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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tgrim Feb 19. 2020

섹스 이야기, 그리고 선 넘기.

영화  <기생충>의 세 가족들의 성

좋은 작품은 다양한 이야깃거리와 생각거리를 준다. 그런 면에서 영화 <기생충>은 근래 보기 어려운 대표적인 좋은 작품임에는 틀림없을 듯하다. 늘 즐겨 읽는 정지우 작가님께서 오늘 올리신 영화 기생충에 대한 포스팅을 보다가, 역시 다양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다는 독자(관객, 향유자)로서의 즐거움을 다시금 느낀다.

정 작가님은 영화 <기생충>에서 이미지로 연출된 “부부의 섹스”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면서, “기택이 박사장에게 아내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박사장이 당황한 것은 실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으로 읽으셨다고 한다. 이에 나를 포함한 몇몇의 여성들이 “오히려 박사장이 아내를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서로 다른 재미있는 반론을 제기했다. 남녀의 차이일지, 해석의 관점 차이일지, 주어진 정보의 차이인지 이 또한 다르겠지만, 역시 흥미롭고 재미있는 대목이라 여긴다. (물론 정 작가님의 생각에도 공감한다.)


1. 박사장은 아내를 사랑하는가?

이 질문에 각자의 대답이 어떨지 생각해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
우선, 나는 박사장이 ‘나름대로’ 아내를 사랑한다고 해석한다. 다만, 기택이 박사장을 백미러로 보면서 “그, 아내를 사랑하시죠?”라고 물었을 때 박사장의 떨떠름한 표정은 “어라? 이 사람 선을 넘는건가?”라는 의심의 표정이라고 보았던 것.

기택의 이 질문은 "…내가 비록 재력과 학력에서는 박사장 너하고 맞먹을 게 없다만, 너 나만큼 가족 사랑 그런 거 있냐? 너 사실 아내 사랑하지 않지? 내가 이건 너보다 낫지?”와 같은 뉘앙스로 볼 수도 있었다.

쉬운 예를 들자면, 내가 페북에 나의 옛날 첫사랑 추억담에 쓰거나 남편과 툭탁거린 사소한 이야기를 썼는데 어떤 사람이 댓글에 "그러니까 지금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네 ㅎㅎ"라는 댓글을 썼다면 나는 묘한 불쾌감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박사장이 차 안에서 아내가 살림을 잘 못한다고 투덜대긴 했지만 그것이 “자, 우리 서로 각자의 부부지정에 대해 톡 까놓고 이야기해 볼까”의 서막이 아니라 그저 ‘방백’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는 가족의 사적인 부분에 대해 본인이 먼저 이야기한 것은 맞지만 그리하여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조언이나 어떤 해결책을 요구한 발언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거기에 “거봐, 거봐, 너 문제 있네 있어”하는 느낌을 전해오면 거부감이 들 수 있다. 박사장이 유독 기택의 “아내를 사랑하시죠?”라는 질문에 거부감 역력한 표정을 지었던 것을 나는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했다.

박사장 부부가 소파에 누워 무언가를 하던 그 장면에서 나눈 대화 내용이 “여보 사랑해, 자기가 최고야”라는 식의 들큰달짝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서로의 흥분을 위해 서로가 아마도 습관적으로 해왔음직한 대화라고 여겼다. 모든 커플에게는 각자 서로에게 길들여진 어떤 사랑 방식이 있으니까.


2. 세 커플 모두 섹스를 한다

영화 <기생충>에서는 표면적으로 두 커플의 섹스는 노출되어 있다. 박사장의 경우는 직접 보여줌으로써, 문광 커플은 가득 쌓인 콘돔을 보여줌으로써. 가정부로 입주한 충숙의 엉덩이를 움켜쥐던 기택의 손동작 정도가 기택 부부의 애정을 대변해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 기택과 충숙에게도 섹스는 있었다.

현재 정확한 링크는 모르겠는데, 지난주 기생충에 대한 다양한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다음의 멘트를 들었다.

“영화 기생충에서 편집 삭제된 이야기들이 있는데 봉 감독이 후에 미국에서 기생충을 드라마로 만들 때 이를 구체적으로 다시 이야기한다고 한다. 그것은, 젊은 기사에게 해고를 통보하는 장면 / 기우와 기정이 복숭아 털 모을 때 기택과 충숙이 반지하에서 나누던 섹스신 / 사채업자에게 얻어터져 피멍 들었던 문광의 이야기…다.” 기택 부부의 섹스신을 뺀 것은 이야기 전개에서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판단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커플 (기우와 미성년자 다혜 커플 제외)은 섹스를 한다. 봉준호 감독이 처음 이 영화의 가제를 “데칼코마니”로 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 다시 말해서, 계층적 차이가 있는 세 가족 모두 ‘닮은꼴’이 있는데 가족으로서의 애정과 결속만큼은 비슷비슷하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공통점에서 발굴되는 어떤 차이점이 이 영화를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은 잔인한 영화인 것이다.


3. 어떤 섹스가 사랑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 커플의 섹스를 다르게 느낀다. 사회학적으로 다른 것은 맞다. 계급적으로(?) 보자면, 숨지 않고 열려 있는 공간에서 시계방향을 느끼는 감각적인 섹스가 자유로운 부유한 자의 섹스가 있고, 아무도 모르는 땅 속 지하 공간에서 수북한 콘돔들을 곁에 둔 섹스가 있고, 사적 공간이 없는 반지하에서 아이들 몰래 나누는 중년의 섹스가 있다. 활짝 열린 문 같은 섹스가 있고, 반쯤 열린 문 같은 섹스가 있고, 닫혀진 문과 같은 섹스가 있다.

이러한 세 가지 경우의 섹스에서 어떤 것이 사랑인가, 라는 질문 앞에 우리는 어떤 답지를 가지고 있을까? 함정은 각자가 어떤 커플에 자신을 투영하고 이입을 했느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실 어떤 섹스가 사랑이냐는 것에 대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은 결론은 불가능하다. 말을 바꾸어, 어떤 소통 관계가 “올바른 것”이냐고 하면 모두 각자의 사연만이 있을 뿐이다.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어떤 불륜 커플이 있을지라도 둘의 섹스가 사랑이냐 아니냐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쉽게 판단하고 따져 묻는다. 배 나온 중년 아저씨의 팔짱을 끼고 걷는 누가 봐도 젊고 섹시한 여인을 향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주름살 진 여성에게 다정하게 술을 따라 주는 젊은 청년을 이상하게 쳐다본다. 사실 부녀인지, 모자인지 알 길이 없는데도 말이다.

매우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이 공론화될 때, 우리는 각자의 레이더를 돌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을 때, 그래서 우리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선을 넘지 않는” 공론의 영역을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는 것.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직 사적인 영역을 공적으로 대화하는 법에 익숙하지 못한 듯하다.


4. 선을 넘지 않는 (사랑) 이야기

미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각자의 레이다를 보았다. “여자가 꼬셨으니까 남자가 그랬겠지”라는 것에서부터 “둘이 죽을 쑤던 밥을 짓던 그걸 왜 문제 삼냐?”에 이르는 극단 사이에 담겨있는 숱한 오밀조밀한 판단과 평가가 있다. 엉뚱한 사례가 되겠지만, 이 페북 안에서도 각자의 레이더를 숱하게 목격했다. 언젠가 어떤 댓글에서 “페북을 하는 유부녀, 유부남은 사실 다 섹스리스일걸”이라는 말에 한창 웃었던 적이 있다. 각자의 레이더는 그렇게 드러난다.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 페북인들이 이따금 옛사랑에 대한 옛 추억에 대해 두런두런 수다를 떨거나 혹여 ‘아, 사랑하고 싶다’는 시적인 표현 머금은 포스팅들에는 이따금 “선을 넘고 들어오는” 댓글들도 눈에 띈다. 유부녀인 거 아는데 어 너 왜 이런 추억을 되뇌이지? 어 너 왜 그런 말을 하지? 어 너 지금 욕구불만인 거야? 하며 금을 밟고 선을 넘어오고 있는지도 모르는 무심한 댓글들이 있다.

어떤 말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말을 할 때 그것을 제시하는 방법, 매너에 대한 이야기다. 타인의 사적 감정을 풀어낸 글에 우리는 쉽게 타인을 자기화하면서 이입하고 거기에 훅 동질화해버린다. 그랬기 때문에 영화 <기생충>을 보고 어떤 이들은 불쾌감과 심지어 구토감까지 느끼는 것이다. 그저 영화일 뿐이라도, 이 모든 것은 ‘상징적’인 것이라고 했는데도, 수용자는 그만 모든 것을 현실화 해 버리고 나니 오감이 동하고 오장육부가 힘들어진다.

타인에 대해 일정 거리를 두는 법에 익숙하지 않으면, 예술문화적 장르를 섭취하는 일도 힘들어진다. 장르 안에서 텍스트로 이미지로 표출된 모든 디테일을 자기화하는 습관은 세상의 다른 일을 받아들일 때도 비슷하게 작용한다. 정치 및 시사 보도를 다룬 뉴스의 타이틀 하나만 보고 세상 흥분하고, 누가 어쩌고 저쨌대라는 말만 들어도 어머 개새끼! 하고 바로 욕부터 날리고, 의도적으로 픽업된 뉴스 기사의 이미지 한 컷에 부들부들 분노하기도 한다. 비난과 분노, 애정과 응원이 너무 쉽게 이루어진다. 마치 어떤 부부의 모습이 담긴 한 컷 사진에 “어 그래 너희는 사랑하지 않는구나”하는 쉬운 결론 같은.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 맥락과 상황에 따라 수천수백만 가지의 경우가 있겠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세상에서 누가 누구에게 어떤 선을 어떻게 지킨다는 것을 규범화하려야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선을 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것 한 가지 정도는 분명하다.

남의 이야기를 자기화하는 일에 딱 한 템포 속도를 늦추라는 것. 이러한 신중함이 무수한 사회적 계층과 다양한 문화적 층위에 있는 상대방을 덜 다치게 하는 일임을 아는 것, 그것이 배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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