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면 보이는 것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등줄기를 따라 줄줄 흐르는 무더운 계절이다. 때가 되면 계절이 바뀌듯 달리기 권태기도 찾아왔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너무 멋진 계절이라며 신나게 달리던 봄을 더 열심히 달려보리라 다짐한 시점이었다. 주말마다 일정이 생겨 스케줄을 소화하지 못했고, 이런저런 핑계로 계획과 행동이 따로 놀았다. 달리는 시간과 달리는 횟수도 줄고, 잘 달리고 싶어 부풀었던 마음도 점점 쪼그라들었다.
'요즘 왜 그래?'
심드렁한 마음은 어제보다 더 나아지지 않은 나를 바라보기 싫은 마음에서 싹텄다. 매일 열심히 운동하는데 기록이 나아지지도 않는 것 같고, 요즘은 더 힘들고 지쳤다. 나보다 늦게 달리기를 시작한 사람도 기록도 훨씬 좋았고, 가벼운 몸으로 즐겁게 달린다고 했다. 실제 한강을 달리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 나를 추월했다. 지지부진한 나를 데리고 달리려니 답답하고 초조했다. 매일 흘리는 땀방울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에휴, 달리기는 체절이 아닌가 봐.'
'에잇, 달리기에 재능이 없나 봐.'
남들처럼 하지 못하는 나를 자꾸 꾸짖고 원망하고 자책하다 보니 달리기를 좋아하고 즐기던 마음도 점점 힘을 잃었다. 마치 잔뜩 혼나서 기죽은 아이 같았다. 그럼에도 달리고 싶은 날만, 달리고 싶은 만큼 달렸다. 이미 여러 번의 권태로운 마음을 만났기에 새삼스럽지 않았다. 습관은 하기 싫은 날도 그저 하게 하고, 심지어 잠시 멈추었더라도 다시 시작하게 했다. 찌뿌둥한 몸과 무거운 마음을 어르고 달래며 묵묵히 달리며 계속 묻고 생각했다. 답답하고 지친 마음에게.
계속 운동을 하다 보니 발목이 불안하고 발바닥을 고루 사용하지 못하며 종아리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몸은 모든 부분이 연결되어 있어서 균형이 중요하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만큼 다른 부분을 더 쓴다. 제대로 쓰지 못한 부분으로 운동 퍼포먼스는 떨어지고 과하게 쓰인 부분에는 통증이 찾아온다. 지금까지 아픈 부분은 없었으나 발바닥, 발목 그리고 종아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힘든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관절의 탄성을 이용하지 못했고 무게 중심이 전반적으로 뒤로 쏠려있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보강운동을 통해 약한 부분을 단련하면서 조금씩 힘이 생겼다. 달릴 때 지면에 닿는 발바닥의 느낌이 달라졌고, 몸이 앞으로 뻗어나가는 느낌도 들었다. 낯선 움직임이라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조금만 방심해도 익숙한 자세로 돌아갔다. 평소보다 에너지가 훨씬 많이 필요했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니 자연스럽게 페이스가 빨라졌다. 아쉽게도 호흡이 따라오지 못했다. 코로 편안하게 호흡하는 것이 어려웠고 입으로 헉헉거리며 달려야 했다. 페이스를 늦추면 자세가 무너졌고, 자세를 바로 잡으면 호흡이 거칠어졌다.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었다.
문뜩 코호흡에 처음 도전했을 때가 떠올랐다. (유산소 신진대사 능력이 숨이 차지 않는 편한 강도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발달한다. 중장거리 달리기에서는 호흡이 편한 속도로 달리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코로 호흡해도 편안한 달리기를 도전했다.) 천천히 달리면 편안한 호흡으로 달릴 수 있다는데 아무리 페이스를 늦춰도 코로 호흡하기 힘들었다. 내 심장은 쓰레기인가 괜히 탓하며 달리고 또 달리다 보니 걷기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게 가능했다. 못 달리는 게 아니었다. 느리게 달리는 나를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이도저도 안 된다고 투덜거리는 지금도 그때와 같은 마음은 아닐까?'
많은 상황이 변했다.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몸의 부위를 사용해서 익숙하지 않은 자세로 자세로 달린다. 상대적으로 약한 근육이라 더 쉽게 지칠 것이고 자세를 더 신경 쓰느라 에너지 소모도 클 것이다. 평소와 같은 페이스를 유지해서 비슷한 시간을 달리는 것은 무리다. 코호흡이 힘들고 입이 자꾸 벌어지며 호흡이 거칠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여름은 덥고 습도까지 높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고 지치는 날씨에 달리기라니! 조금만 달려도 땀으로 옷이 흠뻑 젖고 비가 내리듯 온몸을 따라 뚝뚝 떨어졌다. 운동 시작부터 솟구치던 심박이 이상한 게 아니었다. 힘들고 지친 게 당연했다. 이전처럼 달려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페이스를 늦춰야 한다.
달리는 시간을 줄어야 했다.
그런데,
이전보다 더 느리게, 더 조금 달리고 싶지 않았다!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할 수 없다고, 되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괜히 나를 재촉하고 몰아세웠다.
무섭게 내리던 비가 그친, 잠시 화창한 아침이다. 깨끗한 하늘만큼 마음도 가볍고 상쾌했다. 여전히 덥고 습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워밍업 페이스를 그대로 유지하며 지면에 몸을 편안하게 맡긴다는 생각으로 달렸다. 호흡이 편안했고 발바닥 느낌이나 몸의 중심도 잘 유지되었다. 진짜 페이스를 늦춰도 중심이 뒤로 빠지지 않게 달릴 수 있었다. 오랜만에 달리는 시간이 즐겁고 만족스러웠다. 다만 다른 복명이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지루함과 싸움이다. 이래저래 힘들다. (그냥 힘듦을 인정해야 하나?)
비교는 불행의 씨앗이다. 타인 대신 어제의 나보다 얼마나 성장했는지 살펴야 한다. 하지만 새로운 도전에는 ‘어제의 나’는 없다. 그냥 하는 지금의 내가 최고의 나이다. 새로운 도전 앞에 펼쳐 치는 다른 상황에서 미숙한 나를 꾸짖고 나무라는 게 이상하다. 전보다 잘하지 못하는 나는 당연하다. 이 더위가 가실 때까지 어제의 나와 비교하는 마음도 잠시 접어두어야겠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오랜만에 만족스럽게 달렸다.
‘어제의 나와 비교하는 잣대로 새로운 나에 대한 설렌마음을 쉽게 꺾어버리지는 않았을까? 미숙한 나를 마주하기가 싫어 가능한 범위 내에 보기 좋은 삶만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이 더위와 함께, 종종 삶에서 느끼는 답답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