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풀문 Mar 31. 2023

아빠라는 흉터

상처를 쓰기

학교를 마친 후 발걸음은 집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마음은 집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면 정면으로 보이는 불 꺼진 안방 한쪽에 아빠의 이부자리가 보일 것이다. 숨죽이고 들어가 다른 가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겠지. 힘없는 손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아빠의 이부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집은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방안에는 이부자리 대신 메모가 한 장 있었다. 아빠가 병원으로 실려갔다고 엄마가 급히 휘갈겨 쓰고 간 종이에 눈물이 뚝 떨어졌다. 교복을 입은 채로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차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술에 취한 아빠 모습을 떠올렸다.   

   

아빠가 술을 많이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몇 시든 상관없이 잠든 삼 남매를 차례로 깨워 무릎을 꿀리고 앉혔다. 졸린 눈을 비비며 아빠의 서울상경 스토리를 듣고 또 들었다. 시골 땅을 팔아 누나를 믿고 서울로 왔지만 공부도 시켜주지 않고 누나에게 홀대당하고 돈도 나눠 받지 못해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아빠는 나쁜 년이라고 누나를 욕하다가 갑자기 너도 똑같은 년이라며 엄마에게 화살을 돌렸다. 이유 없이 당하는 엄마는 잔뜩 주름진 표정으로 울먹거릴 뿐이었다.     


중학생이었던 난 참지 못하고 아빠에게 그만 좀 하시라고 대들었다. 아빠는 초점 잃은 눈빛으로 나를 욕하며 손을 치켜들었고 엄마는 아빠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엄마는 나에게 그만하고 나가라고 했지만 난 더 악다구니 쳤다. 그러다 아빠 손에 잡히는 물건들이 던져지고 깨지면 언니와 남동생도 겁먹은 표정으로 울음이 터졌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면 어김없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앓아누워 계셨다.     

 

아빠는 병원에 실려간 후 간경화를 진단받았고 얼굴이 말라갔다. 그래도 여전히 소주를 드셨고 취하는 날이면 아빠대신 돈벌이를 나갔다 돌아온 엄마에게 욕을 하거나 밖에서 다른 짓을 한다며 의심했다. 엄마는 여전히 묵묵한 피해자였고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엄마는 어떤 생각으로 아빠를 버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언니와 나는 법적으로 성인만 되면 함께 집을 벗어날 희망만 가지고 그 시간들을 버티었다. 점점 풍선에 바람 빠지듯 기력이 줄어드는 아빠였지만 그나마 나는 살 것 같았다. 중환자실을 몇 번 오가는 동안 곧 다가올 아빠의 그날에 무뎌져갔다.           


우리가 살던 집은 복도식 아파트였다. 드문드문 살림을 복도에 내어두고 사는 집도 있었는데 그날 우리 집 복도에는 김장을 앞두고 배추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빠가 혼자 계셨다. 수능 준비한다고 늦게 도착한 나에게 공부도 안 하는 년이 늦게 다닌다며 싫은 소리를 했다. 참견하지 마시라고였는지 짜증 난다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마디 내뱉었다. 그게 시발점이 되어 아빠는 문 앞까지 쫒아나와 배추를 던지며 화풀이를 했다. 던져진 배추가 복도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린 엄마는 바닥에 풀어헤쳐진 배추만큼이나 너덜너덜해진 표정이었다.    

  

며칠뒤 엄마가 다녀온 점집 무당이 아빠와 내가 한집에 살면 좋지 않다는 소리를 했다며 얼굴도 잘 모르는 엄마의 이종사촌의 와이프가 운영하는 스포츠센터에 취직을 시켜버렸다. 갑자기 기숙사로 보내졌고 수능은 바로 포기해 버렸다. 언니와 나의 희망이었던 집을 탈출하는 일은 난 점집 무당 덕분에 언니는 아빠를 벗어나고 싶어 23살에 결혼을 선택하면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언니의 결혼식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일요일 아침 나와 언니는 우리가 살던 집에서 함께 나오는 길이었다. 현관을 나서며 뒤돌아 인사를 하다 아빠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날 아빠의 눈동자는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고 평소와는 다르게 힘이 없어 보였다.    

 

그날 오후 다급한 목소리의 옆집 아주머니 전화를 받았고 아침에 보았던 아빠의 눈빛이 떠올랐다. 아침에 헤어졌던 우리 가족은 병원 중환자실에서 다시 만났다. 아빠는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였고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아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거라는 침묵이 흘렀다. 언니는 벌써 눈이 부을 정도로 울어대는데 난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아빠옆을 초조하게 지켰다. 서너 시간이 흘렀고 아빠가 그토록 미워했던 고모가 도착했다.


살아생전에 만나지 않던 사람들이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형식적 만남을 치르는 것 외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도 우리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복도에 있던 우리를 다급히 들어오라 했다. 하필이면 고모에게 자리를 내어준 사이 아빠가 떠났다. 마지막 순간을 뺐어갔다는 생각에 나 역시 고모가 미웠다.    

 

처음 마주한 죽음이 실감 나지 않아 멍하게 아빠의 영정사진을 찾으러 집에 다녀왔고 배가 고파 장례식장에서 육개장도 먹었다. 엄마는 손님을 치르느라 바삐 다녔고 언니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퉁퉁 부은 눈으로 밥도 안 먹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만 울고 밥 먹으라고 육개장 그릇을 들이밀었지만 마치 자기가 남편을 잃은 것 마냥 슬퍼하는데만 온 힘을 쓰고 있었다. 먹고 힘내야 장례도 치른다고 엄마 힘들게 하지 말고 밥을 먹으라니까 보다 못한 엄마가 와서 언니 등짝을 때렸다. 네가 왜 더 청승이냐고 빨리 밥을 먹으라고 했다. 엄마는 아빠에게 당할 때만큼 답답하지 않아 보였다.
 

죽은 사람을 찾아오는 발길은 살아있을 때보다 북적였다. 아주 어릴 때 옆집 살던 택시아저씨, 아빠가 카센터 할 때 신세 많이 졌다는 택시 아저씨, 나를 엄청 아는 척 하지만 희미하게 기억나는 어떤 아저씨들... 아빠가 살아있을 때 좋은 사람이었다는데 나는 그 아저씨들이 아니라서 아빠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엄마도 그 아저씨들 말에 수긍하는 듯했다. 엄마도 아빠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보다.     


내가 눈물이 터진 것은 장례식 마지막날 아빠의 사진을 들고 살던 집을 돌아볼 때였다. 추운 겨울 하얀 상복을 입고 살던 아파트를 돌아 나오는데 답답하고 좁은 아파트 웅크린 이불속에 아빠모습이 남아있었다. 술기운 속으로 숨어들고 싶어 했던 것은 아무도 품어주지 않는 추웠던 서울 변두리 어딘가에 살던 어리숙한 청년이었던 것 같다. 가족을 믿고 이주한 낯선 곳에서 춥고 서글펐던 밤을 지새우면서 술을 마시지 않았을까. 누나를 원망하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안으로 삼키다 증오가 아빠를 삼켜버린 것은 아닐까.      


아빠는 원가족과 사회에 돌봄 받지 못했고 나 역시 원가족이 아쉬웠다. 집, 가족이라는 것이 안전 치도 안락하지도 않은 벗어버리고 싶은 올가미 같았다.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마음껏 미워할 수도 없었고 미워하는 마음조차 죄책감으로 돌아왔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동안 아빠는 떠났고 엄마의 한숨도 줄어들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우리는 아물지 않은 흉터를 보듬듯 가끔 그 시절을 이야기한다. 아빠는 허공에 소리치고 술기운 속으로 숨으려 했지만 난 나의 상처를 상처로만 두지 않으려고 한다. 언제든 다시 덧나더라도 아빠라는 흉터를 오늘도 어루만진다.        

  


작가의 이전글 한부모에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