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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 Oct 11. 2022

다시, 물 속으로

혼자, 애월(2)

고민 없이 물에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물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들어가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마냥 달려들어갔던 기억이 있어.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하는 데에 특별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던 건 그때의 '나'여서일까 '그때'의 나여서일까.


어쩐지 다시 온 제주 바다 앞에서 나는 신발을 벗을 수가 없었다.



#3



1.5일의 출장을 마친 금요일 오후 2시, 혼자 여행이 시작됐다. 회사 동료들과 커피 한 잔 마시고 공항으로 가는 그들을 배웅해준 뒤 이어폰을 꽂는다.


날씨가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그간 여행 중에 손에 꼽게 하늘이 푸르다. 파란 하늘, 하얀 뭉게구름. 혼자서도 즐겁게   있을까 걱정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벌써 좋다. 여행은 날씨가 다라는  별로 공감하지 못했었는데(일단 떠나면 뭐든  좋은 사람), 혼자 여행 가보니 알겠다. 여행은 날씨가 다가 맞다. 어깨에 배낭이 무거워도, 종일 한마디도 못했어도, 묵묵히 걷기만 해도 좋더라.

햇살이 내리쬐서 눈이 부시고, 가방 한쪽엔 얌전하게 선글라스가 꼽혀있었지만 선글라스 끼지 않았다. 맨 눈으로 보는 바닷물의 푸르스름과 햇살이 반사되는 반짝임이 좋아서. 지금도 회사에서 몰래 일기 쓰는 중인데, 사무실이 통창이라 해가 나를 공격하지만 블라인드 안 내리고 버티고 있다. 타들어갈 거 같아도 이런 따사로움이 좋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아니고, '타들어가도 좋으니 너 해처럼 나에게 쏟아지라.'인 건가.


서핑을 하기로 한 곽지까지 택시를 타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도로 찾아보니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다. 택시와 소요시간도 별 차이 없길래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202번! 이게 여행객을 위한 버스인 건지, 내가 가고 싶은 관광지들과 공항까지 연결되어있는 노선이고 심지어 제주 버스 치고 꽤 자주 운행했다.(배차간격 10-20분) 덕분에 여행 내내 이 버스 열심히 타고 다녔다.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셀카 좀 찍다가 버스를 타고 곽지로 향했다. 버스에서 노래를 들으며 창밖을 구경하다 보니 금세 곽지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익숙한 풍경. 겨우 3번째 오는 거면서도 자주 온 것처럼 낯이 익다. 하긴 3번째 긴 해도 2번을 겨우 2달 전에 왔으니, 월평균 방문수 1인 건데, 그러면 자주 온 거 맞긴 하다. 걷다 보니 땀이 슬금슬금 나기 시작했다. 서울 날씨 생각해서 가을 옷 입고 왔는데, 제주는 아직 여름인 거 왜 아무도 나한테 말 안 해줬나요!!!! 다행히 입고 간 니트가 집업 형태라 벗어버리고 끈나시 차림으로 돌아다녔다.


여름 날씨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늘에 있으면 시원한 게 마냥 더운 여름이랑은 또 달랐다. 딱 좋았다. 이런 날씨 너무 좋아.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눈감고 앉아만 있어도 좋아. 이런 날씨에 세미나 끝나자마자 다시 가을인 서울로 돌아가야 했으면 눈물 났을 거야.


바닷바람 쐬며 '너무 좋다~'하고 앉아있는데, 바다를 보니 좀 쎄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파도가 없어도 너무 없는데... 서핑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파도를 탈 수 있는 수준인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일단 예약을 했으니, 걱정 어린 마음은 뒤로 넘기고 그늘을 찾아 또 걸었다. 돗자리 피고 좀 누워있고 싶었다. 전날에 같은 방을 쓴 동료와 수다를 새벽 4시까지 떠든 바람에 잠을 별로 자지 못해 낮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 맞는 사람과 하는 대화는 늘 즐겁고 잠을 줄인 게 아쉽지 않게 힐링되는 대화이긴 했다.


곽지해변 중앙에 용천수를 이용한 탕 비슷한 게 있는데 그 탕을 중심으로 돌벽이 세워져 있다. 그 벽의 그늘진 부분에 돗자리를 피고 배낭을 쿠션 삼아 기대고 누워서 눈을 감았다. 살짝 잠이 들었던 것도 같다. 눈을 감고 파도소리를 듣고 있자니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고민 없이 물에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물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들어가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마냥 달려들어갔던 기억이 있어.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하는 데에 특별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던 건 그때의 '나'여서일까 '그때'의 나여서일까.


어쩐지 다시 온 바다 앞에서 나는 신발을 벗을 수가 없었다.

 

돗자리 챙겨가기 참 잘했지.

낮잠을 조금 자곤 화장실을 가기 위해 다시 돗자리를 접었다. 화장실 들렀다 나왔는데 해변 근처 벤치가 때마침 비어있었다. 서핑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던 터라 그곳에서 또 자리를 잡았다. 멍하니 해변에 사람들을 구경하며 일기장을 꺼냈다.


#4


이렇게 놀다 보니 서핑할 시간이 되었다. 해변에서 자세를 몇 번 연습해보고 물속으로 들어갔는데, 내 생각보다 더 최악의 서핑이었다. 웬만하면 최악이란 말 정말 안 쓰고, 원래도 그렇지만 특히 여행 가서는 더더욱 불평 안 하려고 하는 사람인데... 이건... 너무... 최악이었다. 최악이었어. 다른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최악이라는 표현이 맞다. 지난 7월 제주도 서핑의 기억이 참 좋았어서 고민도 없이 예약했었는데...
물론 파도가 없는 게 당연히 서핑 샵 잘못은 아니지만, 이 정도 파도면 예약을 받지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아니 받을 수는 있지만, 사전에 안내는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도가 약한 게 아니라 파도가 없었다.


음.. 앞으로 서핑할 때는 더 신중하게 결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습이 열리니 당연히 파도를 탈 수는 있는 정도일 거라고 생각한 나의 순수함을 탓한다.


불평 끝!


날씨는 좋았긴 해! 날씨만!


서핑 강습을 마치고 50분 정도 자유시간을 즐겼다. 그새 해가 서서히 넘어가는 시간이 됐다. 바다 위로 노을이 졌다. 서핑 보드 위에 앉아서 지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강습 내내 불쾌하게 울렁거리던 화나는 마음이 조금씩 진정됐다. 파동에 몸을 맡기고 붉어진 하늘을 눈에 담았다.


쉽게 걸은 길은 아쉬움이 남는다. 종착지가 같아도 그렇다. 힘들게 걸은 길의 종착지가 그와 같을지라도, 쉽게 걸은 길의 끝에서는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추워질 때까지 노을을 보다가 바다에서 나왔다.


서핑 샵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어느덧 어둑해져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노을


샵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바다 위로 이어지는 붉은색 띠가, 어느새 짙어진 푸른색의 하늘이 자꾸 눈에 밟혀 배고픔도 잊고 한동안 그 앞에서 서서 또 풍경을 바라봤다. 혼자 여행하면 좋은 것 중에 하나는 마음이 끌리는 곳에서 얼마든지 시간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 가는 만큼 시간을 보내고 또다시 202번을 타고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이제껏 도미토리에서 자본적 한 번도 없으면서 뜬금없이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한 이유는 단순했다. 한 번쯤은 해보고 싶어서. 그 시절에만 해볼 수 있는 경험이 있다는 말 안 좋아하시만, 자꾸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낯가리고 낯선 사람들 많으면 기운 빠져서 대학 새내기 시절에 새로배움터 줄여서 '새터'에 한 번도 안 갔는데 그게 두고두고 후회가 됐다. 이제는 암만 가고 싶다고 해도 못 끼잖아... 노력 없이 참석 대상자이던 시절에 가봤어야 했다. 그때 그 감성 아마도 내 인생에는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자꾸 아쉬워지는걸.


그래서 이번에는 도미토리에서도 한번 자보고 청춘여행의 대명사 중에 하나인 게스트하우스 파티에도 한번 가보고 그러려고 했지! 그래서 파티 여는 게하로 숙소 잡았다. 그런데 일단 전날 수다타임 새벽 4시까지 하느라 잠을 잘 못 자기도 했고, 서핑까지 끝마치고 나니 온몸이 피곤해서 도무지 낯선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가 없는 에너지 상태가 되어버렸다. 더불어 세미나 일정 내내 이미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해서 나의 인적 게이지 바닥난 상태이기도 했다. 파티 참석할 거냐는 사장님의 전화에 고민 없이 아니라고 답했다. 게스트하우스 파티는 다음번에 기회가 된다면, 일행이 있는 상태에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도전해야 할 거 같다. 그날의 나에게는 지금 생각해도 역시 무리였다.


숙소에 도착하니 또 내 도전의 의지와는 달리 사람이 별로 없었던지 3인실을 혼자 편하게 쓰라고 하셨다. 어쩌다 보니 나름 용기 낸 도전이었는데 2개 다 실패했다. 도미토리도, 게하 파티도 안녕!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는데, 위치만 보고 대충 고른 탓이긴 한데 시설이 많이 낙후되어 있더라... 쿰쿰한 냄새가 났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침대의 메트릭스가 삐걱거렸다. 숙소 정말 안 가려서 친언니가 너는 대체 맘에 안 드는 숙소가 있었어? 하고 물을 정돈데 그날의 숙소는 조금... 쉽지 않았다. 하지만 불평은 하지 않는다. 이미 예약금을 지불했고 나는 여기서 잘 거고 불평해봤다 달라지는 건 없고, 나의 소중한 기분만 상하게 되는걸!


누적된 피로로 녹을 거 같은 몸이긴 하지만, 배는 너무 고파서 일단 저녁을 먹으러 다시 나가기로 했다. 내가 머무른 숙소는 1층은 게스트하우스이고 2층은 같은 사장님이 운영하는 술집인데, 게하 파티도 그곳에서 한다고 한다. 나는 게하파티에 참석하진 않지만, 배는 너무 고프고 날은 이미 깜깜해졌고, 멀리 나갈 힘도 없으니 2층 술집 구석에서 혼자 저녁을 먹기로 했다. 올라가 보니 다행히도 파티 인원 10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손님이 없어 조용히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안주를 구경하다가 오꼬노미야끼를 시켰다. 왜냐면 양배추가 많이 들어가 있어서 속이 편할테니까! 나이가 들수록(그래 봤자 아직 어리지만) 점점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원래도 야식 안 먹긴 하지만 더더욱 야식 안 먹게 되었다. 이렇게 꽤 늦은 시간에 음식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속 편한 음식(예를 들면 양배추가 주재료인 음식)을 찾게 된다.


오꼬노미야끼는 맛있었는데 생맥주는 정말 별로였다. 전에 브루어리 투어 가서 배운 건데, 생맥주는 회전율이 아주 중요하다고 한다. 노줄의 청결도나 맥주의 신선함 모두 얼마나 빨리 맥주를 뽑아내냐에 달려있어서. 그런데 여기 술집 보아하니 게스트하우스 손님 정도만 이용하는듯해 보이고 그러니 목요일까지 손님 거의 없었을 거 같고, 오늘은 금요일이고.. 음 여기까지. 맥주 냄새나고 텁텁해서 고작 1잔 마시는데도 남겼다. 현명하지 못한 판단이었어. 이런 곳에 왔을 땐 병맥주를 시키도록 하자. 다음 잔은 산미구엘 병맥을 시켜 마셨다.


맛있는 안주와 그렇지 못한 맥주


혼자서 맥주를 홀짝이며 가만가만 뒷테이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거 좀 좋은걸. 기운은 안 빠지면서 '저런 게 게스트하우스파티구나..' 하는 간접경험은 할 수 있고 말이야. "세분은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언제 돌아가세요?" 하는 말소리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맥주를 마신다. 혼자 놀기 좋아해서 그런가 나는 참 좋았는데 사장님이 혼자인 내가 안쓰러워 보였던지 심심하진 않냐 혼자서 괜찮냐 하고 자꾸 말을 걸었다. 내향인 특 낯선 사람이 자꾸 말 걸면 불편해서 도망감. 술 좀 아쉬웠지만 방으로 돌아갔다. 결제하는데 사장님이 이제 혼자 뭐할 거냐고 또 걱정스럽게 물어봄. "이제 잘 거예요!" 하고 도망간다. 따스한 관심이 좋은데 싫어요. 뭔지 아시나요?


낯선 곳에서 혼자 자기. 침대는 딱딱하고, 멀리서 미세하게 대화 소리가 들리고, 전할 말은 있지만 전할 곳이 없었다. 조금 슬펐다. 언니가 쿨병 걸려서 슬픈 마음을 내버려 두지 못하는 거라고 했는데, 그날은 쿨병 치료하고 슬픈 마음 가만히 두었다.


슬픈 날도 있는 거지. 굳이 통제하지 않는 마음도 있는 거지.


그걸 왜 이제야 알았지?


그럴 수도 있는 거지.


.

.

.


나는 계속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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