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발표일이었다. 정훈은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둔 스마트폰과 모니터를 번갈아 쳐다보며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시험을 망쳤다는 확신과, 혹시 모른다는 기대가 엇갈렸다. 어학 시험 성적은 보통 2주 이내에 발표된다. 그 2주가 이렇게 긴 줄은 몰랐다. 그렇게 오후 2시. 스마트폰에 알림이 울렸다.
「어학 시험 성적이 발표되었습니다. 지금 확인하세요.」
정훈은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눌렀다. 로딩 화면이 유독 느리게 돌아갔다. 이윽고 화면에 결과가 떴다.
조정훈님의 어학시험 결과는 '레벨A' 입니다.
정훈은 눈을 의심했다. 한 번 더 확인했다. 분명히 레벨A였다.
'어떻게? 시험장에서 분명 집중을 못 했는데...'
어이가 없었다. 시험 후반부에 흐트러진 건 사실이지만, 전반부에서 쌓아 올린 점수가 결정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6주간 몸에 새긴 문장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흘러나왔는지도 모른다. 정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앞에 서서 한 번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현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기야."
"왜? 무슨 일이야? 목소리가 이상한데."
"레벨A 나왔어."
"뭐? 진짜?"
"진짜야. 나도 방금 확인했어. 진짜 레벨A야."
현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내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야, 조정훈! 진짜야? 와... 대단하다! 나 지금 소름 돋았어. 6주만에 할 수 있다고? 축하해, 정말로!"
"고마워. 솔직히 나도 믿기지 않아. 시험장에서 후반부에 완전 무너졌거든."
"그래도 됐잖아. 결과가 나왔으면 된 거지. 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 내가 해줄게."
"아무거나 좋아. 근데 자기야, 나 한 가지 더 이야기할 게 있어."
"뭔데?"
"김 부장이 나한테 말해주었는데, 베트남 법인에서 주재원은 나로 결정 됐대."
수화기 너머로 현주의 숨소리가 잠깐 멈추었다.
"당신에게는 어학까지 준비되면 말하고 싶었어."
"고마워. 그리고 잘 준비하자."
전화를 끊은 정훈은 다시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남자는 2주 전 시험장에서 허탈하게 웃던 그 남자와 같은 사람이었다. 달라진 것은 어학 성적표라는 종이 한 장뿐이었지만, 그 종이 한 장이 그에게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주재원 발령이 확정되기까지는 2주가 더 걸렸다.
인사팀 최 과장이 직접 정훈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조 과장님, 축하드립니다. 베트남 호치민 법인 품질보증 파트 주재원으로 최종 확정되셨습니다. 부임일은 올해 8월 초입니다."
"감사합니다. 잘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정훈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15년이었다. 입사하고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을 내딛은 순간이었다. 회사는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정훈의 주재원 발령은 사내 게시판에 공지되었고, 부서에서는 간단한 환송회가 열렸다. 김 부장은 시끌벅적한 환송회를 잠시 진정시키며, 술잔을 들며 말했다.
"조정훈 과장이 우리 파트에서 처음으로 주재원으로 나갑니다. 솔직히 보내기 싫지만, 가서 우리 파트 이름을 빛내주길 바랍니다. 조정훈 과장은 앞으로 후배들이 나아갈 길을 만들어주세요."
동료들이 박수를 쳤다. 정훈은 겸연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환송회가 끝나고, 김 부장이 정훈을 따로 불렀다.
"정훈아."
"네, 부장님."
"잘 다녀와. 그리고... 내가 평가 약속 못 지킨 거, 미안하게 생각한다. 앞으로는 거기 가서 네 몫을 해. 알겠지?"
"감사합니다. 부장님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김 부장은 정훈의 어깨를 한 번 툭 쳤다. 말은 없었지만, 그 손에는 15년간 같은 사무실에서 부대꼈던 사람만이 줄 수 있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정훈은 사무실로 돌아와 책상 정리를 시작했다. 서랍 안에는 몇 년 전 성과 발표 자료, 바랜 명함들, 그리고 포춘 쿠키의 작은 종이가 접힌 채 놓여 있었다.
'시작할 용기를 냈다면, 이미 절반은 이룬 것이다.'
정훈은 그 종이를 지갑 속에 넣었다. 절반은 이루었다. 나머지 절반은 호치민에서 시작될 것이다.
▶『특례, 그거 될까요?』다음화 바로 보기 : 불안한 시작
이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작가의 명시적 동의 없이 저작물을 공유, 게재 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