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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현 Jan 12. 2023

친구라는 이름으로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 조덕행


군대를 다녀온 후 바로 복학을 하게 되었다. 

학교생활에 온정신을 쏟아냈고 보란 듯이 학교 프로그램으로 가고 싶던 중국에 단기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그해 여름, 중국에 가기 약 3주 전의 여름방학 나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고향에 있는 계곡으로 놀러 갔다. 매해 여름 마다는 아니어도 최대한 만나서 계곡에 가자 했던 우리의 약속 이었고, 함께 하는 친구들은 그저 세상의 전부 같았다. 그때의 찬란했던 여름의 계곡은 우리의 청춘을 더 반짝이게 했고  그 안에서 헤엄치던 서로가 더욱더 깊어졌으리라. 어린 아이들마냥 물총놀이를 하고, 계곡에서 수박을 깨 먹고 이제는 어른 이라며 가벼운 술 한잔에 많은 대화도 나누었다. 여전히 선명한 그 날은  그날의 추억으로만 기억 속 한쪽에 저장해 두고 있다. 술 한잔에 나눈 우 리의 진솔한 대화들이 끝나지 않았고 웃음은 넘실넘실 자꾸 다가왔다. 그렇게 행복했던 여행이었다. 소중한 사람들과 소중한 여행. 


그러나 그 행복한 기억이 추억으로 바뀔 그 시점에 어떠한 오점 하나가  콕 찍혀버렸다. 새하얀 도화지에 정말 콕 찍힌 매직 자국처럼.  계곡에 다녀온 다음 날, 다시 각자의 자리로 흩어진 친구들과 나. 나는 그날 엄청난 얘기를 듣게 되었다. 계곡에 함께 다녀온 친구 중 한 명의 결혼 소식이었다. 온몸이 오싹했다. 놀라움이 온몸을 지배했다가 긴장이 풀어지고 물밀 듯  찾아온 배신감이라는 감정은 나의 분노를 치밀게 하기에 충분했다. 계곡에서 술 한잔에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가, 또 계곡에 가지 않았 다고 한들 연락은 수시로 하던 우리라서 말할 틈이, 타이밍이 없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억울했고 속상했고 원망스러웠다. 단연 나에게  말을 안 해서뿐만 아니라 내가 중국에 어학연수를 가게 된 후에 결혼식이  행해진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더 깊은 암흑 속으로 밀어내는 듯했다. 너무나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내가 못 가다니. 다른 누구도 아닌 친구의 결혼식에. 심지어 한국에 있는 것도 아니라니!  억울함, 원망스러움, 각종 여러 감정이 겹쳐 내가 더 크다며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는 내가 중국에 가기 2주 전에도, 1주 전에도 아무런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갈수록 조마조마 괘씸함도 커졌다. 당연히 만남 도, 연락도 계속됐는데 그 말만은 하지 않는 친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덧 출국 날 당일이 되었다.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말을  안 하다니, 비행기에 탑승 직전 나는 그제야 먼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 다. 친구는 평소와 같이 너무나 태연했고, 나는 흥분에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분노할 일일까 싶지만, 그때는 정말 억울했다는 표현 이 적절했다. 


왜 결혼하는 거 나한테는 얘기하지 않았느냐며 3주간의 울 분을 토하던 순간, 어쩌면 엄청나게 크게 소리 지르듯 말해서 놀랐을 수 도 있는데 나를 화나게 한 건 그럴수록 더욱더 침착한 녀석의 목소리였 다.


 “중국 잘 다녀와라, 그렇게 됐어. 너 중국 가 있는 사이에 결혼한다고  미리 말하면 가기 전까지 너 또 얼마나 속상해할 거야 그거 알아서 말 못  했다. 여러모로 생각이 짧았네.” 


너무나 차분한 어투와 목소리, 친구는 사실 늘 그랬다. 차분했고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노발대발하는 건 어디를 가나 내 쪽인가보다. 최대한 화를 삭이고 그래도 말을 이어나가야 했다. 엄마가 해준 말을 목 소리로 복사 붙여넣기 했다.


 “엄마가 내 인생에 진짜 필요할 것 같은 사 람은 무조건 잡으라고 했어, 그래서 나는 무조건 너랑 평생 친구 할 거 야.” 


마지막 통화였다. 많은 것을 규제하고 있는 중국이라는 나라는 친구들과  작은 소통 연결고리도 허락해주지 않으려 했고 인터넷이,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것 또한 한몫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친구들과 연락을 계속했고 친구 의 결혼식 당일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위치를 잡고 쭈그려 앉아 친구들의 영상통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식을 볼 수 없으니 영상통화로 라도 봐야겠다고 터지지도 않는 와이파이를 붙잡고 전날 밤 얼마나 위치 를 옮겨가며 테스트 통화를 했던가, 친구가 알면 얼마나 웃을까. 결혼식이 시작되고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 얼굴, 그리고 신랑·신부의 모습  매끄럽게 연결되는 영상은 아니었어도,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도 그래도  멀리 타국에서 그것만으로 만족이었다. 그때의 추억, 감정, 생각 모든 걸  담아 다시 한번 결혼 축하한다 친구야. 후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원망이나 분노보다는 결혼식에 못 갔다는  미안함이 커졌다. 


그래서 친구의 첫째 아들 돌잔치에는 무조건 가자는 생 각이 컸고, 실제 실행으로 옮기게 되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살던 친 구 부부를 보러 가는 길은 정말 멀었지만, 처음으로 보는 조카와 제수씨, 

오랜만에 보는 친구까지 나를 설레게 하는 원동력은 충분했다. 결혼식은 못 갔지만, 

돌잔치는 왔다 라는 것도 보여주고 싶었고.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친구 부부와 조카는 나와 같은 지역에 살게 되었 다. 어쩌다 보니 나도 이 지역으로, 친구 부부도 큰맘 먹고 멀리서 윗동네  여기까지 올라와 우연히 같은 지역에 살게 되었다. 같은 지역이지만 동네 가 달라 자주 보지는 못해도 같은 지역에 있다는 그 생각은 항상 우리를  가깝게 느끼게 해준다. 친구를 똑 닮은 조카가 너무 이뻐 보러 갈 수 있 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고등학교부터 대학교도 같이 비슷한 지역으로 갔고, 군대도 같은 시기에 가서 휴가도 맞춰 나올 수 있었고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함께 하고 있고, 20대 끝자락에서 바라보는 나의 삶 안에 네가 여전히 친구라는 이름으로  존재해줘서 고마워, 늘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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