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백 번만 만나줘.
"아빠 이제 은퇴하려고 해. 회사도 차도 다 팔거야. 그리고 엄마랑 캠핑카 타고 여행다닐거야."
귤꽃 향기가 만개했던 2024년 4월의 끝날, 친정아빠는 정말로 은퇴를 하셨다. 이미 칠순을 훌쩍 넘긴 77세에 평생을 이끌어온 사업체를 정리하셨다. 아빠는 덤덤했지만 아빠는 물론 우리 가족에게 분신 같았던 차를 사업체의 새 주인에게 넘길거라는 선언 앞에서 잠시 멈짓했다. 그리고 외쳤다.
"아빠! 아빠 진짜 멋지다! 어쩜 아빠는 은퇴도 금메달이야!"
아빠가 한 평생 했던일 중장비 임대업. 초등학생일때 아빠의 회사에 가면 기사님이라며 용돈을 주는 아저씨가 계셨던 기억이다. 제법 큰 회사를 운영했던 아빠는 삼남매가 시집 장가를 가고 내가 큰 아이를 낳을 무렵 갑자기 운전대를 잡으신다고 하셨다. 청년도 아닌데 갑자기 중장비 기사로 일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오랜 신뢰가 있는 고마운 사장님의 소개로 취업을 하게 되었고 큰 변화였다. 근무지는 지방이었기에 환갑이 넘은 나이에 혼자 숙소방을 얻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아빠의 모습에 엄마는 애닳아 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아빠는 늘 씩씩하셨다.
"아빠는 이 나이에 이렇게 다시 일하니까 너무 좋아! 내 아들보다 한 살 많은 청년이 나한테 형님이라고 부르는데, 이게 무슨일이야 도대체!" 라고 말하며 아빠의 전매특허 껄껄껄 웃으셨다.
다소 무료하던 일상이 아닌 매일 정시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이 아빠에게 큰 활력이 되었다. 젋은 사람들이 아빠에게 이런 저런 일을 상의하고, 식당 아줌마는 아빠를 위해 모아뒀던 누릉지 한 봉지를 건네주기도 할만큼 아빠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셨다. 아빠가 잘 지내니 엄마도 곧 편안해졌다. 몇 해를 주말부부로 지내다 아빠 곁으로 이사하셨다. 충남 예산에서의 삶은 마치 두 분에게 예상치 못한 인생 후반기의 선물이었다. 쾌청한 공기, 주말은 어디든 쉽게 여행갈 수 있는 막히지 않는 도로, 과일과 회 좋아하는 두 분에게 제철 먹거리도 풍부한 건강한 환경이었다. 나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해마다 예산 사과의 아삭하고 새콤한 맛을 즐길 수 있었고, 노란 빛깔부터 먹음직 스러운 고구마는 물론 주방에서 감초 역할을 하는 건어물도 떨어질 새 없이 늘 보내주셨다. 게다가 두 아이와 친정 나들이를 할 때는 대천 앞바다를 앞마당처럼 다니며 신나게 놀며 아이들을 키웠다.
예산생활에서 무엇보다 으뜸은 엄마의 사회생활이었다. 새로 사귄 동네 아주머니들과 매일 점심을 돌아가며 계산중이라면서 '바쁘지만 전화 해줘서 좋아하는' 엄마의 기분이 수화기 너머에 늘 있었다. 반가웠다. 수강 신청 경쟁률이 낮아서 국선도, 요가, 라인 댄스 등 양질의 문화 생활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우리 잘 살고 있음!'이 두 분의 복장에도 서서히 반영되기 시작했다. 사장님 모드로 살때는 늘 등산복과 등산화 차림이었던 아빠가 어느날 부터 필라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 청바지와 흰 운동화, 그 국롤을 지키며 한 살이라도 더 젊은 모습을 유지하며 회사에 출근하셨다. 새로운 친구들과 예산 장터 옷가계 쇼핑이 취미가 된 엄마의 착장도 볼때마다 신상이었다.
그렇게 일도 일상도 관계도 모두가 금메달이던 예산에서의 시간이지만 아빠는 스스로 은퇴를 결정했다. 77세를 맞이하던 겨울, 심한 감기에 걸리셨고 그로 인해 호되게 앓는 동안 결심하셨단다. 이렇게 움직일 수 있을 때 이제 일은 그만하고 여행을 다녀야 후회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했다. 나는 정말이지 대 찬성이었다. 그러면 내가 사는 제주에 더 자주 올 수 있고 무엇보다 트럭을 개조한 캠핑카로 여행을 다닐거라는 말이 너무나 듣기 좋았다. 부모가 행복한 미래를 그리며 사는 모습을 보는일이 자식에게 이렇게 큰 기쁨이었구나! 이런 생각과 감정을 경험하게 해주는 두 분에게 금메달을 헌사했다. 금메달 은퇴가 감사했고 나도 아이들에게 그런 경험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어졌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만큼 아빠는 폐질환이 나빠졌다는 이야기다. 건강상의 문제로 실제로 캠핑카에서 잠을 자며 생활하는 여행은 무리라는 걸 곧 판단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빠는 언제나 그렇듯 연연해 하지 않고 쿨하게 받아들인다.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아도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해도 스스로의 감정에 침몰되기 보다 있는 그대로 상황을 바라보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나의 아빠였다.
덕분에 나도 음지 보다는 양지를 바라본다. 그동안은 명절에만 짧게 제주여행을 했지만, 앞으로는 제주에서 함께 나무늘보가 되어보고 싶다. 점심을 먹고 느즈막히 출발해 늘적늘적 샤려니 숲길을 걷어볼거다. 피곤하면 낮잠도 곤히 자며 아빠의 호흡이 편안해 지는 곳에 머무르는 일만 생각할거다. 마음의 중심을 그곳에 두고 있으니 다른 생각이나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다.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행복하게 사는 건 그다지 어려울 일도 진지한 일도 아니니까. 제주의 삼나무 그늘에 앉아 있다가 낮잠을 자는 일은 다른 근심걱정은 하나도 안 떠오르게 만들테니까. 피톤치드 가득한 곳에서 잠시 눈 붙이고 나면 그렇게 개운할수가 없으거니까. 그렇게 에너지를 가득 채우고 집으로 돌아와 또 내일 주어지는 시간을 채워갈 생각에 슬쩍 미소짓게 된다.
새삼 금메달이 왜 값진 것인지 알 것 같다. 언제 어느 순간에도 반짝이기 때문이다. 일을 하는 시간도 일 하지 않는 시간에도 아빠는 분명 반짝 반짝 빛이 날 것이다. 그런 아빠를 보며 곁에서 웃는 우리 가족도 덩달아 반짝일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정말이지 확실하다. 아빠 인생은 언제나 금메달이니까!
* 부모님과의 여행 추천
사려니 숲길. 평상이 있고 데크로 되어 있어서 걸음이 늦은 분도 편하게 걷기 쉬움.
* 어린 아이들도 혼자 뛰어다녀도 안전할 만큼 산책로가 잘 구비되어 있는 곳
* 걷다보면 아이들 책도 비치되어 있어서 아이들은 책 읽고 어른은 낮잠을 잘 수 있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