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에 대한 평론, 비평가에 대한 비평
1. 케이팝 데몬 헌터스 비평과 폭삭 속았수다 비평의 시각 다루기
최근 임희윤 평론가가 '케이팝데몬헌터스'를 두고 한 발언이 논란입니다. 임 평론가는 헤럴드경제, 동아일보 등 주요 일간지에서 문화부 기자로 15년 이상 경력을 쌓아온 문화평론가이자 컨설턴트인데요. 그가 SBS 경제탈곡기에서 케·데·헌이 서사가 단순하고, K팝 산업에 종사하는 스텝들에 대한 조명이 없고, 국악적 요소가 부족해 자문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네티븐들이 그의 주장을 비판하자, 이를 엑스포츠뉴스에서 기사화하기도 했습니다.
유튜브 영상 댓글에 보면 임희윤 씨를 비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평론가의 존재 이유에 의문을 품는 사람도 많습니다. 한 댓글에는 "평론가는 생산하는 게 하나도 없는 무의미한 인간들"이란 표현도 있더군요. 작품에 대한 관점이 편협하다거나, 가르치려 드는 태도가 오만하다는 등의 비판도 이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을 관찰하다 보니 얼마 전 한겨레 21에서 '폭싹 속았수다'에 대한 평론이 화제가 됐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이 평론은 '폭싹 속았수다'가 가족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금명이 캐릭터가 입체적이지 않고, 가부장제를 주체적으로 깨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소셜미디어와 커뮤티니에서 해당 평론에 대해 공감하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졌습니다.
두 작품 모두 넷플릭스에서 글로벌 흥행으로 이어진 작품인 만큼 작품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많았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작품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글과 말이 설득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네가 사랑하는 그 작품이 별로인 이유'를 들먹이는 것도 기분이 나쁠 법한데, 설득력도 없이 가르치려 드는 태도면 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희윤 평론가가 지적한 '플랫폼 종속'에 대한 우려는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넷플릭스, 유튜브와 같은 글로벌 콘텐츠 플랫폼이 IP시장을 잠식하는 것 자체가 국내 미디어 산업에 큰 위기입니다. 케·데·헌이나 폭싹 속았수다와 같은 한국적 서사가 글로벌 흥행에 이른다고 해도 수익은 넷플릭스가 가져갈 뿐이죠. 지금이야 한국 문화가 유행한다지만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한겨레 21의 평론에서 폭싹 속았수다의 금명이가 오롯한 '개인'이 아니라 "애순과 관식의 삶에 자랑스럽게 걸린 메달인 ‘딸’로서만 존재하고 기능한다"라는 지적에도 일부 공감합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금명이는 애순이의 꿈을 대신 실현해 주는 인물로 보였습니다. 금명이는 애순이가 노래를 불렀던 육지에서, 대학을 나오고, 번듯한 사업체 대표가 됩니다. 그것은 평생 제주도에서 살며, 고등학교 중퇴에, 어촌 계장에 머무른 애순이의 삶에 대한 보상으로 보입니다. 엄마의 헌신으로 자란 딸이, 엄마가 못 다 이룬 꿈을 이뤄준다는 서사는 충분히 감동적입니다. 그런 서사를 강조하기 위해 애순이와 금명이를 한 배우가 연기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금명이의 캐릭터는 애순이의 업그레이드 버전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평론은 작품에 대한 심층적인 해석을 제공하고, 해당 산업의 구조를 잘 이해함으로써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두 평론 모두 성공한 작품의 성공요인을 분석하지 않고 비판만 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성공한 IP의 성공요인을 분석하는 것 또한 작품에 대한 이해와 산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으니까요.
'케·데·헌'과 '폭싹 속았수다'의 글로벌 흥행 요인은 보편적 서사와 주제, 스토리텔링에서의 선택과 집중, 신선한 컨셉, 완성도 높은 영상과 음악에 있습니다.
우선, 두 작품 모두 익숙한 서사와 주제의식을 보여줍니다. 케·데·헌의 경우, 루미의 성장서사를 중심으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줍니다. 특히 능력 있는 헌터이자, 아이돌인 루미가 자신의 비밀을 숨기면서 주눅 들었지만 사랑과 우정으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다는 서사는 '미녀와 야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폭싹 속았수다'는 남녀 간의 사랑, 가족 사랑을 다룹니다. 애순-관식 커플의 절절한 사랑과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 가족 사랑과 가족만큼 끈끈한 이웃들과의 정은 한국인이 아니어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런 가족적 정서는 개인주의적 문화 속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감정적 노스탤지어(향수)를 자극합니다. 이처럼 서사, 감정, 주제 등이 친숙하기 때문에 한국 문화를 다룬 두 작품이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서사를 전하는 데 있어서도 선택과 집중을 보여줍니다. 핵심 서사를 제외한 다른 이야기는 전부 지우는 과감한 선택을 했죠. 특히 '폭싹 속았수다'는 광례-애순-금명이로 이어지는 모녀 3대의 서사를 보여줍니다. 이 과정에서 88 올림픽이나 IMF 등은 시대적 배경으로만 다룹니다. '케·데·헌' 또한 3시간 분량을 1시간 30분으로 줄이면서 많은 부분을 덜어냈다고 합니다. 아육대처럼 한국 아이돌 특징을 보여주는 소재는 전부 삭제하고 루미가 각성 전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가는 장면도 삭제했죠. 이렇게 핵심 서사만 남긴 덕에 속도감 있게 전개되고 주제도 선명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서사와 메시지는 친숙하지만 배경과 컨셉은 신선합니다. 이것이 작품의 매력으로 작용했습니다. '폭싹 속았수다'의 경우, 1960년부터 현재까지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시대적 배경을 보여줍니다. 외국인들에게 낯선 문화와 비주얼이 신선하게 보였을 겁니다. 지역적 특색을 전부 이해하지 못해도 서사가 보편적이라면 감정에 몰입할 수 있죠. 일례로 유튜브에서 외국인들의 반응을 보면 해녀들의 '숨병'이나 '굿'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감정에 몰입해 화를 내거나 슬퍼하는 것을 볼 수 있죠.
'케·데·헌'은 K팝과 퇴마라는 독특한 컨셉이 화려한 비주얼로 재탄생했습니다. 한국음식, 저승사자, 무당 등의 소재는 낯설지만 주인공 루미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저승사자들이 보이밴드가 되어 사람들의 영혼을 빼앗는다는 설정이 매력적인 빌런 캐릭터를 만들어 줬죠. 또 조선시대 민화를 모티브로 한 까치와 호랑이 캐릭터가 엄청난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이런 컨셉들은 완성도 높은 영상과 음악으로 이어집니다. '폭싹 속았수다'는 총 600억 원의 제작비를 투입해 제주도 앞바다를 세트장으로 재현했습니다.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는 소품과 의상, 바다와 해녀들의 삶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적 영상미도 뛰어납니다. '케·데·헌'은 약 5년 동안 1억 달러(한화 약 1300억 원)에 달하는 제작비를 투입했다고 추정됩니다. 서울의 풍경, 한국음식, K팝 가수들의 화려한 무대 등 애니메이션 완성도가 높습니다. 또 인기 작곡가들이 대거 참여한 OST가 모두 음원차트 상위권에 오를 만큼 높은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이외에도 '폭싹 속았수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을 성공요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연과 조연 모두 빠짐없이 매력적인 캐릭터를 보여줬습니다. 광례를 연기한 배우 염혜란은 제4회 청룡시리즈어워즈에서 여우조연상, 제61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작품상을 포함한 4관왕을 차지했습니다. '케·데·헌'의 경우에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매기 강 감독의 이야기나, 10년간 SM 연습생으로 데뷔에는 실패했지만 작곡가로 화려하게 비상한 이재의 스토리 등이 시청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줬죠.
3. 두 평론가는 왜 대중의 공감을 얻는 것에 실패했는가
임희윤 평론가나 한겨레 21은 대중의 공감을 얻은 작품들에 대해 '아쉬운 점'만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설득력 있게 풀어내지 못했습니다. 물론, 많은 콘텐츠들이 두 작품의 성공요인을 분석했을 테니 다른 시각을 전하는 게 옳은 선택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해석과 근거가 시청자와 독자의 시야를 넓힐 수 있을 만큼 치밀하지 못했습니다.
임 평론가는 국악 요소, K팝 산업의 어두운 면 등이 없어 아쉽다고 의견을 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핵심 주제나 '케·데·헌'의 핵심 주제나 소재가 아닙니다. 이를 조명하고 싶다면 별도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것이 효과적이었을 겁니다. '케·데·헌'의 인기에 힘입어 넷플릭스의 국악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제작을 요청해 볼 수는 있겠네요. 혹은 스핀오프 작으로 데몬헌터스의 역사를 다루며 전통음악을 조명해 ‘계승’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할 수 있을 겁니다.
한겨레 21은 가족주의 서사를 확장하지 못했다고 비판했지만, 작품 자체로는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선택이었을 거라고 봅니다. 앞서 말했듯 모녀 3대에 걸친 서사에 다른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면 작품이 산만해질 수 있습니다.
더불어 가부장제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관식이가 시부모의 괴롭힘에서 애순이를 구해준 것뿐만 아니라, 가족을 위해 희생한 점도 돌아봐야 합니다. 가장의 헌신을 남녀 권력구조로 다룬다면 작품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사랑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애순, 금명이 남성 파트너의 지지 덕에 자아실현을 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대 다른 인물들이 남성 파트너에게 학대받거나(학씨 부인) 이용당한 것(충섭이 전여친)과 달리, 애순이와 금명이는 원하던 시인과 사업 대표가 됩니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관식이의 진정한 자아실현이나 그림을 그리던 금명이 남편의 꿈은 다뤄지지 않았죠. 마지막으로 광례가 환생해 출판사 대표로 원하던 삶을 산다는 연출 자체가 여성의 자아실현과 해방을 보여줍니다. 즉, '폭싹 속았수다'는 철저하게 여성의 삶과 성취를 그린 작품이죠.
4. 잘 쓴 평론이란 무엇일까
대중문화 평론은 대체로 인기작, 화제작에 대해서 비평이 이뤄입니다. 이미 작품에 대한 긍정적인 담론이 형성된 상황이죠. 이때 평론가는 다른 시각을 제시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판적인 시각이나 작품 외 요소에 집중해 비평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비판적 시각을 가질 때에는 설득력 있게 풀어내야 하고, 작품 외 요소를 다룰 때에는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설득력 있는 해석과 객관적인 근거, 인용 등으로 뒷받침되면 색다른 시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독단적인 의견, 개인적인 취향을 드러내는 데 그칠 수밖에 없죠. 임 평론가는 K팝 산업에 대한 문제의식을 작품에 책임을 떠넘기면서 반발심을 불렀고, 한겨레 21은 작품을 젠더 이슈로 해석하면서 아쉬운 평론이 됐습니다.
5. 평론가의 사회적 역할과 존재이유
취향이 기준이 되는 시대. 누구나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자신의 의견을 남길 수 있습니다. 소셜미디어, 블로그, 유튜브, 댓글창으로 자신의 호불호를 밝힐 수 있죠. 그렇기에 평론가가 자신의 취향을 기준으로 대중을 가르치려 들면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댓글로 불만을 쏟아내는 리뷰어와 다를바 없어보이거든요. 이에 많은 사람들이 평론가의 쓸모를 의심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취향을 제시할 수 있는 시대, 평론가의 권위는 사라졌고 비아냥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문화산업 발전을 위해 평론가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평론가는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언어를 제시하고, 감상자들의 감정을 대신 언어화해 줍니다. 어떤 작품을 보고 왜 좋은지, 왜 싫은지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을 느낀 적 있으시죠? 그럴 때 평론가들은 우리 대신 좋은 이유를 적확한 단어로 제시하고, 싫은 작품을 대신 신랄하게 비판해 줍니다. 그때 느끼는 대리만족이 분명히 있죠. 독자들에게 다른 관점을 제시해 사고를 확장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비단 문화산업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평론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음악, 음식, 산업, 기업, 기술, 예술 등에 대해 합리적인 비평이 필요합니다. 이 비평이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해 주고, 맥락을 분석해 주고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합니다. 또 작품의 성공/실패 요인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제시해 산업의 발전 방향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관심 없던 사람에게 대상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또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담론을 제기해 구조적인 변화를 이끌 수 있죠.
영화 평론가 이후경은 “좋은 평론은 의무에서 출발하지 않고, 미지에서 헤매며 영화와 함께 살아 움직이려는 시도”라고 말합니다. 틀을 주입하는 해설이 아니라, 감정과 의미를 함께 추적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악평론가 차우진은 앞으로 평론가의 역할은 '안내자'라고 말합니다. "대중이 효율적으로 여행할 수 있도록 돕는 취향의 길라잡이"라는 표현을 썼죠.
그러나 이는 알고리즘이 훨씬 더 잘하는 일입니다. 플랫폼은 사용자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취향을 분석하고, 정교한 추천 알고리즘을 완성합니다. 이제 문화예술에 대한 사회적 담론보다 개인의 호불호가 더 조명받는 시대입니다. 이에 맞춰 평론가의 역할도 달라져야 합니다.
전통적인 평론가는 좋은 것을 선별하고 대중에게 기준을 제시했다면, 이제는 공감을 구조화하고 감정의 언어를 해석하며, 서로 취향을 연결짓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이 인간 평론가들이 만들어낸 텍스트를 AI가 학습하게 되겠죠. 평론가들의 밥줄은 점점 약해질 겁니다. 직업으로서 평론가는 사라질 수도 있겠어요. 그때가 되면 평론은 직업이 아니라 삶의 방식, 능력이 아니라 관점으로 남을지도 모릅니다. 나만의 관점으로 평론을 하고 같은 취향을 가진 이들과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능력. 이게 새 시대 평론가에게 요구되는 능력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