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선혜 Feb 20. 2023

딸과 엄마가 함께 쓰는 교환일기

사춘기가 오기 전에 너와 하고 싶은 일




교환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써서 딸 책상에 두면, 딸이 읽고 내 침대 맡에 돌려준다. 규칙도 정했다. 일기를 받고 다음 날까지 돌려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답장 쓸 기회를 잃게 된다. 분량은 자유다.     







 

초등학교 4학년 자연 시간이었나? 우유갑에 흙을 채우고 그 안에 강낭콩 한 알을 숨겼다. 그게 싹이 나고 잎이 나서 열매를 맺는 동안 관찰 일기를 쓰는 게 숙제였다.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쓴 ‘육아 일기’는 그런 관찰 일기에 가까웠다. 다만 아이는 강낭콩이 아니라서 너무 더디게 자랐다.




엄마인 나만 알 수 있는 아주 미세한 변화들이 일어나는 날들이었다. 오늘은 무얼 먹었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남들이 보면 시시할 법한 이야기들만 썼다. 하지만 아이의 모든 처음이 그때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앉고, 서고, 걷기 시작하는 순간들. 그런 날은 후세에 남길 신화를 기록하듯 온갖 아름다운 말을 동원해서 기록했다.



 


육아 일기 쓰기를 멈춘 건, 더 이상 아이가 크는 게 시시해서가 아니었다. 아이의 작은 변화를 기록할 만큼의 힘도 없었다. 암 진단을 받고 난 다음, 매일 살아내느라 바빴다. 그때 쓴 일기는 아프고, 슬프고, 괴롭고, 힘들다는 이야기만 반복해서 나온다. 그렇게 아프다고 쓰는 게 지겨워서 일기 쓰기를 멈췄다.      








돌아보면 쓰지 않던 기간은 내가 가장 건강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아파서 안 썼다고 생각했는데, 안 써서 아팠던 건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기는커녕 책 한 장 넘기기도 힘들었다. 눈이 뻐근해질 때까지 유튜브만 봤다. 휴대폰 배터리가 꺼지면 이불에 굴을 파고 들어가 울었다. 그러다 아이가 오는 시간쯤에야 눈물을 닦고 굴 밖으로 기어 나왔다.  




    

아주 사소한 일인데도 엄두가 나지 않는 것. 예를 들면 숟가락 드는 것조차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것. 나는 그게 우울증이라는 걸 잘 몰랐다. 과거의 나에게로 갈 수만 있다면 그 굴 속으로 들어가 부둥켜안고 실컷 운 다음 이제 병원에 가보자고 할 텐데. 네 탓이 아니라고, 아픈 몸처럼 마음도 치료를 해야 낫는 거라고 알려줄 텐데.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던 나를 다시 비춘 건 글쓰기였다. 매일 아침 연필로 마음을 쏟아내기 시작하면서 일상에도 빛이 들었다. 그제야 요리, 청소, 산책 같은 일들을 큰 마음먹지 않고 해낼 수 있게 되었다.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이 된 딸은 일기 숙제도 일주일에 한 번 겨우 해간다. 책 읽기는 좋아하면서도 글쓰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별로 써야 할 이유가 없으니 그럴 거라고 짐작해 본다. 외동인 덕분에 경쟁자 없이 늘 엄마 아빠와 소통할 수 있으니까. 마음에 쌓아놓은 말이 없으니 종이에 털어놓고 싶은 비밀이 있을 리가.    




  

여행이라도 갔다 온 날 ‘이렇게 특별한 하루를 그냥 지나가기 아쉬우니 기록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은근히 떠본다.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한다.

“엄마 일기에 나도 나오니까 괜찮아. 나중에 엄마가 쓴 거 보면 되지.”

자신의 추억을 아웃소싱하다니.





“엄마만 쓰면 뭐 해. 너도 같이 써야지.”

중얼거리다가 교환일기가 떠올랐다. 학창 시절 친구들끼리 한 권의 일기를 돌아가면서 쓰는, 엄밀히 말하면 일기보다는 편지에 가까운 글 말이다.  








“너 엄마랑 교환일기 써볼래?”

어린 시절 교환일기에 얽힌 추억을 최대한 재미있게 각색해서 들려줬더니 아이도 금방 눈을 반짝이며 써보고 싶어 했다. 그렇게 어제 처음으로 교환일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첫날, 나는 기대를 듬뿍 담아 한 페이지 꽉 채워 일기를 썼다. 하지만 아이는 불안하게 처음부터 분량이 짧다. 내 글의 반정도? 그마저도 이모티콘을 여러 개 동원해 채웠다. 며칠 뒤면 아이에게 답장이 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 혼자 쓰는 날이 계속될지도 모른다.       




교환 일기 첫 날. 엄마와 딸의 분량차이ㅎ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와 계속 교환일기를 쓰려고 한다. 곧 아이의 몸과 마음이 급격히 변하는 사춘기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관찰해 주던 시기를 지나 아이는 스스로 자신을 관찰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사춘기 아이는 필연적으로 입을 닫을 테니 그전에 글로 대화하는 방법을 익혀놓으려는 속셈이기도 하다.      





나의 사춘기는 봄이 아니라 겨울이었다. 너무 오랜 겨울을 보낸 탓일까. 동상 걸린 마음은 성인이 되어서도 욱신거리고 아팠다. 아이의 사춘기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고작 일기를 써서 건네는 일뿐이다. 아이에게 이것저것 따지고 묻는 대신, 교환 일기에 쓰고 싶다. 네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고, 소중한 아이인지를 여러 번 반복해서 아주 지겹도록 써줄 것이다. 어느 추운 날, 엄마가 써준 햇살 같은 말들에 언 마음을 녹이며 다시 나아갈 힘을 얻기를 바라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