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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tgrim Dec 14. 2020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힐빌리의 노래

아마 여기저기서 여러 번 봤을 넷플릭스 신작 영화 <힐빌리의 노래(Hillbilly Elegy)>의 리뷰는 많을 터이니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겠다. 몇 번을 화면 멈춤을 하면서, 겨우 겨우 울면서 봤다. 이 영화. 응…전혀 슬픈 영화가 아니고 어쩌면 막 그리 무슨 공포 영화도 아닌데 적어도 나에게는, 몇 번 호흡을 들이키며 보게 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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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또 글을 쓰려하니, 이게 참 그렇다. 또 주저주저하게 되는 이 마음을 요리조리 파헤쳐 보니, 아 나..,살짝 두려운 것이겠다. 그래, 나 어려서 미국에 유학 간 아버지 따라 거기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공개하는 것에 대해 이제는 조금씩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오픈 페북 3년 정도 되었으면, 사실 이제 와서 새삼, (와, 그 이전에 떠들었던 개인사가 얼마인데 진쫘 이제 와서 그지;;; ) 그런데, 그 시간, 기간 동안 충분히 학습하고 습득했던 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많은 “편견(stereotype)“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정말로 당연하고 심지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그 다음 순서는 자나깨나 ‘말조심’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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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기왕 들고 나온 이야기 하나 할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개인적으로 사소한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과 얽혀 있는 어떤 풍경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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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어쩌면 마지막 ‘국비 유학생’ 수혜자였을 텐데, 암튼 70년대 후반 대한민국 정부는 없는 살림 쥐어짜며 젊은 공무원들을 미국에 보냈다. 가서 어여 습득하고 학습하고 배워서 빨리 우리나라에 적용하라며. 그렇게 우리 아버지는 말단 공무원 시절 시험을 통과하며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런데 이게 단 한 명을 지원하는 금액이다. 합격 당시 이미 어린 남매를 두고 있는 4인 가족이 그 돈으로 도무지 살아낼 수 없는 그런 금액이다. 나의 어머니는 무슨 수가 있어도 떨어져 있지 않겠다며 무작정 비행기를 올랐고, 그 결과 미국에서 살던 내내 인근 모텔 청소부로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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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아버지가 다니던 학교는 Penn State Univ. 펜실베니아 주에서도 나름 꽤 시골에 해당하는 “College City”에 있다. 동네 이름 그대로 진짜로 펜실베니아 주립 대학이 있어서 먹고 사는 그냥 진짜 작은 시골 마을이다. 길 가던 사람 붙잡고 “Korea”라고 말하면 정말이지 아무도 못 알아듣던 시절에, 더군다나 중부 내륙 산골 마을이면 그래 아시아인은 고사하고 흑인도 찾기 힘들었던 시절이다. 그런데, 내가 정착하여 살았던 마을 “Hill Top Park”은…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꽤 “빈민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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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국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이 만 4살 때였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그 어떠한 “사전 정보”가 없이 나는 그저 미국 중부 내륙의 작은 시골 마을 빈민가에서, 그것도 (지금으로 치면) 한 달에 약 30만 정도만 내면 되는 Trailor House (트레일러 하우스, 캠핑카의 바퀴를 떼고 자릿값을 지불한 자리에 정착하여 집처럼 사는 형태)에서 살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한국에 귀국하여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도 이 시절을 그저 “곱고 예쁜” 마을이라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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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무참히(?) 깨진 것은 어느 날, 엄마의 말 때문이었다.

“… 지금도 그 아이 표정이 지워지지가 않네. 정말이지… (흐느껴 울기 시작하심) 그때는 정말이지, 내 새끼도 내가 제대로 못 먹인다 싶어서 말이야… 아, 아, 그런데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왜 좀 더 그 아기를 안아주고 챙겨주지 못했을까 싶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한참 흐느껴 우셨다. 그때서야, 그제야, 아… 그러게, 나 살았던 동네, 다시 생각해보니까, 빈민가였네, 백인들이 모여 있는 정말 못 사는 그런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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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트레일러 옆 옆 트레일러에 미혼모와 어린 아들이 살았었다. 당시 남자아이는 만 3살, 나보다 한 해 밑인가 그랬고. 그 엄마는 그때에도 20세가 되지 못했으니, 그러니까 10대에 아이를 낳아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 돌보면서 트레일러에 사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 꼬마 남자애가 그렇게 우리 집을 찾아왔더란다. 아마도 최소한의 의무적 데이케어 센터 시간이 끝나고 어린 엄마가 일을 나갔던지, 놀러 갔던지, 아무튼 이제 만 세 살의 아이가 우리 집 문을 두들기며 노상 했던 말이… “I can eat Kimchi.. It’s Ok with me! I want Kimchi.(나 김치 먹을 수 있어요. 괜찮아요. 김치 먹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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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고향이 평안도라 김치가 안 맵지만, 그럼에도 고춧가루 존재를 전혀 모르는 탯줄로 커왔을 백인 아이 입에는 여전히 매운 김치 맞다. 이전에도 연신 물을 마시면서 김치와 밥을 먹었던 아이를 엄마가 그 뒤로도 몇 번 더 챙겨주셨다고 했다. 그런데, 정말이지 너무 매일같이 문을 두드리며 “김치 주세요!”를 말하는 이 아이를 결국 못 오게 조치를 취했다고 하셨다.

“… 그때는, 정말이지… 모텔 청소한 돈으로 내 새끼들도 겨우 밥을 먹였기 때문에, 도무지 남의 새끼 입에까지 밥을 못 내밀겠더라. 정말이지, 그게 근데, 지금 와서 이렇게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너무 그 아이한테 미안하고, 너무 마음이 아프고…” 그러시며 이내 목 놓아 우셨다. 아이처럼.

엄마는 그 죄책감으로 약 6년가량 소년원 방문 자원봉사를 하셨다. 그 이후에 조금 그 아픔이 씻겨지셨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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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렸을 적, 그러니까 국민학교 시절…그 이전의 “미국 생활”을 떠올리면 온통 좋기만 했었다. 모든 것이 80년 초반 한국보다 미국이 좋았고 동네 사람들도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딱 예닐곱 살 아이의 판타지였던 것이다. 당장 우리 옆집에는 19살 엄마와 3살 아들이, 그리고 그 앞 집에는 마약중독자 이혼녀와 나와 같은 나이 딸이, 그리고 그 뒷집에는 반신불수의 어머니를 돌보며 사는 늙은 노총각이, 그리고 그 옆에 옆 집에는 노상 경찰차가 서 있었는데 이유를 몰랐었다. 심지어 나의 어떤 기억 속에는 이제 막 걷는 아이에게 맥주병을 안기며 마시라며 웃던 동네 아저씨도 있었다. 그랬던 마을의 “어떤 현실”이 어린 동양 여자 아이 눈에는 온통 “겨울왕국”의 판타지만큼이나 판타스틱하고 삐까번쩍하고 울트라캡숑이였다. 그리고 고등학생의 나이가 되어서야, 아, 거기… 그곳, 아픈 곳이었구나…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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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힐빌리의 노래>의 화자는 1997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가 살았던 1977년보다도 20년 뒤의 미국 시골 마을의 풍경, 그 첫 장면에서부터 나는 눈물이 흘렀다. 왜 아직도, 왜 어쩌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있는지, 이 기시감과 이 절망감이 무엇인지, 이게 참 뭐랄까 말로 설명이 힘든데, 그렇게 화가 나더란 말이다. “결국 바뀌는 것이 없구나. 달라지는 게 힘들구나” 이미 뻔한 사실 앞에 또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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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디를 가도, 좀 더 가진 자들이 있고 좀 덜 가진 자들이 있다. 그 어떤 시대에도 좀 더 가진 이들이 있고 좀 덜 가진 이들이 있다. 이것은 상수다. 다만, 힐빌리를 빠져나오면서 눈물을 닦으며 웃음을 지었던 늙은 소년의 고백이 변수가 된다. 매우 큰 변수.

"... 우리의 시작이 우리를 정의(규정)하더라도, 매일의 선택으로 달라질 수 있다. 우리 가족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그들에게는 없던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다. 어떤 미래가 나를 기다리더라도 그것은 가족 모두의 유산(Legac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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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 옆 트레일러에서 살았던 김치가 먹고 싶다던 그 아기, 이제는 46살의 미국인이 되었을 그 남자 역시, 부디 위와 같은 변수가 그의 것이기를 새삼 기도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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