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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문 Oct 03. 2021

썅년인 듯 아닌 듯

'잘 헤어짐'상

제목부터 확 끌리는 ‘년의 미학’을 읽었다. 아마 내가 싱글 맘이 되기 이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여기 나오는 썅년에게 지금처럼 공감하지 않았을 것 같다. 나 역시도 날 때부터 장착된 남존여비의 안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몸가짐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늘 배웠기에 때로는 잘못한 것이 내가 아닌데도 속 시원히 따지지 못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답답한 안경을 깨 부숴버리기도 했었다. 쌍년인지 쌍년이 아닌지 모를 시간을 살았다.
  30대 초반 의류 회사에서 근무할 때 지방에서 올라온 대리점 사장님들과 간담회가 있었다. 영업부에 근무하던 나는 내 담당 대리점 사장님들과 차례로 미팅을 마치고 저녁 회식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매장에 따라 매출 차이가 많이 나는데 점주들은 자연스럽게 매출액에 따라 그들끼리 서열을 매겼다. 매장이 가장 크고 매출이 많이 나오는 점주는 본사 직원을 자기 직원 다루듯 했다. 주요 고객 층이 유흥업소 종사자라는 그 점주는 염주처럼 두꺼운 순금 목걸이에 새하얀 신발에 골프복을 입고 한국 누아르 영화에 나올법한 동네 건달 같았다. 그렇다고 모든 점주가 그 지경은 아니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 당시 유행하던 노래방으로 2차를 가게 되었는데 지방 점주들이 갈 때까지 먼저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점주와 친분을 쌓아두어야 근무하기가 수월하기도 했다. 내 차례가 되어서 노래를 마치고 나니 그 누아르 점주가 내 앞에서 두 손으로 하이파이브를 기다리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하이파이브에 응해 주렸는데 점주의 두 손은 내 손바닥이 아닌 내 가슴에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 자리에는 본사 사장, 이사, 영업부장, 대리, 여러 명의 점주들이 있었고 그걸 본 사람도 분명 있었을 텐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초 스피드로 그 순간이 지나가 버렸다. 아무 대응도 할 생각조차도 못하고 자연스럽게 각자 하던 노래와 그 분위기를 이어갔다.
내가 불쾌한 내색을 하면 어색해질 것이고 나만 가만히 있으면 다들 아무 일 없는 것에 동의하겠다는 암묵적 사인에 나도 그만 동의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은 무서워서 피한 게 아니고 더러워서 피했다고 나를 위로했지만 생각할수록 욕은 나왔다.
  친구들 두 명과 퇴근 시간에 지하철로 이동 중이었다. 동대문 역에 곧 내릴 참이었다. 다음 역에 내리려고 문 앞에 서있는데 유리에 비치는 모습을 보니 내 바로 뒤에 젊은 남자가 서있었고 그 뒤에 친구 둘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리만 쳐다보며 내리기를 기다리는데 어떤 손이 내 엉덩이를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떼었다. 순식간에 뒤에 있던 남자의 오른쪽 얼굴에 주먹을 날리며 엄청 큰 목소리로

“야 이 미친 새끼야!” 하고 소리쳤다.
한 대 맞은 남자는 저항하지 않고 맞은 얼굴을 돌렸다.
뒤에서 어리둥절한 친구들이 왜 그러냐고 물었고 저 새끼가 내 엉덩이를 만졌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지하철 한 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난 그놈의 멱살을 움켜 잡았다.
“너 경찰서 가자!”

하는 순간 역에 도착하여 문이 양쪽으로 열리자 그놈은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우린 하이힐을 신었지만 운동화보다 더 빨리 뛰어 나가며

“도둑 잡아라”하고 외쳤다.
잡히면 죽을 것 같았는지 그놈은 지하철 계단을 두 개 세 개씩 성큼성큼 올라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정말 잡았으면 경찰서로 끌고 가고 싶었지만 놓쳐서 허무했다.
난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했고 후련했다. 이후에도 좌석 버스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따지고 들면서 그놈을 붙잡고 내리려는데 문 앞까지 끌려 나오던 놈이 우리가 내리고 나니 기사 옆에 달린 쇠 봉에 딱 붙어 안 내려서 경찰서에 못 데리고 갔다. 그때는 친구와 친구의 남자 친구가 함께 있었는데 우리만 내리고 차가 출발하자 그 남자 친구는 그 남자가 진짜 따라 내릴까 봐 무서웠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그놈도 찌질해 보였다.
가정을 이루고 같이 살던 전남편은

“그 옷 입으면 음.. 뭐랄까 좀 싼 티가 난다고 해야 하나”
“그거 진짜 안 어울린다 갈아입어.”
“난 당신이 그 옷은 버렸으면 좋겠는데”
“그 바지는 진짜 아니다”
“이제 가슴이 거의 없네”
“여자가 서방이 (섹스)해주면 좋은 줄 알아야지”
천천히 스며드는 말들에 길들여질 뻔했다. 정신이 번쩍 났다. 여성을 자신의 노리개쯤으로 착각하는 남성과 아이를 낳고 한 공간에서 지냈던 나에게 ‘잘 헤어짐‘ 상을 주고 싶다. 이런 남성은 치명적 단점을 하나만 가지고 있지 않다. 종합병원이다. 뭐 하나 성한 곳이 없다고 보면 된다. 저녁때 인터넷을 보니 김기덕 감독이 라트비아라는 나라에서 코로나 합병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자신의 SNS에 ‘한국 영화계에 채울 수 없는 크나 큰 손실이자 슬픔이다’라고 했다. 종합병동 같은 남성들이 저런 지위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고 화가 난다. 이게 또 무슨 대단한 기사라고 여기저기 기사에 뜨는 건지 모르겠다. 참회는커녕 가는 길도 요란하다.
시소 타듯 쌍년인 듯 아닌 듯 살아온 나는 이제 쌍년에 거의 가까워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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