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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문 Sep 30. 2021

추석 달이 말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틈만 나면 서울을 벗어나고 싶었고 시골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가슴을 트이게 해주는 마법 같았다. 2년 전 이혼소송을 시작하고 제주도로 이사 왔을 때 저녁에 마당을 오가다가 발걸음을 멈추는 일이 많았다. 매일 새 옷을 갈아입는 여인의 화려한 치맛자락 같은 석양과 너무나 선명히 모습을 드러내어 빤히 쳐다보게 만드는 달을 볼 수 있어서 하루하루가 치유의 시간이었다. 달을 자주 바라보았다. 곧 사라져 버릴 듯해도 숨은 달그림자를 조용히 받치고 있는 달도 아이 품은 어미의 배처럼 불러오는 달도 이제 돌아왔구나 싶은 반가운 보름달도 항상 나의 시선을 빼앗았다. 어떤 모양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달은 38만 4천 킬로미터 떨어진 나에게 ‘너도 빛나는 사람이야’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달이 좋았다.

이번엔 추석 보름달을 기다리고 있었다. 70이 넘은 엄마는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더 건강에 예민해지셨다. 적지 않은 연세에 걱정이 많으신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다. 그런 엄마가 난소낭종 진단을 받고 추석 일주일 전 수술이 예정되어 있었다. 전신마취를 하는 수술이라서 걱정은 되었지만 제주에 살고 있으니 아이들을 다 데리고 가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가까이 사는 언니가 도맡아 수고를 해주었다. 이번 추석 때 언니는 조카들과 제주도 우리 집으로 놀러 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엄마는 이틀 입원 후 문제없이 퇴원을 하셨지만 추석 차례상을 차리기는 무리였다. 마침 언니의 권유로 이번엔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귀를 의심할 만한 사건이었다. 엄마는 시집와서 꽤 많았던 제사상을 혼자 준비하셨다. 제발 간단히 준비하자고 해도 제사상 음식이 간단치가 않았다. 형편이 힘들었던 시절도 몸이 아프던 시절도 엄마는 자신을 돌보기보다 혼자 집안일을 감당하셨다. 같은 여자로서 엄마의 고집스러운 희생에 손뼉 치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도 줄은 것이 지금도 일 년에 다섯 번은 상을 차리신다. 무릎 수술도 받으셔서 오래 서있는 것도 힘드신데 난소 수술까지 한 후라 너무나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더 이상 자신을 희생하지 않기를 늘 바랬는데 이번 추석은 그 바람이 이루어졌다. 엄마도 이번 추석은 자신의 몸을 돌보고 아들 집으로 가서 식사를 하시겠다고 하셨다. 엄마가 못하면 대신했어야 할 언니에게도 며느리에게도 추석 차례가 짐이 되지 않았고 엄마와 아들은 서울에서 언니와 나는 제주도에서 각자이지만 모두가 편안한 추석이 되었다.

언니가 이번 추석에 제주에 온다는 소식에 가보고 싶었던 책방 시인 낭독회가 떠올랐다. 혼자 시간이 거의 없이 지낸 터라 아이들 봐줄 어른은 너무나 반가웠다. 언니에게 몇 시간 다녀올 수 있는지 부탁을 해보니

“나 있을 때 하고 싶은 거 해“

라는 쿨한 대답을 듣고 신이 나서 한라산 등반 예약까지 했다. 전 남편이 있을 때는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헬스장도 갈 수 없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그나마 화장실 갔을 때인데 그때도 밖에서 ‘여보’ 나 ‘엄마’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나만의 시간이 허락되지 않은 것을 불평하지도 않았다. 아이 키우는 엄마가 자기 시간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사치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내가 보고 배운 엄마는 양보하고 희생하는 힘들어도 참는 엄마였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르고 살았다.

이제는 ‘나’를 사랑하고 아이들을 품을 수 있기에 떳떳하게 나만의 하루를 살 수 있다. 온전히 나로 책방을 가고 시인의 시 낭독을 듣는 시간을 누리고 한라산을 갈 수 있다. 12년 전 백록담을 갔을 때보다 숨도 차지 않고 힘들지도 않게 정상에 도착했다. 건강히 잘살고 있는 나를 백록담에서 만나고 내려왔다. 사치가 아닌 너무도 당연한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는 바람도 이루어졌다.

결혼 후 첫 명절 시댁을 다녀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10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화장실을 한번 가려해도 전쟁통에 난장판이었던 끔찍한 경험을 했다. 그 이후로 명절에 이동을 할 때면 새벽 2시에 늦은 건지 이른 건지 애매한 어제도 오늘도 아닌 시간에 집을 나서야 했다. 힘들게 도착한 시댁에서는 전남편은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고 어린아이들을 건사하며 음식 준비를 도왔다. 운전하는 사람도 옆에 탄 사람도 모두 피곤에 절어서 집에 돌아오고 나면 운전한 사람은 냉큼 들어가서 잠을 자지만 다 먹지도 못하는데 주는 데로 받아와야 하는 음식들을 정리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항상 나의 몫이었다. 그래도 불만 없이 주어진 데로 살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은 기억은 전혀 아니다. 이제는 친정에 못 가는 미안함도 없고 시댁에서 도우미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내 맘 데로의 추석이 썩 마음에 든다. 희생의 아이콘이었던 엄마도 지난 10년 동안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소진시키기만 했던 나도 곧 빛을 잃어버릴 가녀린 달빛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점점 달이 차오르듯 엄마의 삶에도 나의 삶에도 빛이 채워지고 있는 것 같다. 여러 가지 바람을 미리 선물해준 듯한 이번 추석에 뜬달도 여전히 나에게 말해준다. ‘너는 빛나는 사람이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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