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27, 2022
열여섯이었다. 인문계 고교에 진학하겠다는 일념으로 각자의 고향집을 떠난 나이. 집안 형편을 헤아려 3년간 학비를 면제해준다는 학교를 선택한 나이. 앞으로 살아내야 할 삶이 어쩌면 이처럼 공평치 못한 선택의 순간들로 점철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한 나이. 되짚어보면 어린 나이였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 그 어디쯤에 서 있던 우리들은 그렇게 Y고의 장학생으로 서로를 만났다. 훗날에 우리는 우리가 보낸 학창 시절이 평범과는 다소 거리가 먼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런 사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 유별나고 소란했던 시절 덕분에 각자의 인생에 깊게 새겨질 친구가 적어도 다섯은 남았으니까.
Y가 제주에 입도한 건 지난겨울 일이다. 제주 출신의 반려자를 만난 게 이주의 계기였다. 뱃속의 아이는 자신과는 달리 섬에서 나고 자라게 될 거라고 했다. 친정 식구들과 친구들이 모두 육지에 있는데 대담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제주 출신의 내 어머니가 혈혈단신으로 육지에 올라와 느낀 외로움의 크기를 알기 때문에 친구로서는 조금 염려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아이가 태어나면 제주에 찾아가겠다고 한 약속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이번 제주행은 Y의 아이가 세상의 빛을 처음 보던 봄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도 친구들 모임이라면 변함없이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G도 여정에 함께하기로 했다.
제주로 떠나기 전 G와 내가 한 일은 간단했다. 교통편과 숙소를 예약했고, Y와 아이를 위한 선물을 샀다. 여행을 위한 준비는 그뿐이었다. 애초에 Y를 만나는 게 목적이었으므로 다른 건 논의할 필요가 없었다. 함께 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관계. 만나면 어디를 갈까, 무얼 할까, 일일이 묻고 답하고 정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어느 모임에서든 언제나 약간은 긴장한 상태로 있는 내가 마음껏 풀어지고도 불편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건, 우리의 관계가 오래전부터 그런 영역에 있기 때문이었다. G도 나도 제주로 떠나는 날 아침이 되어서야 동네 마실 나오듯 대충 짐을 싸서 날아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서로의 무성의함에 실소를 터뜨렸다.
스무 해 가까이 어울리면서도 우리는 단 한 번 다툰 적이 없다. 다투지 않고도 돈독해지는 관계가 세상엔 있다. 한때는 누구 하나 모난 사람이 없어 가능한 일인 줄로만 알았다. 우리의 관계가 긴 시간 동안 어떤 휘청거림 없이 깊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 주변 사정까지 헤아리는 애어른의 모습으로 서로를 처음 만난 열여섯 겨울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건 나중의 일이다. 우리는 너무 일찍 타인을 배려하는 방법을 알았다. 관계를 해치지 않기 위해 내가 노력한 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친구들은 노력했을 것이라고, 일방적인 노력만으로는 관계의 균형이 결코 유지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어느 날에는 생각하기도 했다.
속 깊은 Y의 남편은 먼길 온 친구들이 섭섭함을 느끼지 않도록, Y가 하루 동안 온전히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Y는 아이를 낳은 후 처음으로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져본다고 조금 들떠서 말했다. 동시에 아이 곁을 떠나는 것 역시 처음이어서 걱정이 된다고도 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아이를 홀로 돌볼 남편에게는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렇게 Y의 얼굴은 수시로 친구가 되었다가 엄마가 되었다가 아내가 되기를 반복했다. 이 모든 상황을 일찍이 겪어본 G만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Y의 남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아. 아빠가 있잖아. 아이가 아픈 게 아니면 오늘 밤엔 Y에게 연락하지 마세요."
해 질 녘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애월의 어느 식당에 앉아, 우리는 이미 닳고 닳은 학창 시절 이야길 다시 꺼내어 실없이 웃고 떠들었다. 그 무게감 없는 대화마저도 사실은 서로를 위한 배려에서 비롯된 거라는 걸 알아서 나는 조금 뭉클한 기분이 되었다. 서로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같은 순간의 다른 기억의 조각들은 해수면 위로 부서지는 노을빛처럼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사교적인 성격의 식당 점원이 우리를 일으켜 세운 건 해가 수평선 너머로 완전히 기울어지기 직전 무렵이었다. 그는 제주의 매직 아워는 짧으니 서둘러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우리를 노을이 보이는 테라스로 내보냈다. 고기를 굽다가 느닷없이 쫓겨나 사진을 찍고 있는 서로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세 사람 모두 자연스럽게 웃었다. 그렇게 근사한 추억이 또 한 장 남았다.
"너넨 언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해?"
깊은 밤,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던 오래전 그때처럼 불 꺼진 방 안에 나란히 누웠을 때 G가 물었다. 평소 진지함과는 거리가 먼 그 답지 않은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성실하게 대답을 고민했다. 그러고는 조금 주저하다가 말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이라고, 힘든 일을 말로 들추어 상대에게 또 다른 짐을 지우는 대신에 가벼운 농담으로 각자 짊어진 짐의 무게를 덜어주려 서로가 애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라고. 내가 내뱉은 문장의 끝에 온점이 찍힌 뒤, 세 사람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G가 정적을 깨뜨리며 말했다.
"야아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이해 좀 할 수 있게 얘기해. 내가 생각하는 어른이 된 순간은 바로 이거야. 노화가 눈에 보이는 순간. 나 요즘 흰머리 나잖아."
부기.
G는 감성이 조금 메마르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