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13, 2022
연휴를 맞아 조카도 볼 겸 언니 집에 다녀왔다. 한국에 돌아오길 잘했다고 느끼는 순간 중 하나는 하루하루 다르게 쑥쑥 커가는 조카를 볼 때다. 비록 다섯 살 남아의 넘치는 에너지를 따라가 주지는 못하는 이모지만, 그래도 나름의 방법으로 사랑을 나누어 주고 있다. 가까이에서 나를 오랫동안 지켜보아 온 친구는 조카를 대하는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여름의 초입께 가족 여행을 다녀온 뒤, 다시 두 달여만에 조카를 만나러 가는 길. 한 손에는 조카가 요즘 빠져있다는 미니 특공대 장난감을, 다른 한 손에는 얼마 전 출장을 다녀오면서 가족 몫으로 사 온 기념 선물을 들었다.
"내가 저리로 갈게. 아가씨가 여기 앉아요."
언니 집에 갈 때는 보통 전철을 이용한다. 이번에도 늘 그랬듯 1호선 신창행 전철에 올랐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양손 가득 짐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주말 한낮의 전철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도심에서 이런 일은 흔한 일이고, 고작해야 50분 남짓한 거리므로 서서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내가 선 자리 앞에 앉아 있던 어르신이 일어서며 말했다. 당신은 노약자석에 가서 앉겠다고 했다. 내가 깜짝 놀라 괜찮다며 고개를 가로젓자, 이번엔 근처에 앉아 있던 다른 사람들이 그 사이 난 빈자리를 일제히 가리켰다. 낯선 사람들의 호의를 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당황한 나머지 어색한 목례를 수차례 하고는 황급히 빈자리에 앉았다.
전철이 선로를 따라 덜컹덜컹 움직이기 시작하자, 잊은 줄 알았으나 완전히 잊히지 않은 옛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내 어머니는 밥벌이로 하루를 채우느라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았다. 하교 후 텅 빈 내 시간을 채워준 건 이웃하던 어르신들이었다. 그들은 철모르쟁이 아이가 매일 같이 찾아와 제집 살림을 마음껏 헤집고 다녀도 꾸지람 한 마디 한 적이 없었다. 세로로 두 번 접은 천 원짜리 한 장을 어머니 모르게 하라며 고사리손에 쥐어주었고, 안방 선반 위에 놓인 틴케이스에서 달콤한 간식을 꺼내어주었고, 이미 돌아가신 당신의 부모님이나 한국전쟁 이야기를 하며 아이의 무료함을 달래주었다. 그러면서 자주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따뜻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 모든 어린 날의 기억이 규칙적으로 내달리는 전철의 바퀴음과 함께 덜컹거리며 지나간 후에야, 나는 내게도 호의를 당연하게 받았던 때가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사춘기를 보낸 후 어느 시점부터 나는 더 이상 타인의 호의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게 됐다. D를 만난 건 나의 예민한 성정이 정점을 찍고 있던 때였다. 대학교 같은 과 선배였던 그는 수년간 이유도 없이 내게 많은 호의를 베풀어 주었고, 나는 그에 대해 왠지 모를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한참 전부터,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내가 미처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까지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언젠가 그가 부쳐온 편지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오래전 자신에게도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어주던 사람이 있었다고. 자신 역시 그 호의를 받아 지금 이렇게 살아있다고. 지금 자신이 베푸는 호의가 마음의 빚처럼 느껴진다면, 언젠가 스스로 호의를 베풀어 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을 때, 그때 그 사람에게 갚으면 된다고. 자신이 지금 내게 갚고 있는 것처럼.
언니 집에서 하루를 머문 후,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다시 전철에 올랐다. D역에서 나를 태운 전철은 이후 몇 정거장을 더 지나 P역에 멈춰 섰다. 이윽고 어린아이 둘의 손을 꼭 붙잡은 아이 엄마가 찻간에 올라섰다. 주변에 앉을자리가 부족해 보여 아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좋게 생각하여 주는 마음(好意)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시 그러한 마음을 베푸는 일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오는 동안 아무런 대가 없이 받았던 그 많은 마음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부기.
누군가의 호의를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아무것도 재지 말고, 의심하지도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