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 되었습니다.
이혼하는 딸이 엄마에게
자연출산으로 엄마가 되던 날 출산 6시간 후 신생아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병원도 아닌 조산원에서 출산하고 산후조리원도 가지 않는 별난 딸년을 건사해주러 우리 집에 엄마가 오셨다. 내가 처음 하는 엄마 노릇 하나하나 엄마와 갈등이 생겼다. 신생아 젖 먹이는 일부터 내가 밥 먹는 것, 우리 집 살림까지 모두 갈등의 대상이 되었다. 출산도 육아도 남들처럼 하지 않는 나를 못마땅해하셨다. 출산 후에 분비된 옥시토신보다 코르티솔(스트레스 호르몬)이 나를 장악해갔다. 황홀했던 출산의 과정과 달리 수유는 살이 찢어지는 아픔이었다. 게다가 잠을 거의 자지 못해서 예민함이 최고치를 찍고 있었다. 엄마는 옷장 어디서 찾아낸 재봉 하다 만 천을 들고 왔다.
“이거 왜 이렇게 만들다 말았냐?”
“엄마, 좀 그냥 두면 안 돼?엄마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집에 가세요.”
딸들은 엄마가 되면 친정엄마 생각이 나서 고맙고 미안하다는데 난 엄마가 되고 나서도 내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고 서로의 벽만 확인한 셈이었다. 그 벽은 내가 둘째를 출산하고 나서도 계속 두터웠다.
아이들을 데리고 갈 수 없는 볼일이 생길 때면 참 난감했다. 아이들을 맡길 방법을 찾다가 도저히 없을 때 쓰는 히든카드가 친정 찬스카드였다. 70이 넘은 엄마는 다리도 불편하셔서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외할머니 댁에 있는 텔레비전을 볼 생각에 신이 났지만 난 씁쓸함을 삼켜야 했다. 먹을 것 챙겨주고 믿을 만한 어른과 함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수도 없었다. 남편과 별거를 시작하고 엄마에게 아이들을 부탁할 일이 더욱 많아졌다. 아이들과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아이들과 살아갈 궁리도 해야 했다. 여건이 안되어서 계속 미루고 있었던 유아 숲 지도사 자격증반 모집을 보게 되었다. 매주 2회 저녁 수업이라 엄마가 도와주지 않으셨으면 시작도 못했을 일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10시쯤 아이들을 데리러 가면 초저녁 잠이 많으신 엄마는 잠이 들어있었고 아이들은 엄마 오기 전에는 절대 자지 않겠다며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었다. 늦은 저녁 아이들을 데리러 갈 때마다 엄마에게 짐이 되는 것 같아 미안하고 고마웠다. 하루는 엄마의 집에서 자기로 했던 날이었다. 별거와 이혼소송을 하더 시기라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헛헛한 마음을 술로 채웠다.
“엄마, 나 잠이 안 오는데 맥주 한잔 마시고 잘래.”
“가만있어봐. 오징어 한 마리 구워줘?”
늦었는데 무슨 술이냐며 핀잔을 들을 줄 알았는데 엄마가 내 마음을 읽은 것 같았다. 엄마와 맥주잔을 비웠다.
“에그, 나는 네가 그렇게 속 썩고 사는 줄도 모르고… 그걸 말도 안 하고 어떻게 살았냐…”
“남편이랑 살고 있을 때 뭐하러 얘기해. 그래 봐야 엄마 속상하기만 하지.”
“아유, 나쁜 놈. 난 그런 것도 모르고… 네가 젤로 아픈 손가락이다.” 엄마의 목이 매어왔다.
엄마는 내가 30대 중반이 넘어가도 결혼하라고 채근하지 않으셨다. 엄마가 자신의 삶을 마음대로 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나에게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펼치면서 살라고 하셨다. 갑자기 내가 이혼경력이 있는 남편을 인사시켰을 때도 엄마는 말리고 싶어 했지만 나 하고 싶은데로 하게 해 주셨다. 엄마에게 걱정 끼치기 싫었고 잘할 수 있다고 잘난 척하던 나였다. 시작부터 삐그덕 거린 결혼생활을 7년 동안 말하지 않고 혼자 이리저리 버티다가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 되고 말았다. 다른 형제들보다 항상 혼자 알아서 잘한다고 큰소리쳤던 내가 부끄러웠다. 엄마의 목매인 한마디에 애쓰고 사느라 쌓였던 눈물을 그제야 속 시원히 쏟을 수 있었다. 엄마를 꼭 안으니 내가 세웠던 벽이 허물어졌다. 엄마와 딸, 같은 여자로서의 온기를 느꼈다.
“엄마, 나 잘 살 수 있어. 더 잘 살려고 이혼하는 거야.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