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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Mar 11. 2024

세상물정 모르는 기자

'세상물정(世上物情) 모르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대체로 순진하고 아둔하여 사리분별을 잘 못하는 사람을 한심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기자가 된 후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야말로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하고 아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현재 인공지능 전문 매체의 취재기자로 일하면서 주요 기업들을 인터뷰를 많이 한다. 이 과정에서 느끼는 어려움은 다음과 같다.


1. 인공지능에 대한 지식이 출중한 것도 아닌데 법률 인공지능, 의료 인공지능 같은 특수한 사업 분야의 생태를 이해해야 한다. 인공지능으로 만든 법률 SaaS솔루션에 대해 취재한다고 해보자. 법률 AI, 혹은 리걸(legal) AI라고 부르는 솔루션 중에도 세부적인 내용이나 주요 타깃이 다르다. 기업의 법무팀을 타깃으로 만든 솔루션도 있고, 변호사를 타깃으로 만든 솔루션도 있고, 법률 지식이 없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만든 솔루션이다.


해당 솔루션들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려면 기업 법무팀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야 하고, 변호사들은 어떻게 일처리를 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그 일을 실제로 경험할 필요는 없지만 기사 한 문장을 그럴싸하게 써낼 수 있는 정도로는 알아야 한다.


의료, 드론, 자율주행, 로봇뿐만 아니라 뷰티, 외식업, 패션업계까지 인공지능을 도입한 솔루션을 내놓았다고 보도자료를 낸다. 가끔은 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척 써야 한다. 그렇게 기사를 쓰다 보면 스스로 안다고 착각한다.


2. 나보다 똑똑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의 말을 이해해야 한다. 연구원이나 교수뿐만 아니라 기업의 대표들을 인터뷰할 일이 많다. 대체로 박사학위 소지자들이고 업계에서 다년간 경험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기삿거리'를 찾아내는 것이 쉽지 않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뭐든지 새로워 보인다. 초보 기자가 인터뷰를 진행하면 새롭고 대단해 보이는 것 투성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이미 존재하는 기술이라거나 전혀 새롭지 않은 비즈니스 모델일 때. 허탈하다. 바보가 된 기분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듣기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서 대충 넘겼는데 알고 보니 엄청 중요한 내용이었던 경우도 있다. 말하는 인터뷰이도 본인이 세계 최고인 것을 모르거나(!) 국내 기업들이 시도해 본 적 없는 비즈니스 모델일 때 그렇다. 어리벙벙하게 앉아 있다 놓친다. 허탈하다.


3. 하나의 사건이 다른 나라나 다른 기업에 미칠 영향을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실무담당자가 '다음 달에 ㅇㅇ에 대한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지나가듯 말을 했다면, 그 말을 캐치해서 ㅇㅇ에 영향을 받을 기업들을 알아내 추가 취재를 해야 하는 일도 있다.


미국의 병원에서 뭔가 새로운 솔루션을 도입할 거라고 발표했는데, 그게 국내에서 주목받는 스타트업의 솔루션과 내용이 겹치면 해당 스타트업을 추가 취재해야 한다. 기사는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의미라는 것은 결국 영향력이다.


같은 말이라도 3개월 차 신입사원의 입에서 나온 말과 30년 차 임원의 입에서 나온 말의 무게가 다르다. 그 말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파악하는 것에는 산업계가 어떻게 얽혀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을 파악하려면 경제와 정치를 알아야 한다.


다양하게 알아야 한다. 많이 알아야 한다. 전체적으로 알고 깊이 알아야 한다.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고 제일 먼저 경제 신문부터 구독했다. 그것도 종이 신문으로.

인터넷 뉴스보다 종이 신문을 봐야 중요한 뉴스가 뭔지 알 수 있다. 지면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중요한 기사에 많은 면적을 할애하고 제목도 크고 굵은 글씨로 써주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자료를 보고도 더 깊이 더 쉽게 쓰는 기자들이 있으면 가위로 잘라서 스크랩도 해놓는다. 언젠가 나도 이런 기사를 쓰겠다고 다짐하며...


요즘 누가 종이신문을 읽냐고 묻는 세상에 지하철 역에서 종이신문을 읽고 있는 30대 여자가 있다면 그게 나일지도 모른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에 신문을 읽고 경제 공부 좀 할걸…'싶지만, 늘 그렇듯 의미없이 지나가는 무수히 많은 후회 중 하나일 뿐이란 것을 안다. 스스로 바보라고 인정하면 세상에 배울 것이 많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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