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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시Chalsea Oct 19. 2023

아버지, 저를 손절매하세요

부모와 완전히 독립하는 길


#소소한 #농사이야기



콩은 땅을 기름지게 한다.

콩 뿌리에는 공기 중에 있는 질소를 고정시키는 박테리아(일명 '뿌리혹박테리아')가 산다.

땅에 질소와 유기물이 많으면 기름지다.



유기농의 기본 원칙 중 하나는 '돌려짓기'

이렇게 콩으로 비옥하게 만든 땅에 짓는 다음해 작물은 잘 된다.

(고 한다. 아직 내가 실제로 느껴보진 못했다. 그렇겠거니 - 하는 수준)



콩 알곡는 '노린재'라는 벌레가 좋아한다.

콩 꼬투리가 맺히기 시작하면,

어느새 노린재가 날라와 진물을 쪽쪽 빨아먹는다.

그래서 콩깍지밖에 남지 않는다.

콩 알곡는 없다.



콩은 자랄 때 거의 두뼘만 남겨놓고, 아예 베어버린다.

이렇게 베어야지 콩이 더 풍성하게 - 부케처럼 자란다.

순치기라고 한다.

콩을 순쳐주지 않으면 키만 크고, 알곡은 조금밖에 열리지 않는다.

이 정도로 베어버리면 죽지 않을까... 하는 정도로 베어줘야 한다.

내 눈에는 정말 죽을만큼 힘들고, 이를 이겨낸 콩은 후손을 많이 남긴다 라고 보인다.



그렇게 보면 사실 농사도, 다른 인간들의 활동들처럼, 인간 중심적인 활동이다.

더 많이, 더 빨리 얻기 위한 농사 기술들.

실은 죽지 않을 정도로 식물을 괴롭히는 거다.

그럼 그 식물의 열매는 더 많아지고, 맛있어진다.

아이러니 아닌 아이러니.

희극인가 비극.


실한 우리 콩 (2023) // 짜식들...



올해 우리 콩 순치기는 내가 때를 놓쳤다.

그래서 뒤늦게 급하게, 순을 쳤다.

이런 때늦은 모습을 보고 동네 어르신들이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근데 이미 늦...

다 베어버렸다.



에휴, 올해 당부일지에도 적어놓아야겠다.

때늦지 않게 콩 순치라고.






이제 10월 중순, 콩 수확 시기가 다가온다.

마을 밭을 둘러보니 다들 콩밭 상태가 안 좋다.

콩 꼬투리가 다들 홀쭉한 것이, 병인지 노린재인지.



근데 우리 콩밭을 둘러보는데, 이게 웬걸.

알곡이 너무 실하게 맺혔다!

뒷걸음치다가 제대로 터트린거지~



올해의 날씨 - 비 많고, 일조량이 적은 - 같은 경우

조금 늦게 순을 치면서, 성장 속도가 더뎌

더 실한 알곡을 맺힐 수 있었던 것 같다.




콩밭 지날 때마다

세상 일은 한 면만 볼 것이 아니라, 내가 실수라고 생각하는 일을 통해서도 배움이 있다는 걸 느낀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받아드리느냐.



콩밭 가는 길. 오른쪽 중간이 콩밭









농사를 처음 짓는 분은, 특히 부모님 생각을 많이 한다.

이렇게 고생하면서 나를 키우셨겠구나 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내 부모님은 농사로 나를 키우지 않으셨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도 농사를 업으로 삼으신 분은 없다.

그래서 농사를 지을 때 내게 드는 생각은,




부모님은 내가 몸 쓰는 일 하지 말고, 편하게 일하라고
그렇게 평생을 애지중지 키우셨는데
 나는 여기서 이러고 있네.
내가 굳이 농사를 짓겠다고 해서 말이지






부모님.

그 중 이번 편은 아버지.





지금 돌아보면 아버지는 딸바보다.

여자 셋 밖에 없는 집에서 가장 먼저 '사랑해'라고 말을 한 딸바보.

손 잡기와 포옹을 시도 때도 없이 하고.

중고등학교 때까지 뽀뽀해달라고 하고.

(대학 때까지? 기억이 가물가물...)




근데 그걸 몰랐다.

딸바보란 걸 몰랐다.

다들 알았는데, 나만 몰랐다.

주변에서 '아빠가 딸을 너무 사랑하네' 라고 말을 해줬는데도, 내 귀엔 안 들렸다.

아버지가 계속 껴앉고 뽀뽀하셨는데, 내 눈에만 안 보였다.







내 눈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생활비도 안 주고,

어머니는 피곤하신데, 회사 다녀온 아버지는 거실에 누워계시기만 하고, 집안일도 안 하고,

당신도 두손두발 다 있으면서 '물'이라고 말하면 어머니(할머니)든 아내든 딸이든 물을 떠다주길 바라고,

손톱발톱도 혼자 잘 못 깍아서 어머니가 깍아줘야 하고,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괴롭히는 '나쁜' 사람이었다.




언니가 중학교 때, 공부를 못 하면 언니 방에서 아버지 큰 소리 났던 게 머리에 박혀있다.

언니가 용인외고에 진학하고 기숙사 생활로 집을 떠나있을 때,

왜 시험을 이렇게 못 보냐고 어머니와 같이 언니 '흉'을 보던 모습이 뇌리에 박혀있다.




내게 아버지는

시험을 잘 봐야지만 사랑해주고, 자랑스러워하고,

성적이 나쁘면 앞에서는 혼내고, 내 뒤에서 내 흉 볼 것 같은,

심하면 딸 취급 안 할 수도 있는 조건부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딸바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아빠의 실체를 모른다' 고.






지금 돌아보면

아버지, 당신은 딸바보다.

그래서 딸이 하는 건 뭐든 같이 하고 싶어한다.

딸들이 유학을 가있으면, 당신도 한국에서 영어를 배운다.

그리고 딸들에게 '영어로' 이메일을 쓰라고 한다. '영어로만' 메일을 주고받는다.




딸이 고등학생이면, 당신은 대학입시를 공부한다.

딸이 공부를 하면, 당신은 대학입시 전략을 짠다.

딸의 성적으로 짤 수 있는 최선의, 최고의 전략을 짜기 위해 끊임없이 자료수집을 한다.

왠만한 성적플래서(?)보다 더 치밀하게 입시 전략을 공부한다.

그래서 딸은 정말 아무 외부적 고민없이 '공부'만 하고, '성적'만 올리면 되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딸이 교환학생을 가면, 당신은 딸 대학교와 결연을 맺은 명문 대학교를 알아본다.

딸이 대학 이후의 진로를 고민하면, 당신은 해외 대학원을 알아본다. 로스쿨을 알아본다.



이것이 아버지가 딸을 응원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임을 몰랐다.



사이가 안 좋은 어머니 아버지 사이에서 자란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이미 어머니의 시선으로 아버지를 보고있었다.


아버지의 사랑은 내게 사랑이 아니라

나를 구속하고, 내 인생을 좌지우지한다고 느꼈다.

답답했다. 벗어나고 싶었다.






벗어나기 위해서 고등학생 때는 대학교만 바라보고 달렸다.

정말, 학교-집-학교-집 무한루틴.

친구들과 잘 놀지도 않았다. (물론 야자끝나고 집에 와서 혼자 만화와 드라마를 보긴 했지만)

대학만 가면,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니.



무엇보다, 어차피 보낼 시간이라면

학생 때는 공부를 하는 것이 가장 시간을 효과적으로 쓰는 것이라는 결론이 있었다.

딱히 당장 하고 싶은 게 없기도 했다.

'학생 때 일단 공부를 해두면, 나중에 하고 싶은 게 생겼을 때 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말에 동의도 했다.




그래서 얌전히 공부했다.

나름 치열하게 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대학에 갔다.

자유전공을 갔다.

무슨 과를 가고 싶을지 몰라서 1년의 유예시간을 뒀다.




1년이 흘렀다.

전공탐색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전공 선택의 시간.

그리고 아버지는 경영경제 학과만 졸업하면, 그 이후는 알아서 살라고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경영경제 학과를 졸업하면,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선택할 수 있는 '나의 선택권'이 넓어진다고 했다.




약간 세한 느낌

고등학생 때는 대학만 바라보고 왔는데, 그 이후에는 '자유'가 있다고 믿고.

근데 대학에 와보니, 학과 선택 이후에 '자유'와 '선택권'이 있다고 한다.

도대체 인생의 '자유'는 언제 찾아오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던데,

그럼 도대체 그 '진리'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철학을 공부하면 이런 인생에 대한 의문이 풀릴까.

철학과 수업을 다수 들었다. 어려운 말, 있어보이는 말. 제일 그럴듯 했다.

하지만 솔직히 철학과를 선택하기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질 자신이 안 생겼다.


그래서 경영학과는 이를 추천해준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책임감이 강하다.

아버지는 근거없이 추천을 하지 않으신다.

고로, 아버지가 추천한 경영학과를 선택하면 그 후 내 인생에 대한 '보장'도 일부 해주시겠지

- 이런 책임전가의 마음으로 경영학과를 진학했다.




3년이 흘렀다.

슬슬 친구들이 동아리보다 학회와 스펙을 쌓는데 집중을 할 때 즈음,

아버지는 로스쿨은 어떤지, 호텔대학원은 어떤지 제안을 하셨다.



그 때 밧줄이 목을 확 죄었다.

아, 이건 애초에 끝나는 게 아니구나.
고등학교 때는 대학.
대학 때는 전공.
졸업 때는 진로, 취직.
취직하면 결혼.
결혼하면 아이.
아이하면 육아.
육아 하면 어쩌구,
어쩌구 하면 저쩌구...

이러다 죽는 거네.
정말 죽음.

평생 나는 이렇게 살고 싶은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 것인가?




아니, 아니다.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

자유를 갈망한다.

나는 남들이 다 정해주는 대로 살고 싶지 않다.




짧지만 나는 20여년 정말 최선을 다해서,

남들이 말하는 '하면 좋다'는 건 다 해보면서 살았다.

중고등학생 때는 실컷 공부했다.

대학생 때는 실컷 놀고 공부했다.

그런데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은 인생도

아버지를 포함한 남들이 '추천', '제안'하는 인생을 산다고 해서,

행복할 것 같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것 올스탑, 정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여기까지 충분하다.




부유한 환경에,

넘치는 지원에,

끊임없는 투자를 받았지만,

아버지. 저를 손절매하세요.



아버지, 저 행자공부하러 갑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생각은, 없습니다.





아버지는 화를 내셨다.
포도를 던지셨고, 손에 있던 갤럭시탭을 던졌다.
다음날 아버지는 비셨다.
내게 3배를 할 테니, 가지 말라고 하셨다.
추석만이라도 쇠고 가라고 하셨다.
다음날 아버지는
'너가 지금 떠나면, 너와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줄 알겠다'고 하셨다.



네, 잘 알겠습니다.
짐을 쌌다.
바로 공항으로 갔다.



(아버지 집이 제주도다)





아버지가 구도자를 이해 못하시는 건 아니었다.

다만 '왜 내 딸이 구도자, 굳이 그 힘든 길을 선택해야하냐'고 하셨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 길이 쉬운 길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아버지, 저는 이 진리가 너무 궁금합니다.

나를 자유롭게 할 진리란 무엇인가 너무 궁금합니다.




나는 자유롭고 싶었다.

간절히.

내 인생을 걸고.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한 편에 쓸 수 없기에,

이번 글은 여기까지.

소소하게 얽힌 경험들, 그 때의 방황과 감정들은 차차 풀어나가 볼 수 있길.










단정적으로 쓴 것이 많다.

하지만 실은 이렇게 명쾌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더 많은 고민과 고뇌, 패닉과 방황이 있었다.

그리고 사실 그 흔들림은 행자 공부를 하면서도 꽤 지속됐다.










이번 글을 아버지가 읽게 되면 마음이 너무 아프지 않을까.

타자가 잘 눌러지지 않았다. 자꾸 머뭇거렸다.


위에 표현한 아버지의 모습은

'어리(석)고, 잘 몰랐던 나의 왜곡된 시각으로 본 아버지'였음을,

'내 기억 속 아버지와 실제의 아버지는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의 내가 아버지를 바라보는 모습'이 아님을 밝힌다.






'다 다른, 동시에 조화로운' (불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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