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풀문 Oct 20. 2021

흥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혼조정하던 날

‘사랑과 전쟁’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었다. 부부들의 문제와 실제 사연들을 재구성하여 드라마로 보여준다. 과장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극적인 사연들이 대부분이어서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이혼 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정이 진행되자 시작부터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양육비, 재산 분할, 아이들 면접교섭 등을 조정하는 자리였다. 집에서 나갈 때는 무릎 꿇고 용서를 구했지만 이제는 잘못을 돈으로 흥정할 시간이었다. 매월 통장에서 빠져나갈 숫자들이 더 중요해진 남편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이들의 권리이기 때문에 나에게도 중요했다. 조정위원은 양쪽의 의견이 충돌되는 부분을 들은 후 한쪽씩만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조정위원은 시장에서 물건 사듯이 양육비를 올렸다 내렸다 흥정을 붙였다. 남편은 개인사업자여서 소득이 누락된 부분이 많은 걸 알고 있는데도 터무니없이 양육비를 깎았다. 더 받아야 하는 사람과 덜 주고 싶은 사람 사이에서 계속 흥정을 붙였다. 지금 재고가 빠르게 줄고 있으니 리모컨의 주문 버튼을 누르거나 지금 바로 ***-****로 전화하라는 홈쇼핑 쇼호스트가 떠올랐다. 조정위원은 흥정을 성사시키지 못했고 좀 더 베테랑 쇼호스트 일지도 모를 담당 판사와의 자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판사는 재판으로 가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더 좋은 결과가 나올 보장도 없다는 말로 조바심을 유도했다. 아까 판사를 만나기 전과 다르게 마음이 복잡해졌다. 재판하면 힘들다는 말은 누가 퍼트렸을까? 게다가 더 안 좋은 결과로 끝날 수도 있다는 말이 계속 신경 쓰였다. 남편 쪽이 먼저 나가서 기다리는 동안 판사는 나를 설득했다. 판사의 경험으로 봐서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재판을 해도 자기가 담당이어서 크게 달라질 거 같지 않다고 했다. 변호사가 있어도 최종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결정하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만약 조정이 안돼서 소송으로 간다면 시간도 많이 걸릴 것이다. 나와 아이들이 힘들어지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적당히 양보를 하고 끝내고 싶었다. 판사는 바로 커다란 모니터에 합의문서를 작성했다.

문서를 작성하는 중에 소소한 것들이 결정될 때마다 난 눈물의 고별세일이라도 하듯 망한 가게의 주인이 된 심정이었다. 양육비, 재산분할을 적고 다음에 아이들 면접교섭에 관한 내용이었다. 한 달에 몇 번을 만날 것인지 시간과 장소를 정해야 했다.  만날 횟수와 시간이 정해지고 요일도 정해졌다. 갑자기 남편 쪽에서 1박 2일 면접을 넣어달라고 요청했다. 함께 살 때 가족은 안중에도 없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저녁에 30분만 운동하려고 아이들을 부탁해도 봐주지 않았다. 남편은 육아는 엄마가 하는 것이라고 못을 박았던 사람이었다. 아이들을 재워본 적도 먹여 본 적도 없고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힘들어했다. 함께 외식이라도 하면 나는 아이들을 먹이느라 식사도 못하고 있을 때 다 먹은 남편은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아이들과 애착이 없는 아빠의 행동은 나열하면 끝도 없었다. 아이들이 여섯 살, 아홉 살 엄마와 떨어져 자는 것도 아직 안되는데 아이들을 배려하지 않은 남편의 욕심이 못마땅했다.

‘같이 살 때도 안 하던 걸 웬 뒷북이야.’

판사가 묻는다.

“어떻게 하실래요? 일단 1박 2일 적어두죠 뭐. 일단 적어보고..”

“아니요. 저 합의 안 할래요. 재판할게요.”

안 그래도 답답하던 마음이 면접교섭권에서 꽉 막혔다. 아쉬울 것 없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 결혼생활에서 아이들 키우며 가정에 기여한 나의 권리를 시장에서 떨이 치듯이 흥정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양육비는 내가 받는 것이 아니고 아이들에게 쓰이는 돈이다. 그걸 안다면 처음부터 양육비를 준다 못준다 흥정은 하지 않아야 한다. 부모의 이혼을 겪는 아이들이 우선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더 이상 부부는 아니지만 부모로서 엄마, 아빠의 이혼을 설명해줘야 하고 안심시켜줘야 하고 잘 자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이들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지만 면접은 아이들이 원할 때 편안한 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아이들에 대한 배려보다 자신의 욕구가 우선인 남편을 반품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혹시나 나중에 지금보다 부족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이미 아이들을 책임지기로 한 내 몫이었다. 후려치듯이 끝내는 고별세일을 멈추고 나니 마음이 좀 후련했다.

작가의 이전글 저는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 되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