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서재_장석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깊게 생각하는 사람일까.
남의 시선에 떠밀려서, 세상이 시키는 흐름대로 살아온 나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그동안 스스로를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고 규정했던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나는 생각의 문맹자다.
깊이 생각함 없이 사는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문자를 모른 채 사는 것과 같다. 생각의 문맹자들을 의외로 많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즉물적인 삶을 산다.
(마흔의 서재_장석주_169쪽)
생각이 많다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부였다. 그러나 내가 했던 생각이라는 것이 뭘까.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공상과 망상이었다. 머릿속을 떠다니는 혼탁한 감정과 생각들을 정확한 언어로 설명 할 수 없었다. 그저 ‘혼란스럽다’ 혹은 ‘고민스럽다’로 뭉뚱그려서 커다란 감정 봉투에 마구 쑤셔 넣었다. 생각을 밀고 나가서 더 깊게 사유해야 하는 것을 외면했다. 나만의 언어를 생성해낼 수 없으니 ‘나의 생각’이란 것들은 늘 같은 층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아무리 읽고 써본들 도돌이표를 만나게 될 뿐이었다. 수량에만 치우쳐서 (양에 집착하는 것만 봐도 나는 근대의 노예가 확실하다. 효율성과 결과에만 얽매여 있으니까.) 그저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 아니라, 느리더라도 천천히 나만의 생각을 소화시킬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동안 생각을 닥치는 대로 주워 먹기만 하고, 제대로 소화시키지를 못했으니 내 속은 엄청난 체기로 가득 찼던 것이다.
요즘은 건강을 위해 간헐적 단식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생각에도 간헐적 단식과 운동이 필요하다. 나에게 소화할 시간을 주자. 소화되어 나만의 언어로 나오기 전까지는 또 다른 생각들을 먹어치우는 짓을 멈추자. 그리고 정말로 움직이자. 내 몸 뿐 아니라 눈, 코, 귀, 입 모두. 오감을 열어 움직일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열린 틈을 타고 신선한 공기가 들어와 혼탁한 머릿속을 정화시켜 줄 것이다. 이제 진짜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연습을 해보자. 인간은 호모사피엔스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