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찰시Chalsea Oct 29. 2023

어머니를 사랑해서 아버지가 미웠다

엄마의 죽음을 바라보는 동생의 시선


#소소한 #농사이야기


논 타작을 했다.

일주일만에 황금들녘이 이제는 텅 비었다.

흔하디 흔한 쌀인데,

그래도 창고에 벼나락이 두툼하게 찬 톤백을 보면 든든하다.



물 관리가 핵심인 벼농사는 아직 잘 못한다.

나는 자꾸 논을 말려버리거나, 넘쳐 흐르게 한다.

밭 농사가 많다는 핑계를 댄다.

하지만 동일한 면적에서도 다른 농부들보다 적은 벼 수확량이 나의 현실을 알려준다.

다른 논에서 1마지기(200평)에 80kg * 4포대가 나온다고 한다.

우리 논에서는 3포대 겨우 나올까 말까 한 수준이다.



밭농사가 아니라 논농사 스킬을 좀 올려야 하는데,

모내기 하고 물을 봐야하는 5월이 밭 농사에도 가장 바쁜 시기다.

대안이 시급하다.


나락 건조기에서 벼 말리고 다시 톤백에 담는 중 (참고로, 지게차 위에 저 분은 제가 아닙니다)







흔하디 흔한 벼처럼,

익숙하다 익숙한 부모님

이번엔 어머니.







나는 마마걸이다.


어머니와 떨어져 있기 싫어서,

YMCA 유치원 자퇴를 했다.


친구들보다 어머니랑 노는 것이 더 좋아서,

초중고등학교 끝나면 바로 집에 왔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어머니랑 같이 잤다.







어머니는 신여성이었다.


어머니를 통해 우리 자매는 온갖 신문물을 경험했다.


일본에서 대학원을 졸업하신 어머니는,

'이제 일본은 지는 해' , '다음은 영어다' 라고 느끼시고

초등학생 두 딸을 데리고 뉴질랜드로 가셨다.

아마 제주도에서 조기유학 1세대였을 것이다.


뉴질랜드 크라이스처치Christchurch 한 동네, 한국인 학생이 없는 초등학교에 전학을 갔다.

하지만 뉴질랜드에서의 생활은 그냥 영어를 배운 시절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신여성이었다.


우리 자매는

'운동 중 못 하면 죽는 유일한 운동'이라며인 '수영' 을 배웠고,

수영할 때의 폐활량을 늘리기 위해 '플룻'을 불었고,

음악의 기본인 '피아노'는 치는 법을 배우고,

뉴질랜드에서 비교적 손쉽게 배울 수 있는 '승마' 클럽을 매주 갔고,

(승마는 걷기-달리기-점프-경주 순서로 배우는데, 점프하다가 떨어질뻔했나? 해서 그만두긴 했지만)

지금 안 해보면 언제해보겠냐며 '스노클링'을 가서 돌고래를 눈 앞에서 보고,

겨울에 레저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며 '스키'와 '스노우보드' 캠프를 갔다.

영어 다음에는 중국어라며 학교에서 하는 '중국어' 교실을 다녔다.

영화 '패어런트 트랩'처럼 방학 때는 대규모 학생 캠프가서 친구들과 침낭 생활을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쿨하셨다.


화레누이Wharenui 초등학교는

매일 전교생이 달리는 시간이 있었다. 1년에 한 번 학교 마라톤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근데 달리기 싫은 나는 어머니에게 쪽지를 써달라고 했다.

'얘가 아프니까 달리기 시키지 마세요' 라고.


떼기(달고나)가 먹고 싶다 하니, 떼기 세트를 한국에서 택배로 받아서 집에서 해먹었다.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거의 매주 영화를 빌려다봤다.

방학 때마다 아버지가 뉴질랜드로 날아오셔서 남섬 곳곳을 여행했다. 반지의 제왕 촬영지 등

(하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함정이...흡)


이 모든 뉴질랜드에서의 경험은 2년 동안의 추억이다.





어머니는 신여성이었다.



한국에 돌아와보니,

문구점에서 사는 간식(불량식품)이 너무 맛있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어차피 한 때'라며

문구점에 만원씩 선결제 해놓고 마음껏 사먹으라고 하셨다.



주변을 돌아보니 같은 반 친구들은 다 학원을 많이 다니는데,

나는 가는 학원이 없어서 아쉬웠다.

그래서 물었다. 나는 왜 학원 안 보내냐고.

어머니는 '다니고 싶으면 다니라'고 하셨다.

그래서 다녔다. 학교 옆 수학 학원에.

태권도도 다니고 싶다고 해서 태권도도 다녔다.



이런 어머니는 멋있었다.

마마걸이었던 나는 이미 초등학교, 아니 (자퇴한) 유치원생일 때부터

어머니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보다도 어머니랑 노는 게 재미있었다.

어머니와 놀 때 대화의 주제는 자주

'네 아빠가 왜 저렇게 하는지 모르겠다'였다.






이렇게 멋있는 어머니는 아버지 때문에 힘들어하셨다.

주로 경제적인 문제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와 다르게 중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

두 분이 소리치고, 싸우는 일은점점 드물어졌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의 존재를 무시하고 외면했다.


언젠가부터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면,

어머니는 당신 방으로 들어가셨다.

언젠가 집에서 어머니 아버지의 냉전과 말없음은 디폴트(기본 세팅)이었다.



두 분의 관계는 이미 끝이 났는데,

나와 언니가 있어서 표면적인 관계를 끝내지 않는 거라고 하셨다.








고등학교, 나는 TEPS 영어 시험을 종종 봤다.


그래서 중간고사를 막 마친

2011년 5월 14일 토요일, 여느 TEPS 시험 보러 가는 날.

같이 집에 있으면서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대화하지 않는 예삿날이었다.



7시 전후였던가.

어머니가 나를 깨우러 오셨다.

시험장으로 가려면 지금 시간 쯤은 일어나야 한다는 내용의 말을 하면서 깨우셨다.

근데 말이 안 됐다. 어눌했다.

응?

눈 비비면서 일어나 식탁에 앉았다.

아버지는 세면장과 옷방을 오가며 묵묵히 지인 결혼식에 갈 준비를 하고 계셨다.



아침을 먹고 있는 내 맞은 편에 앉아서

어머니는 시험장에 어떻게 갈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근데 말이 안 됐다. 어눌했다.

응? 왜 저러시지?


어머니가 마실 걸 챙겨주시려는지 일어나서 주방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려고 하셨다.

근데 왼손을 못 올리셨다.

응? 왜 저러시지?

내가 냉장고 문을 열고, 마실 걸 꺼냈다.

어머니는 다시 식탁에 앉으셨다.

아버지는 특유의 애용하는 향수을 뿌리시고 집을 나가셨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시험장까지 버스타고 갈지, 차를 타고 갈지 - 어머니는 계속 말씀을 하시는데

언어적으로 말이 안 됐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응? 왜 저러시지?


갑자기 졸리다고 하셨다. 소파에 앉으셔서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께 이불을 덮어드렸다.

덜컥 겁이 났다.

갑자기 치매가 오신 건가?

치맨 줄 알았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야지 했는데, 핸드폰을 학교에 놔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학교는 걸어서 10분 거리었다.

어머니를 깨웠다.

'엄마, 나랑 나가자'

어머니는 칭얼댔다. 피곤해하셨다.

그래도 나가야 한다고, 아직 날이 쌀쌀하니 옷을 챙겨 입으라고 하고 집 밖을 나갔다.



같이 학교까지 걸어갔다.

가는 길도 이상했다.

'기다려달라'라고 하면 기다리시고, '같이 가자' 하면 같이 가고.

원래 어머니는 '기다려달라'고 부탁해도 먼저 슬슬 걸어가시는 분이셨다.

근데 오늘따라 말을 잘 듣은 어린이가 됐다, 갑자기 몇십분 사이에.

당혹스러웠다.



아침에 어머니가 이상했을 때,

외출 준비하는 아버지에게 바로 얘기할 생각을 안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싫어하니까.

하지만 홀로 아이가 된 어머니와 남겨진 내겐 대안이 없었다.

학교로 가서 핸드폰을 찾고,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아빠, 엄마가 이상해'


아버지는 급히 학교로 오셨다.

택시를 잡아탔다.

'빨리 제주대학병원으로 가주세요'

어머니는 자꾸 눈을 감으셨다.




그 때부터였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심이 커진 것이.

아버지가 어머니를 힘들게 해서, 어머니가 아픈 거라고.

어머니가 아픈 건 아버지가 어머니를 힘들게 해서라고.



병원에 도착했다.

응급실에 접수했다.

몇 시간 후 의사가 나와서,

뇌졸증이어서 후유증은 있겠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해외에 있는 큰 딸을 불러야겠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의사선생님은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일단 대학이고 뭐고 없다. 나는 어머니 간호해야지.

마음먹었다.





다시 몇 시간 후,

의사 선생님이 다시 나와 아버지를 부르셨다.

큰 딸을 한국으로 부는 게 좋겠다고 했다.

'환자분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그리고 의사가 말했다.

환자분께서는 매년 3월에 정기건강검진을 받는데, 올해는 안 받으셨네요.

현재는 5월.



급성백혈병.

토요일에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지만, 이건 합병증이었다.

몇 달 동안 감기가 안 나으시고, 계속 기침을 하셨던 게 떠올랐다 - 면역력 저하

주말에 어머니가 쉬실 때 보면 다리 곳곳에 멍이 들어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 혈소판 감소



아, 고3이 무슨 지위라고.

몇 달 동안 감기가 안 나으면 병원이라도 가보시게 할 걸.

다리 곳곳에 멍든 모습, 한 번도 손찌검 하지 않은 아버지를 의심할 게 아니라 다른 원인을 의심해볼걸.

내 시험에 급급해서 어머니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날이 갈수록 아버지에 대한 나의 원망심은 더 커졌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힘들게 해서, 어머니가 아픈 거라고.

미웠고, 원망스러웠다.




어머니는 토요일에 쓰러지셨고,

언니는 화요일에 도착했다.




수요일이었다.

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짧은 중환자실 면회시간, 온 친척과 가족이 어머니를 둘러쌌다.



마마걸이었던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하늘이 무너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순간이 다가오자 생각보다 담담했다.




어머니는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다.

엄마가 너랑 언니 곁에 평생 있지 않을 거야.
이럴 시간이 얼마 없어.
언제 이렇게 시간을 같이 보내겠어?


이렇게 조기교육을 잘 받아서

어머니가 평생 곁에 없을 거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받아드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담담했던 나는,

어머니의 임종 그 순간 내 본모습을 처절하게 보게됐다.




임종 그 순간, 나는 울었다.

다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슬퍼서가 아니었다.

어머니를 힘들게 한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해서 울었다.

아버지, 당신을 원망해.
당신 가슴을 아프게 하기 위해 나는 더 슬프게 울거야. 더 더 슬프게.



그리고 한 켠에 피어오르는 해방감

나를 이제 제주도에 묶어둘 사람은 없어. 이 집구석, 최대한 빨리 탈출한다.




어머니가 숨 넘어가는 순간에 나는,

악심惡心으로 내 원망감을 우선 표출한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바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어떻게 살지 궁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 말이다.



이토록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일줄이야.








5월 18일 수요일,

장례식장으로 가는 날씨는 화창한 봄날이었다.

도로 옆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났다.



어머니는 갔는데, 세상은 똑같았다.

그 때 알게됐다.

내겐 평범하고 행복한 하루인 날에도, 이렇게 매순간 누구에게는 죽음의 순간, 이별의 순간이겠구나.






장례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다.

상주 머리핀을 꽂고, 예전과 똑같이 밤 11시까지 야자(야간자율학습)를 했다.

아무일 없다는 듯이 대입을 준비했다.





재수란 없었다.
나는 탈출한다. 대입지옥에서, 제주도와 집에서.
날 더이상 붙잡을 사람은 없다.
더이상 내가 붙잡힐 사람은 없다.




홍콩에서 급히 돌아온 언니의 시선으로 보고 싶다면?◇

https://brunch.co.kr/@hannnn/8


매거진의 이전글 아버지, 저를 손절매하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