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나를 기억해준 이에게 대충 잘 지낸다고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내 근황을 얘기했다.
“선생님과 수업받던 시기에 별거 중이었어요. 지금은 이혼 소송 중입니다. 수업 끝난 후에 아이들과 제주로 와서 1년 살고 서울 집 정리하느라고 올라갔다가 양평에서 1년 살았어요. 제주는 올 3월에 다시 왔고요. 집에 별채가 있어요. 숙소도 운영하고 하고 싶은 일하면서 아이들이랑 잘 지냅니다.”
생각지도 못했을 이혼 이야기에 잠시의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걱정과 격려가 뒤섞인 말을 듣고 통화를 막 끊으려는데 멀어진 음성이 들려온다.
“에휴…쯧… 어쩌면 좋아….”
그녀의 걱정은 전해지지만 그녀의 걱정에 비하면 난 지금 너무 평온하다.
얼마 전 마당 잔디공사를 하면서 일해 주시는 사장님이 남편도 함께 이주했느냐고 물었을 때도 싱글맘이라고 이야기했다. 아주 가깝지 않은 사이여도 굳이 숨기지 않고 이야기한다. 이혼이라는 말을 꺼내기만 해도 울컥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누구나 한 번쯤 걸리는 감기처럼 지나가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육성회비 안 가져온 사람 손들어할 때 친구들이 볼까 봐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가난함이 주는 부끄러움에 부모를 원망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자유롭지 못했던 나는 나 스스로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그런 상처들을 속으로 끌어안고 낮은 자존감을 애써 감추며 살다 보니 한 번도 진심으로 나를 안아주지 못했다. 역시나 이혼을 할 때 까지도 나를 살뜰히 챙기지 못했다. 결핍으로 얼룩진 내가 선택한 배우자의 부정이 나의 문제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문제없이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부부 사이의 피로감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그저 참을만한 것으로 애써 치부하며 내가 바뀌어서 우리가 바뀔 수 있다는 노력을 계속했다. 신용카드 돌려막기 같은 아슬아슬한 부부관계가 터지던 날 난 오히려 기다린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 그때야 비로소 내가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건 나의 잘못이 아니야’
가난도 이혼도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사건과 상처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뇌가 기능을 충실히 했다면 나의 잘못이 아닌 것들은 설사 나의 잘못이었던 것들이라도 잊어버리게 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렇게 집요히 상처를 꽁꽁 싸매고 곪아버리게 한 것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서였다. 붙들고 있던 상처의 기억들을 놓아버리면서 모든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다. 이혼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얼마 전 아들이 온라인 수업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이야기하고 각자 지어낸 이야기로 미니북을 제작하고 있었다. 아들의 8페이지 책의 내용은 이러하다.
제목:하나여서 행복한 우리 가족 (표지 웃는 얼굴 그림)
재원이는 엄마와 동생과 둘이 삽니다.
얼마 전 부모님이 이혼했기 때문입니다. (깨어진 하트 그림)
하지만 재원이는 행복합니다.(웃는 얼굴)
왜냐하면 아빠가 일하고 늦게 들어오기도 하고
술을 먹고 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원이는 엄마와 단 둘이 사는 게 좋습니다.
재원이의 부모님이 이혼했는데 과연 재원이의 기분은?
질문으로 끝이 나서 아이의 기분이 궁금해졌다. 책의 주인공은 재원이지만 자신의 이야기이다. 얼마 전 아들이 씻다가 침대에 누워있던 나에게 물었다.
“엄마, 아빠랑 이혼을 한건 아직 아니지?”
“응.. 이혼을 한 거나 마찬가지야. 앞으로 함께 살거나 하지 않을 거야. 궁금했어?”
“응. 그렇구나.”
“언제든지 더 궁금하거나 물어보고 싶은 거 있음 얘기해도 돼.”
대답을 준비했던 것이 아니었지만 그냥 솔직히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린 시절의 나라면 아파서 꺼내지도 못할 이야기였다. 아이의 생각이 녹아든 이야기가 찡하기도 했지만 말이든 글이든 자신의 얘기를 덤덤히 할 수 있다면 우린 괜찮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