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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요작가 Jan 17. 2024

용기가 필요한 순간

글.그림 김유미

꾸물거리는 하늘이 심상치 않더니 결국 비가 오기 시작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 10년째 고민만 하던 서핑을 드디어 배우러 가는 날인데, 태풍이 온다고 하니 또 망설여졌다.


 서핑배우기를 결심한 때가 2016년 스페인 여행 중이었다. 바르셀로나 해변으로 기억되는데, 수영복 반바지 차림의 소년이 보드를 들고 털레털레 바다로 향하는 모습에 시선을 뺏겼었다. 저렇게 그냥 바다로 들어간다고? 소년은 마치 자전거 타듯 자연스럽게 보드 위로 올라가 파도 위를 넘나들었다. 분명 파도는 헤쳐 나가는 것이라 배웠는데 그런 파도 위를 올라타다니! 오히려 더 큰 파도가 오기를 기다리는 듯 소년은 수평선을 바라봤다. 수영을 배우고 나서 물에서 노는 일에 자신이 생긴 터라, 내가 배울 다음 물놀이는 서핑이라 마음먹었었다.


 여행 후 친구에게 같이 서핑을 배우자고 했지만,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동호회를 찾았지만 혼자 나가는 것이 어색했다. 시간이 지나 서핑이 유행하면서 원데이클래스와 같은 강습이 생겼을 땐, 막상 전신수영복을 입을 자신이 없었다. 살을 빼고 도전하겠다고 미뤘었다. 그러던 중 서핑인 취미인 친구를 알게 됐는데, 그의 생생한 경험담에 나는 다시 뒷걸음질 쳤다.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가 서핑할 때 보드와 발을 긴 끈으로 묶어 연결한다는 것이다. 리 쉬라는 끈인데 그게 생명줄인 줄도 모르고 난, 그저 내 몸이 보드에 묶여 떠내려가는 상상으로 포기했었다.


 소름 돋는 SNS 알고리즘은 잊을 만하면 서핑을 떠올리게 했다. 영상 속 파도 타는 서퍼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한때 서핑 배우려고 했는데.’라는 말이 입에 붙어 버렸다. 죽기 전에 고작 한다는 소리가 ‘아! 나도 서핑배울 걸.’ 이럴 수는 없었기에, 곧장 부산 다대포에 있는 서핑 숍에 강습 신청을 했다.


 당장이라도 비를 퍼부을 것만 같은 어둑한 구름 아래, 나는 찰싹 들러붙는 서핑 수트를 입고 내 몸보다 큰 서프보드를 머리에 이고 바다로 향했다. 태풍 전야의 바다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같이 수업을 듣는 커플과 나, 그리고 다른 강습의 수강생 몇 명 정도였다. 오히려 사람이 없으면 초보자에게는 안전하다고 했다. 거기에 햇볕이 없고 파도가 커서 서핑하기 딱 좋은 날씨라고 했다. 저 멀리서 넘실거리며 밀려오는 검은 파도를 보고 있자니, 그저 겁먹은 우리를 달래 주는 소리로 들렸다.


 수업은 간단했다. 보드에 엎드려 팔을 젓는 패들링 자세, 파도가 올 때 보드에서 일어나는 테이크오프 자세, 2가지 동작만 기억하면 됐다. 모래사장에서 여러 차례 연습하고 안전 수칙을 한 번 더 듣고 나서야 바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물 만난 곰처럼 보드를 밀려 바닷속으로 풍덩 빠졌다. 파도가 오는 타이밍에 강사가 보드를 밀어주면서 UP! 하고 소리치며 신호를 준다. 그 순간 민첩하게 테이크오프 동작으로 일어나면 된다. 허벅지와 배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힘을 주는 순간 뒤뚱거리며 물에 빠지기를 반복했다.


 보드 위에 누워 일렁이는 바다를 느끼고 싶은데, UP! 신호 소리에 절로 긴장되고 점점 귀찮아졌다. 몇 번의 도전 끝에 찰나의 순간 파도를 탔지만, 일어나기도 전에 보드에서 떨어지는 일이 두려워 만끽할 수가 없었다. 결국 고개를 앞으로 숙이며 넘어지는 바람에 얼굴이 보드에 부딪혔다. 물속에서 별이 본 순간 모든 의욕이 사그라들었다. 보드 위에서 타이밍에 맞춰 일어나는 일이 계산도, 눈치도, 몸도 느린 내게는 곤욕이었다. 상처까지 입었으니 포기할 좋은 핑계가 생겼다.


 서핑을 배운 지 2시간도 채 안 돼서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몇 년을 품어 온 버킷리스트치곤 허무한 결말이었다. 진즉에 해봤다면 그동안 서핑 타령을 하지 않았을 텐데. 죽기 전에 서핑을 안 해봐서 속상한 일은 없겠다 싶으니 기분이 개운해졌다. 충격받은 미간은 부어올라 제법 콧대가 생겨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일단 해보길 잘했다.

ⓒ '용기가필요해' / 72.7x60.6cm / oil on canvas / 2019 / 김유미 작가

 나의 버킷리스트에는 서핑처럼 묵은 꿈들이 쌓여 있다. 먹고 싶은 것이 많은 만큼 하고 싶은 일도 많다. 서핑 대신 다른 물놀이 찾기, 포르투갈 한 달 살기, 제주도 자전거 여행과 눈 내린 한라산 등반하기 등 막상 해 보게 되면 별로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경험해보는 자체로도 발견의 위안이 있음을 알기에 우선 시작해야겠다. 20년 후 우리는 했던 일보다 하지 않았던 일로 인해 더 크게 실망한다고 한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말이다. 하고 싶은데 하지 않았던 일을 순차적으로 해내다 보면 계속해서 하고 싶은 일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걱정하는데 시간을 붙잡고, 가리는 것이 많은 나는 늘 시작이 느리고 쉽지 않다. 그런데도 꿈꾸기는 멈추지 않는다. 오늘의 꿈은 이 글을 마치고 크림치즈 호두과자를 먹는 것이고, 이번 여름에는 프리다이빙을 배우고 싶다. 새해 계획은 두 번째 책을 출판하고 초대 개인전을 여는 것이다. 언젠가는 매일 쓰고 그리며 사는 일상의 꿈을 이루고 싶다. 내게 꿈은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다. 좋아하는 디저트를 먹기 위해 꼼짝없이 앉아 글을 쓰고, 새로운 물놀이를 배우기 위해 다이어트와 체력단련을 해야 한다. 전업작가의 꿈을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지출을 과감히 줄여 저금해야 하고 실력을 갈고닦는 일에도 공들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이 읽고 쓰고, 보고, 그려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비결은 일단 시작하는 일이다.
마크 트웨인


 우리가 하는 일에도 관성의 법칙이 작용한다고 한다. 관성의 제1 법칙에 의하면 어떤 물체이든지 움직이기 시작하면 개입하기 전에는 계속 간다. 한번 시작하면 관성의 법칙에 따라 어떻게든 지속해내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든 해봐야 다음 단계로 나아가거나 또 다른 일을 찾을 수가 있다. 그것이 새로운 만남이든, 도전이든 내게 잘 맞는지 알기 위해서는 한번 부딪혀 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시작을 미루다 결국 태풍이 부는 바다에서 맞서지 않도록 기회가 왔을 때 움직여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어디든 꽃길이 될 테다. 마주한 향기가 좋고 싫음은 그때 돼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


 이제 충분히 마음의 스트레칭을 마쳤으니 나도 용기를 내어 움직여 보려고 한다. 우선 이 글의 끝이 보이니, ‘겉바속촉’의 부드럽고 고소한 크림치즈 호두과자를 사러 나가야겠다.


김유미
일과를 끝낸 저녁 시간에 그림을 그린다. 그림만큼 글짓기도 좋아한다. 온종일 그리고 쓰며 사는 삶을 꿈꾼다. 쓴 책으로는 『물감을 사야 해서, 퇴사는 잠시 미뤘습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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