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마스크 착용과 유아의 정서발달 연구
위 한 문장, 어쩌면 몇 년 후 아동학 연구집에서 볼 수 있는 논문 타이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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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아이들과 마스크를 쓰고 마트를 방문하는 길에 작고 귀여운 마스크를 쓴 작고 귀여운 두 돌 아기를 보았다. 세상 가장 예쁘고 귀여운 시기. 그 아이를 향해 나는 한껏 미소를 지었으나,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쓴 나의 그 어떤 표정도 몸짓도 그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유모차에 기대어 멍한 시선만을 보내던 아기가 낮잠 잘 시간인 탓에 고단한 상태였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순간, 아 하는 신음 같은 것이 나를 퉁 치고 지나간다. 저 아기에게 전달되지 못한 낯선 아줌마의 미소. 그렇게 날아가버린 타인의 따뜻한 표정 하나, 이 아이가 볼 기회를 누가 빼앗아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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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도 잘못을 따지기 힘든 시절. 불확실성의 바이러스가 몰고 온 위협은 우리의 얼굴을 온통 가리게 만들었다. 그렇게라도 당장 저 어린 아기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주어야 하기에 우리는 얼굴을 가렸다. 우선순위의 목록에서 보자면 마땅한 우리의 선택이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인가의 대가를 치루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신중하고도 깊은 고민도 그 목록에 빠짐없이 올려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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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는 “낯가림”으로 자신의 존재를 깨닫기 시작한다. 모르는 얼굴에 대한 두려움, 불안, 공포를 경험하며 동시에 안전, 위안, 위로를 학습하도록 우리의 뇌는 세팅이 되어 있다. 만 2살을 전후로 우리의 뇌는 폭발적으로 외부 자극을 수용하여 생존에 필요한 갖가지 정서로 교환한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부터 전두엽이 제법 자리 잡게 되는 만 10세까지 사회적 경험이 중요하다는 연구는 다시 거론할 필요 없이 당연한 지식이고. 또래 집단과의 교류 마찰 갈등 등을 오감으로 수용하며 작은 사람은 그렇게 ‘성장’한다. 여기에 ‘나’가 아닌 ‘너’, 즉 타인이 나에게 보내오는 각종 정서적 사인(sign)은 더할 나위 없는 보물과 같은 체험이다. 이 경험의 누적 정도에 따라 한 사람이 성인이 된 이후에 가지게 될 정서적 지능이 달라진다. 생물학적 유전 외에 환경적 유전이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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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앞으로도 금방 수그러들 가능성 적다고 점쳐지는 수인성 바이러스, 신종 코로나가 들썩 거리는 시절이 길어질 것으로 보이는 지금. 우리의 내일이 될 유아, 아동의 정서발달에 큰 자극 한 부분이 마스크에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여러 이유로 아주 어려서부터 어린이집, 보육원 등의 집단생활을 시작하는 아이들일수록 더 많은 마스크 얼굴을 마주할 것이다. 마스크가 완전히 걷히기까지 앞으로 얼마의 시간을 더 보내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기간만큼, 하루가 다르게 세포분열로 성장 중인 우리 꼬마들은 그만큼 “얼굴과 표정”을 마주할 기회가 그 비율로 줄어든다. 그렇게 성장한 이 아이들의 정서적 발달 상황이 어떠할지 조심스럽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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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생존력이 있다. 우리는 탄력적이다. 분명, 2020년 이후부터 한동안 마스크로 가려진 정서적 자극의 기회를 다소 놓쳤다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는 이 아이들은, 이 세대는 다른 방식으로 이를 극복할지도 모르겠다. 마치 한쪽 뇌가 사라져도 남은 뇌가 스스로를 변형시키며 살아남듯이 말이다. 하지만, 넋 놓고 얼굴 가리고 아기들을 마주하기 전에, 이제 고민해야 한다.
우리 어린아이들에게 웃는 미소를 보내는 일에 대해, 어떤 방법이, 어떤 대처가 가능할지 함께 고민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