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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부신 일상 Dec 04. 2022

피아노 선생님이 오는 날

<최재천의 공부>를 읽고

“알아가려는 노력이 축적될수록 이해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최재천의 공부> 중에서



피아노 선생님이 오는 날이면 아이들이 분주하다. 다급하게 숙제 노트를 찾아 허겁지겁 숙제를 한다. 피아노 한 대를 두고 서로 먼저 연습하겠다며 실랑이를 벌인다. 미리 하라는 엄마의 잔소리는 아이들 귓가를 맴돌 뿐이다. ‘매일 선생님이 오는 것도 아닌데 미리미리 좀 하지!’ 


어느 날, 세 아이의 피아노 레슨이 끝나고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한 페이지가 접혀있는 아이들 피아노 연주곡 집을 펼쳐 보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머니와 이 곡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아이들 레슨 끝나고 제가 잠시 봐줄 수 있으니 연습해보고 언제든 알려주세요. 부담될 수 있으니 앞으로 묻지 않을게요!”


선생님은 더는 묻지 않았지만 매주 현관에서 인사를 할 때마다 펼쳐보지 못한 악보가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하지만 도통 피아노 뚜껑을 열어볼 시간이 없었다. 


몇 주동안 아무 반응이 없자 선생님은 나를 다시 불러서 다짜고짜 피아노 앞에 앉게 했다. 나는 당황해서 그동안 연습을 하나도 못 했으니 다음에 해보겠다며 손사래 쳤다. 선생님은 괜찮으니 그냥 쳐보라며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피아노 앞에서 한참 동안 나와 선생님의 기싸움이 시작되었다. 결과는 온화한 미소의 승! 결국 선생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더듬더듬 악보를 보며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땀이 삐질삐질 났다. 선생님은 너무 잘한다며 계속 나를 칭찬했다. 칭찬조차 너무 낯설어 몸 둘 바를 몰랐다. 


초등학교 내내 피아노를 배웠다. 외삼촌 결혼식에 웨딩마치도 연주하고 성당 미사에 반주도 맡았다. 실력이 출중했던 것 아니지만 꽤 오랫동안 피아노를 쳤지만 졸업 이후 피아노 앞에 앉아본 적이 없었다. 작정이라도 한 듯 삶에서 피아노를 지웠다. 너무 오랜만에 악보를 읽어가며 건반을 누르는 모습이 낯설고도 반가웠다. 긴장한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강압적으로 시작된 피아노 레슨은 매주 이어졌고 선생님의 폭풍 칭찬 덕분에 손가락은 피아노 위를 즐겁게 춤추었다. 두세 줄씩 악보를 읽어나가는 시간이 쌓여 ‘냉정과 열정 사이’ 영화 OST 한 곡을 완주했다. 피아노 치는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자주 연주 동영상을 돌려본다. 


나까지 피아노 수업에 합류하면서 선생님이 오는 날이 되면 피아노 쟁탈전이 더 심해졌다. 아이들 연습 시간을 방해하지 않고 싶어서 미리 연습하려고 아무리 다짐해도 쉽지 않다. 피아노 선생님이 오는 날이 되어야 비로소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레슨 시간이 가까워져야 비로소 몸이 움직인다. 레슨 날이 되어서야 소란스러운 아이들의 행동과 마음이 온전히 이해되었다. 숙제 노트를 찾지 못해 다급한 마음에 짜증을 내는 모습에도 너그러워졌다. 먼저 연습할 거라고 피아노 의자에 앉아 엉덩이 싸움을 하는 모습도 사랑스럽게 바라보게 되었다. 


피아노 선생님이 오는 날이면 공허하게 맴돌던 엄마의 잔소리는 사라지고 피아노 선율만 쉴 새 없이 울린다. 여전히 오가는 다급한 마음과 분주한 손가락을 너그럽게 품으며 혼자 몰래 다짐한다. '다음 주는 미리미리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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