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둘과 복닥거리는 하루를 보내고 나면 종일 라디도 채널을 두 개 틀어두고 들은 것처럼 정신이 혼미할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사찰의 고요함이 너무 그립다. 그러다 밤이 되면 갈 수 없는 사찰 대신 영화를 찾는다. 혼자 조용히 영화 한 편만 보아도 내일 두 개의 채널을 들어줄 에너지가 생긴다. 영화를 고르는 것도 사실 일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은 품이 많이 들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순위에서 밀리기 일쑤이다 보니 영화 리스트보다는 동화책 리스트가 늘 메모장을 차지한다. 오늘의 영화를 검색하다가 세 자매의 포스터를 보고 포토리뷰에 각각 다른 세 자매의 모습이 궁금해서 이 영화를 보기로 했다.
첫 장면에 꼬맹이 자매 둘이 어둑한 저녁 동네 골목길을 내복 차림으로 손을 잡고 다급하게 동네 슈퍼로 뛰어간다. 난 이 장면만 보고도 알아차렸다. 이 아이들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가족들을 괴롭히고 있고 아이들은 집에서 빠져나와 도움을 요청하러 가는 것이 아닐까. 나의 경험이 오버랩되는 장면이었다.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는 힘든 시간을 살아낸 한이 많은 분이었다. 평소에는 정도 많았으나 술에 의지한 아버지는 평소에 참았던 울분을 취중에 쏟아내곤 하셨는데 그 대상이 가족이었다. 엄마는 대항하지 못했고 나와 언니는 도와줄 사람을 찾곤 했다. 더 어린 동생은 그냥 울고 있었다. 그러니 저 아이들이 뛰는 모습만 보아도 나는 짐작하기 어렵지가 않았다. 그렇게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낸 세 자매가 성인이 되어 각각의 다른 삶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그중 둘째인 문소리는 세 자매 중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가정을 이뤘다. 넓은 아파트에 대학교수 남편이 있고 아들과 딸이 있고 교회 성가대의 지휘자를 한다. 항상 품위 있는 단정한 모습과 말투로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대한다. 완벽해 보이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결혼 생활중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속은 썩어가도 냄새라도 풍길까 봐 조심했다. 가족이나 주변에서 안다고 해도 결국은 내 얼굴에 침 뱉기 아니겠는가 싶어서 말도 꺼낼 수가 없었고 나에게는 내편이 없었다. 문소리의 완벽해 보이던 일상에 금이 가는 사건이 생긴다. 대학교수인 남편과 남편의 제자인 성가대의 여대생이 교회의 어느 으슥한 곳에서 스킨십을 나누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의심했던 일들을 눈으로 확인한 문소리는 부흥회가 열리던 밤에 여대생이 자는 곳으로 가서 이불을 덮으라 하고 발로 얼굴을 밟아준다. 여대생에게 선물했던 반지를 문소리가 안방 화장대에 올려두었다. 교수 남편은 반지를 보고 화를 내고 문소리의 뺨을 치며 욕을 한다. 그리고 며칠 후 남편은 집을 나가 있겠다는 메모를 남기고 짐을 싸서 나간다. 문소리는 남편을 만나서 이야기한다. 교수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는 살림을 꾸려나가며 시댁 대소사를 도맡아 도왔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이혼할 주제도 안 되는 “발정 난 개새끼”라고.
내가 차마 입에 담지 못했던 그 말을 속시원히 해준 그녀가 너무 멋졌다. 난 기회가 있을 때 전 남편에게 그 말을 했어야 했다. 아이들 얼굴이 밟혀서 아이들 아빠였다는 사실이 걸려서 말이 목구멍에서 넘어오지를 못했다. 그런데 문소리는 천박하지 않게 그 말을 날렸고 돌아서면서 “애들한테 전화나 자주 해라” 하고 그의 주제를 파악하게 해 줬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영화를 통해 듣고 나니 이건 꼭 한번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전 남편과 정리 중인 일 때문에 통화할 일이 생겼다. 기회가 되면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을 할 찬스가 왔다. 난 소심하게도 그 멋진 문장에서 ‘개’는 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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