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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 Jul 03. 2021

1. 시작은 삼국지였다

알파와 오메가

삼국지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연애하고 처음 그의 입에서 ‘삼국지’라는 세 글자가 나온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봤다.


쉴 때 게임을 한다길래, 어떤 게임을 하는지 물었더니 주르륵 설명을 시작했다. 그의 ‘설명력’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할 일이 있을 것 같다.


“나는 플레이어들끼리 실시간으로 경쟁하는 게임을 좋아하지 않아. 그래서 베그나 롤 같은 건 안 하지. 난 삼국지 게임을 해. 일본 게임사 KOEI라는 데가 만든 <삼국지 14>인데, 한 열다섯 번쯤 한 것 같아. 매번 다른 인물로 시작해서 천하통일까지 여러 시나리오를… (중략) 삼국지는 읽었어?


나는 그 순간 중학교 때 우리 반에서 좀 똘똘하던 남자애 하나가 떠올랐다. 갱지로 된 연습장에 연필로 삼국지 지도를 그리고 유비 몇만 대군, 조조 몇만 대군끼리 싸움을 붙이던 모습이. 내 기억에 그런 그림들이 몇 페이지였다. 무언가에 꽂혀 무아지경이 된 ‘오타쿠’를 처음 만났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에 그 애는 나를 좀 좋아했는데, 그 애의 그런 모습에 호감을 가졌던 것도 같다. 우리 집 책장에도 꽂혀 있는 삼국지는 너무 어려워서 못 읽겠던데.. 동양고전에 그렇게 열광하다니, 뭔가 있어 보이지 않나.


현재로 돌아와서. 삼국지에 대해선 다소 복잡한 감정이 앞섰다. 사학과를 졸업했지만 삼국지를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했다(그렇지만 난 한국사 전공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삼국지도 안 읽어봤다고?”하고 놀라면 위축도 되고 반감도 들었다. 아 근데 그거 다 옛날 얘기 아냐?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 조조 이름 알고 고사성어만 좀 알면 되지 뭘.


그리고 영웅들, 99% 남자들의 이야기라는 점도 마음에 안 들었다. 또 전쟁을 자꾸 하는데.. 무슨 몇만 대군, 군량이 얼마, 말이 몇필, 매복, 급습, 이런 먼 옛날의 전술들도 너무 낡게 느껴졌다. 명분, 실리 이런 단어도 너무 올드하고… 아무튼 내가 삼국지에 관심이 없던 이유가 아주 많았다.


이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자 지금의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고. 삼국지에 대한 진입장벽이 계속 높아지고 있는 건 사실이라고. 하지만 삼국지가 끊임없이 새로운 텍스트로 재해석되면서 현대에도 울림을 줄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고.


그러면서 만화로 된 삼국지를 하나 권해줘도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청소년용으로 나온, 캐릭터들이 동글동글하게 그려진 교육용 만화 삼국지를 쥐어줄 줄 알았다. 그가 들고 온 만화책은 <창천항로>였다. 하늘이 자기편이라고 믿는 나르시시스트 조조를 주인공으로 하는 19금 만화였다.

19세미만 구독불가

만화도 제대로 안 보고 범생이로 살아온 나로서는 깜짝 놀랄만한 그림들이 이따금씩 등장해 낯설었지만 창천항로는 나름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끝까지 보기엔 잔인하고 야해서 정신력이 달렸다.


이번엔 전략을 바꿔 고전 중 고전이라는 이문열 삼국지를 권해줬다. 1권을 읽었더니 2권을, 3권을 앞서가며 쥐어줬다. 그런데 잘 읽히지가 않았다.


그러더니 다시 넷플릭스에 올라온 95편짜리 중드 <신삼국지>를 권했다. “현대적 해석이 담기고 고증이 잘 된” 드라마라고 했다. 마침 그 무렵 우리 부모님도 신삼국지에 빠져 계실 때라 한 번 시작해볼까 싶었다.


처음에 나는 칭찬을 받는 게 좋았다. “오빠 나 삼국지 보고 있어.” 이러면 오빠가 굉장히 기특해했다. 초반 지루함을 이기고 한편 한편 보다 보니 초선이랑 여포 이야기가 마음을 울리는가 하면, 손견 아들 손권의 총명함이 기특하고 뒷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 유명한 제갈량은 언제 나오는 거야. 아 드디어 삼고초려 넘었다! 그럼 적벽대전은 언제 하는 거야? 조조가 저렇게 굴욕을 당했구나.. 똑똑한 줄 알았던 손권은.. 주유 너무 짱난다.. 소리만 지르고. 방통 배우는 정말 앞니가 없는 걸까 아님 분장일까… 아 방통이 저렇게 죽다니. 조조가 조비한테 너무한 거 아닌지. 사마의 포스 쩌네. 유비 결국 황제가 되고 마는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궁금한 점이 생기면 남편이 친절하게 앞뒤 맥락을 다 설명해 준다. 삼국지 정사에서는 이러이러한 이야기뿐인데 삼국지연의에서 저러저러하게 묘사를 했다. 여기 나오는 이 인물은 이때 조조를 보좌했던 누구 누구 누구를 합쳐 캐릭터를 구축한 것 같다. 유비하면 명분인데 이 드라마에서는 실리를 중시하는 모습으로 현대화시켰다… 등등.


삼국지의 매력을 비로소 알아가고 있다. 남편의 삼국지 사랑이 못내 질투 나지만 남편 덕분이다. 역사적 사실과 인물에 대한 다른 시각, 이를 타당하게 해석하고 논증하려는 노력, 현대인이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 그러면서 이어지는 고전의 생명력…! 이게 바로 내가 역사를 좋아했던 이유였다. 학점은 별로였지만, 이런 통시적 분석과 해석은 늘 짜릿했다.


결혼하고 나서는 넷플릭스로 틀어놓을 콘텐츠에 서로 합의를 못 볼 때, 가장 쉽게 동의하는 콘텐츠가 삼국지가 되었다. 심지어 드라이브 중에 삼국지 OST를 자발적으로 튼 적도 있다. 코로나가 물러가면 가족들과 중국으로 삼국지 기행을 떠나기로 약속도 했다.


어제는 자기 전 시트콤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How I Met Your Mother)>를 봤다. 약혼한 여자 친구 스텔라가 스타워즈를 좋아할지 전전긍긍하는 주인공 테드 모습이 딱 내 남편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테드는 감기 걸려 아플 때도 스타워즈를 보고,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스타워즈를 본다. 스텔라는 테드에게 스타워즈가 정말 재밌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지켜보던 친구가 평생 테드를 위해 스타워즈를 좋아하는 척을 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 스텔라는 기꺼이 “Yes”라고 말한다.


행운아 인정합니까!


사실 나는 스텔라처럼 스윗하고 로맨틱하게 남편의 로망을 지켜주지는 못한다. 보기 싫으면 싫다 재미없으면 재미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삼국지를 조금 좋아하게 됐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남편아 보고 있지? 심지어 지난 주말엔 병맛 일본 영화 <신해석 삼국지>를 보러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영화관까지 동행해 주었잖아.. 그리고 투머치 삼국지 설명은 지속적으로 조심해 주길 바라. 그치만 내가  즐겁게 들으려고 노력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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