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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재 YeonJay May 05. 2023

#001. 듣고 싶었던 말

가장 가까운 사람마저도 위로를 주지 못하는 때가 있다

'연재 님, 00기업에서 함께 일할 수 없어서 아쉽고 미안한 마음 전합니다.'


첫 문장을 읽자마자 울컥 감정이 올라왔다. 눈물이 차올랐다. 뒤에 적힌 다른 문장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면접 본 지 겨우 몇 시간 지났을 때였다.

아, 여기 스터디카페 인데...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얼른 화장실로 숨었다.

비수기라 옆자리에 아무도 없었다는게 그나마 다행이다.


괜찮다, 면접 본다고 다 붙는거 아니지 않냐, 하며 위로를 했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그칠 듯 하면서 계속 쏟아졌다.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면접이라 자신감이 조금 붙어 있던 상태였다.

맘에 걸리는 조건들이 있었지만, 새로운 일을 하면서 배우고 느끼는게 많을거라 생각했다.

오래 전부터 관심있게 봤던 기업이라 막연하게 한번쯤은 일해보고 싶었던 생각도 있었다.

현실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지만. 

긴장이 풀리자 그간 뒤로 보냈던 감정은 물밀듯이 쏟아졌다. 하필 비도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이었다.  


그날 점심 먹을 때, 그러니까 정아와 얘기를 나눌 때부터 내 감정은 조금 위태롭긴 했다.


오전 근무를 후다닥 마무리하고 집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집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면접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 반 정도. 대충 반찬 챙겨서 밥을 먹고 있을 때, 정아가 집에 들렀다.

아침에 출근한다고 같이 집을 나선 내가 갑자기 집에 와 있으니 적잖이 놀랜 모양이다. 

(정아는 집에서 3분 거리에 있는 일터에서 일한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집을 드나든다)

"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

" 오후에 반차 썼어. 갈 데가 있어서. "

" 어디 가는데? "

" …면접 보러. "

이직하려고 지원했던 곳 중 한 곳에서 면접 제의가 들어와 일정을 잡은 터였다. 

" 그래도 그 회사 오후에 반차 써 주네. 너 그만두는거 들키는거 아냐? "

" 이미 얘기했어. 후임 구해달라고. "


" 순서가 잘못됐다. "

차갑고 단호했다.

" 다음 갈 곳을 정해놓고 나와야지. 인제 면접 보러 다니는데 그러면 어떡하냐. "

" 거긴 이렇게 발등에 불 떨어지게 안 하면 사람 안 구해줄 거라고. "

" 다음 갈 회사 정해지고 나서 나가겠다, 하고 딱 잘라 말하고 나오면 될 것을…왜 그렇게 그쪽을 생각하냐. "

누군 그렇게 못 해서 이러나. 

" 설마~나 한 명 받아줄 곳 없겠어? "

"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거 모르냐? "

어느새 정아의 말투엔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내가 듣고 싶은 얘기는 그게 아니었다. 

" 나도 그쪽도 윈윈하는 방향으로 하는 거야. "

이때쯤이었다. 내 감정이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낸 것은.


힘겹게, 하지만 무덤덤한 척 말을 이어갔다.

" 그래도 나름 최대한 계산하고 고민해서 결정한 거란 건 알아줘. "


" …고민 많이 하고 그랬다면 별 수 없지만… "

정아는 여전히 탐탁치 못하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뚝 떨어진 입맛을 끌어모아 마지막 남은 밥을 싹싹 긁어 먹었다.

식탁을 치우고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정아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일터로 돌아갔다.

삐빅 - 덜컥.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화장실 문 너머로 공허하게 들렸다.

‘침착하자…면접 볼 것만 집중하자’

그렇게 우선은 감정을 달랬다.


처음엔 면접 제의가 들어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내가 지금까지 일했던 것을 알아주는구나, 내가 실력이 아주 없는 건 아니구나 싶었다.

늘어지게 쉬고 싶은 본능을 억누르며 퇴근 후 집에서, 주말엔 스터디카페에서 노트북을 붙잡고 씨름한 보람이 있었다.

이력서와 각종 서류를 준비하던 긴장감은 어느새 기분 좋은 떨림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몇 년만에 보는 면접이라 꽤 긴장이 되었다. 그런만큼 뭔가 힘이 될 말을 듣고 싶었다.

결국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듣지 못했다. 물론 나도 그 말을 해달라고 말하지 못했지만.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추스르면서 '내게는 그런 말을 듣는 것마저도 사치였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가족이니까 바랄 수 있는건데, 그 말을 하는게 그렇게 어려웠을까 싶더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면서 가족의 관심을 바라는게, 마치 구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한테 뭐 바라면 안 된다더니...내가 이렇게까지 나약한 사람인가 싶었다.


‘시간과 마음을 내어 지원해 주시고 면접까지 참가해주신 모든 면접자, 응시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라는 상투적인 끝인사는 화장실을 나오고 한참 뒤에야 읽을 수 있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맛있는 거나 먹자. 내일부터 또 준비하자.'

집 근처 가게에서 평소 좋아하는 닭똥집 튀김과 감자튀김을 포장해 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하니 정아를 포함한 가족 모두가 쉬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내가 포장해온 음식을 아무도 같이 먹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식탁에 앉아 홀로 튀김을 먹었다. 

정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아의 신경은 TV에서 보여주는 온갖 시끄러운 소식에 쏠려 있었다.


주변을 정리하며 하루를 마무리할 때까지도

듣고 싶었던 말은 끝끝내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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