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사랑의 여운
이번 여름 꿈결 같은 사랑을 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첫눈에 반해서 순식간에 서로에게 빠져드는 사랑을 했어요. 그런데 안타까운 이유로 끝나고 말았어요. 그는 지난 사랑의 상처가 남아있어서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여유가 없다더군요.
마지막 통화에서는 한여름밤의 꿈인양 서로 좋은 기억만 가지고 현실로 돌아가자는 대화를 나눴어요. 그는 함께 한 시간이 참 행복했다고 말했고, 그마저도 야속해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답니다. 뭐라고 이유를 덧붙이든 끝은 끝일 뿐이라 지나간 인연에 연연하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럼에도 핑크빛이 도는 복숭아를 손도 대지 못하고 식탁 위에 두었습니다. 복숭아는 헤어진 그가 사다 준 것입니다. 아프다고 했더니 제가 좋아하는 복숭아를 사들고 땀을 흠뻑 흘리며 왔더라고요. 달콤한 복숭아 향기도 그의 다정함도 눈물 나게 좋았어요. 어떤 비싼 선물과 유창한 사랑고백보다도 그런 정성이 여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거죠. 그 순간이 흐려질까 봐 복숭아가 물러지도록 먹지 못했어요. 함께 한 기억이 좀 더 오래 머무르길 바라서였을 거예요.
무른 복숭아로 병조림을 만들었습니다. 복숭아 향이 첨가된 홍차를 넣어서 만든 홍차 복숭아 병조림을 만들어 두었어요. 레시피도 없이 그냥 복숭아 3개의 껍질을 벗기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 물과 설탕 반 컵을 넣고 끓였습니다. 그 사이 3분 동안 진하게 우린 홍차와 레몬즙을 준비해 놓았다가 5분 정도 끓인 복숭아에 넣었어요. 열탕소독한 유리병에 복숭아를 옮겨 담고 밀봉한 채로 식혀 냉장고에 넣어뒀습니다. 그 후 한 달 정도가 지난 것 같아요.
시원한 복숭아 병조림은 달고 은은한 홍차 향이 나요. 홍차잎은 타바론의 썸머피치(Summer Peach)를 사용했어요. 홍차 잎에 복숭아와 생강 오일이 가미된 가향 홍차입니다. 뜨겁게 차로 내려 마시면 싱그러운 복숭아향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 홍차예요. 뜨거운 여름 한낮에 아이스티로 마셔도 좋은 차입니다. 홍차잎이 우러난 병조림 국물은 달고 시원한 복숭아 아이스티가 됩니다. 얼음을 넣은 잔에 부어 마셔도 좋고, 복숭아와 함께 화채처럼 떠먹어도 좋죠. 레몬즙이 들어가 상쾌한 맛이 나기 때문에 여름 디저트로 잘 어울립니다.
그가 복숭아를 사다 준 날 이 레시피를 생각했어요. 한낮의 땡볕에 더워 땀을 뻘뻘 흘리기에 제가 만들어 두었던 복숭아 병조림에 루이보스로 차를 섞어 아이스티를 만들어 주었거든요. 이런 건 처음 먹어본다며 신나서 마시는 모습이 참 좋았거든요. 그날 저녁에 썸머 피치 티를 주문했어요. 홍차를 넣은 병조림을 만들어 선물하려고 했는데, 찻잎이 배송되기도 전에 끝난 인연이 되고 말았네요.
어쩌면 가장 좋을 때 서로의 가장 좋은 모습만 보고 헤어져서 더 여운이 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시절 인연(時節因緣)이라고 '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다'라고 하지 않던가요. 적당한 때가 아닐 때 스쳐 지나간 사랑이라 생각하며 애써 잊으려고요. 그런데도 여름밤 열기가 사그라들고 바람이 선선해지는 지금도 문득 그가 생각납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함께 했다면 어떤 사랑을 했을지도 그려보고요. 복숭아 향기가 조금만 더 오래 남기를 바라요.
영화 <중경삼림>에서는 금성무가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으며 "만약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라는 대사를 남기죠. 그는 헤어진 여자친구 '메이'를 생각하며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과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모았어요. 전부 유통기한이 5월 1일까지였죠. 그리고 그는 쌓아둔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어치우며 그녀를 잊기로 합니다.
아마 저도 복숭아 병조림을 다 먹는 날에는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죠. 그런데 지금은 그 기억이 좀 더 남아있길 바라요. 처음 만났던 날, 나란히 앉은 소파에서 서로 어깨를 기댔던 날, 함께 복숭아를 먹었던 날, 밤새 통화했던 날, 헤어진 날... 만년은 너무 기니까 한 계절만 더, 복숭아 향기가 남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