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우리 이렇게 대접받아도 돼?

by 스크류

호치민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정훈은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었다. 유독 높았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세고 따가웠지만, 커튼 너머로 비치는 하늘이 한국에서 보던 것과는 달랐다. 멀리서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지만, 이 높은 곳 까지는 닿지 못했다. 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었다. 숨이 멎을 뻔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통유리 너머로 호치민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펼쳐졌다. 건물 앞 흐르는 강변의 물은 아침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고, 그 너머로 빌딩 숲이 아지랑이 속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40층.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도시는 마치 미니어처 같았다. 정훈은 스카이라인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이게... 우리 집이라고?’

호치민에서 몇 안되는 초고층 레지던스였다. 호치민에서 손에 꼽히는 프리미엄 레지던스의 40층이자, 방 세 개 짜리의 집이 정훈의 가족에게 배정된 것이다. 넓은 거실, 독립된 주방, 아이들 방 두 개와 부부의 안방. 한국에서 살던 30평대 아파트와는 차원이 다른 50평대 대저택이었다. 정훈이 거실로 나가자, 현주가 이미 주방 앞에 서 있었다.

"자기야, 여기 진짜 우리집이야?"

현주의 표정은 어젯밤의 공항에서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눈이 동그랗게 커져서 집 안 곳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냉장고가 양문이야. 식기세척기도 있어. 오븐, 빌트인 전자레인지... 아니 이 주방 크기 봐. 여기서 요리 교실 열어도 되겠다. 이 드넓은 아일랜드 식탁까지 완전 내 취향 저격이야!"

"회사에서 다 준비해 준 거래. 가구도 가전도 전부."

"와..."

현주는 대리석 아일랜드 식탁을 손으로 쓱 문질러보았다. 한국에서 좁은 싱크대에 서서 김치찌개를 끓이던 때가 떠올랐다. 그 때, 민서가 슬리퍼를 끌며 거실로 나왔다. 통유리 앞에 멈춰 서더니 입을 벌렸다.

"엄마! 여기서 수영장 보인다! 진짜 수영장이야!"

레지던스 5층에는 야외 수영장이 있었다. 365일 미온수로 운영되는 인피니티 풀. 야자수 사이로 선베드가 늘어서 있고, 수영장 가장자리는 하늘과 맞닿은 것처럼 보였다. 호텔도 아닌 자기 집 건물에 이런 수영장이 있다니. 민서는 발 아래의 수영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여보, 안내문 봤어? 매일 아침 6층 라운지에서 조식이 나온대. 호텔 조식처럼."

정훈이 식탁 위에 놓인 레지던스 안내 책자를 펼쳤다. 6층에는 조식 라운지, 5층에는 수영장과 피트니스 센터, 3층에는 도서관과 스터디룸, 그리고 지하로 내려가면 복합 쇼핑몰이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마트, 카페, 레스토랑, 약국, 미용실까지.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생활의 불편함이 없는 구조였다.

"민재야, 너 3층에 도서관 있대. 공부하기 딱이겠다."

민재는 방에서 나오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네."

짧은 대답이었다. 정훈은 민재의 방 쪽을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 안내 책자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

"헬로, 마담. 아이 엠 린. 유어 하우스키퍼. 나이스 투 밋 유."

문을 열자 작은 체구의 베트남 여성이 서 있었다. 회사에서 배정한 가정 도우미 린이었다. 린은 서투른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저, 매일 아침 옵니다. 청소, 빨래, 요리 다 합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현주는 멍하니 린을 바라보았다. 매일 아침 호텔 조식이 나오는 건물에, 누군가 매일 와서 집안일까지 해준다니. 한국에서 점심도 거른 채 학원 라이딩을 하던 자신이 떠올랐다.

"자기야... 나 꿈 꾸는 거 아니지?"

"꿈이 아니야. 이제 주재원 사모님 생활 시작이십니다. 마담~"


오전 9시, 집 앞에 검은색 대형 SUV가 도착했다. 베트남 법인에서 배정한 전용 차량이었다. 기사 흐엉이 차에서 내려 공손히 인사했다.

"굿모닝, 미스터 조. 마이 보스."

정훈은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호치민의 아침 풍경이 펼쳐졌다. 수십 대의 오토바이가 물결처럼 흘러갔고, 길가에는 쌀국수를 파는 노점상들이 줄지어 있었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그러나 생명력이 넘치는 도시였다.

법인에 도착한 정훈은 안내를 받아 사무실로 향했다. 넓은 사무실, 본인의 이름이 적힌 별도의 데스크. 한국에서는 칸막이 하나 없는 넓은 사무실에서 수십 명이 함께 일했지만, 여기서 팀장급인 정훈에게는 개인 공간이 주어졌다.

"조 과장님, 환영합니다."

법인 인사팀 차장 김상우가 다가왔다. 단정한 차림에 정돈된 말투. 호치민 법인에서 5년째 근무 중이라고 했다.

"적응하시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훈은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켰다. 메일함에는 이미 수십 통의 메일이 쌓여 있었다. 대부분 영어였고, 간혹 베트남어가 섞여 있었다. 정훈은 하나씩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선 영어를 진짜 쓰는구나.'

한국에서 어학 시험을 준비하며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이제 해외에서 일 한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정훈은 현관을 열자마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을 마주했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린이 만들어놓은 베트남 가정식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쌀국수와 볶음밥, 그리고 짜조. 민서는 이미 짜조를 한 입 베어 물고 있었고, 민재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아빠 왔어? 이거 맛있어!"

민서가 짜조를 들어 보이며 외쳤다.

"린 아줌마가 만들어준 거야. 나 베트남 음식 좋아할 것 같아."

정훈은 식탁에 앉으며 현주를 바라보았다. 현주는 부엌에서 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자기야, 오늘 어땠어?"

"어땠긴. 린이 다 해주니까 나 할 일이 없어. 집도 깨끗하고, 빨래도 해놓고, 저녁까지 차려놓고 갔어. 내가 한 건 마트 가서 과일 산 거 밖에 없어. 과일이 정말 싸더라. 망고가 킬로당 한국돈으로 이천원도 안하던데?"

"그래? 신기하다. 어쨌든 린이 다 해주니, 좋은거 맞지?"

"그렇긴 한데... 이상해. 한국에서는 아침부터 밤까지 쉴 틈이 없었는데, 여기선 오전 내내 할 게 없어. 뭔가... 불안해."

"적응하면 괜찮아질 거야. 당분간 쉬어. 당신이 한국에서 고생한 거 내가 다 아니까."

현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정훈은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 방 앞을 지나는데, 민재의 방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문을 살짝 열었다. 민재는 책상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한국 친구들과의 단체 카톡방이 열려 있었다.

"민재야, 아직 안 자?"

"응. 아빠, 한국 친구들이 보고 싶어."

"이 녀석. 벌써? 얼마 안 됐잖아. 곧 여기서도 새 친구 생길 거야."

"...그래도 보고 싶은 건 보고 싶은 건데."

정훈은 민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이의 어깨는 생각보다 마른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기다려. 학교 가면 금방 친구 사귈 수 있을 거야."

민재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고, 고개를 젓지도 않았다. 그저 화면을 바라보다가 스마트폰을 책상 위에 엎어 놓았다. 정훈은 방을 나와 문을 닫았다. 복도에서 잠시 멈춰 섰다. 초고층 레지던스, 전용 차량, 가정 도우미, 매일 아침 조식. 한국에서는 꿈꾸지 못했던 것들이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왜인지 마음 한구석이 채워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 높은 곳에서의 삶은, 가족이 모두 익숙해지기엔 아직 너무 낯설고 아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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