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어른은 아니지만, 낭만은 있는 어른으로

비가 가려주고 남겨준 것들

by 서율


오늘처럼 비가 많이 오는 날엔 창밖을 바라보며 멀리 응시하는 버릇이 있다. 아마도 끝없이 떠오르는 추억들 때문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번지는 미소를 들키고 싶지 않아 시작된 습관이, 이제는 비 오는 날의 의식처럼 자리 잡았다.


나는 늘 비가 오는 날이 좋았다. 어린 시절엔 장화를 신고 물웅덩이를 뛰어다녔고, 흙탕물이 옷에 튀어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 순간이 모험처럼 느껴졌다. 10대 땐 친구들과 가위바위보를 했고, 진 사람은 우산 없이 빗속에 10초간 서 있는 벌칙을 수행했다. 흠뻑 젖은 채 교실로 돌아와 모두가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때의 비는 불편이 아니라 장난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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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가 되자 사랑에 빠진 연인과 함께 빗속을 뛰어다니며 물총 싸움을 했다. 머리칼은 젖어 이마에 붙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자유로웠다. 왜 그렇게 즐거웠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비 오는 날은 언제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아마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빗속을 걷는 일이 얼마나 개운하고 해방감 넘치는지.


타들어가는 여름날의 소나기는 온몸의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아이스커피 한 잔 없이도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비는 슬픔을 가려주기도 했다. 연인과 다툰 날, 사회생활 초년생 시절 꾸중을 듣고 돌아오던 날, 빗방울은 내 부끄러운 눈물과 떨리는 마음을 감춰주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걷느라 내 얼굴을 보지 못했고, 빗소리는 내 마음을 대신 울어주고 있는 듯했다.


이제 어른이 된 나는 더 이상 빗속을 뛰어다니진 않는다. 대신 음악을 틀고 술을 따른다.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80·90년대 노래를 배경으로 음식을 곁들여 술잔을 기울이는 일은 그 자체로 충분히 낭만적이다. 어린 시절 상상했던 어른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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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던 친구들이 많았지만, 나는 정반대였다. 내게 어른은 참아야 하는 사람, 버텨야 하는 사람이었다. 기쁨도 마음껏 드러내지 못하고, 슬픔도 조용히 삼켜야만 하는 존재처럼 보였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어머니 친구분 중 내가 유난히 잘 따르던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와 함께 장례식장에 갔을 때, 그분은 환하게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웃음 뒤에 깃든 상실의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나는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눈물이 터졌다. 그 장면은 내게 ‘어른’이란 슬픔조차 웃음으로 감싸야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감정을 숨기는 일에는 서툴렀고, 내가 봐온 어른들처럼 담담하게 넘어갈 자신도 없었다. 기쁘면 크게 웃고 싶었고, 슬프면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성숙을 흉내 내기보다 솔직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나는 결국 어른이 되었고, 지금은 그 삶을 나름 즐기고 있다. 담담하게 슬픔을 이겨내는 일은 아직도 서툴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감정을 품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이면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지난 추억과 지금의 마음을 글로 풀어낸다.


완벽한 어른은 아니지만,

적어도 낭만은 있는 어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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