지방처럼 혹독한 환경을 견딜 수 있도록 나의 몸 곳곳에 저장된 진짜 ‘살’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럼 나의 살들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달리기에 적합한 튼튼한 두 다리를 가진 말에게 늘 제자리에 머무르라 말하는 것이 되려 고문이 아닐까. 역마가 고되고 힘든 삶을 사는 존재라는 것은 오직 인간의 시각에서만 가능한 평가다. 역마에게는 달리는 순간이 스스로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는 시간이었으리라. 깊게 뿌리내리며 사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여행하며 사는 홀씨의 삶도 있을테니 말이다.
내게 ‘옮김’이란 마음의 족적을 남기는 일이다. 누군가는 금방 떠날 것이기에 그 어떤 것에도 정을 주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함께 울고 웃었던 인연들과의 기억이, 최선을 다한 하루하루의 고단함과 뿌듯함이, 다음 행선지로 떠나기 전 설렘과 서운함이 온전히 베어있다. 이 고마운 기억과 마음의 조각들에 기간이라는 조건을 붙이는 건 어딘지 좀 서운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헨젤과 그레텔의 빵 부스러기처럼 그렇게 마음을 한 조각 씩 떼어 두고 다음 역을 향해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