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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샘 Mar 03. 2020

아, 나 죽을 뻔한 사람이었지

삶의 밑바닥에서 솟아나는 희망샘이야기


일주일에 한 번씩 비타민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갑니다. 최근에는 어쩌다보니 코로나19를 핑계로 열흘에 한 번 가게 되었습니다.

병원은 버스로 20분 거리에 있습니다. 버스정류장 전광판을 보니 타려는 차가 차고지에 있다고 합니다. 최소 15분 이상을 기다려야하는데 이런 경우 다른 버스를 타고 다시 갈아타는 방법과 걸어가다가 적당히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대기시간을 확인하고 기다렸던 버스를 타는 방법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저는 걷기로 했습니다. 걷는 것이 최고의 운동법이라는 것을 아픈 뒤에 알게 되었거든요.


1년 반 전에 저는 항암치료 중이었습니다.

3주에 한 번씩 상급대형병원에서 링거로 3시간 정도 약물을 주입하고 휘청거리며 집으로돌아옵니다. 그것은 공포의 빨간약이었습니다. 몸 속의 암세포가 빠른 속도로 자라는 특성을 이용해서 암세포를 공격합니다. 암세포만 공격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상세포 중에서 빨리 자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머리와 손발톱 등 말초신경세포의 기능도 함께 마비시키는 속성을 갖고 있어서 탈모가 오고 손발톱은 새까맣게 됩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골수기능을 저하시켜 면역력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열이 오르면 큰일입니다. 해열제로 억지로 내려서도 안됩니다. 24시간내에 38도 이하로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당장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을 가야합니다. 무균실에 들어가 각종검사를 통과하면 절대 패혈증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주의를 받고 돌아옵니다. 항암제의 부작용을 이겨내려면 잘 먹어야하는데 속은 울렁거리고 구토증세에다 구내염까지 오니 먹기가 어렵습니다. 몸에는 계속 지르르 전류가 흐르는 듯하고 빈혈과 설사로 어지럽습니다.


1주일은 수많은 부작용에 시달리다가 2주일간 조금 괜찮아졌다 싶으면 다시 항암주사 맞으러 갔습니다. 6개월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니, 오직 버텼다고 해야겠습니다. 입안이 헐어 먹을 수 없고 먹은 것이 없어 말할 기운조차 없는데 가벼운 운동은 해야합니다.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여야합니다. 그런 때에 마스크를 쓰고 길을 나서면 겨울날이었어도 가로수들이 온몸으로 맞아주었습니다. 잘 나왔어,잘 견디고 있구나,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줌으로써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따스한 위안을 건네고 있었습니다.


오늘 길을 걸으며 가로수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세피아 색깔에 가까운 보통 겨울나무라고 생각했는데 일부 나무가 선연한 흰색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짙은 고동색의 단단한 껍질이 떨어져나가고 또 떨어지면서 하얀 속살이 드러난 플라타너스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만져보니 손에 흰가루가 묻어납니다. 마치 분필을 만진 것 같습니다. 도시의 오염된 공기속에서도 의연한 플라타너스의 숨결을 느껴져 손을 털지도 않고 한참을 내려다보며 걸었습니다.


나무가 겨울이라는 엄혹의 시간 안에서 봄을 맞이하려는 안간힘이 어쩐지 사람들과 닮아있습니다. 슬프고 외로웠던 마음을 돌보지도 못하고 오로지 생존을 위해 바쳐야했던 무수한 시간들이 우리 안에 오래전부터 꿈틀대고 있습니다. 모진 세상에 던져져 오직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순간들이 응축이 된 듯 가슴이 저릿저릿해옵니다. 긴 항암을 하면서 생각했더랬습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구나. 다시 생이 주어진다면 잊지 않으리.’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 발이 퉁퉁 부어 큰 운동화를 신지 않아도 되는 것, 집중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것, 탈모를 감추기 위해 모자나 가발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 숨을 편하게 들이쉬고 내쉬는 일까지 그 모든 것은 선물이 되었습니다. 살아있다는 건 좋은 것입니다.


가끔 내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 모를 때, 그것보다 더 가끔 사는 게 시시해질 때
깜짝 놀라 돌이켜보는 마음의 원점입니다.


아, 나 죽을 뻔한 사람이었지.

오늘은 플라타너스가 나침반이 되어주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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