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 제2터미널. 출국장 앞은 여름 휴가철 인파로 북적였다. 정훈의 가족은 그 사이에서 유독 짐이 많았다. 캐리어 네 개, 박스 두 개, 그리고 아이들 각자의 백팩까지. 3년을 살아야 하는 짐이라 그런지, 이삿짐처럼 무겁고 거추장스러웠다. 이미 컨테이너 하나를 가득 실은 이삿짐이 배를 타고 베트남을 향해 가고 있지만, 남은 짐들이 워낙 많았던 탓이었다.
"여보, 여권 확인했어?"
"했어. 당신 것도 확인했고."
"애들 것은?"
"다 했다니까? 좀 진정해! 당신이 이야기 안해도 나 할거 많아."
현주는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아이들의 짐을 하나씩 점검했다. 민서는 분홍색 목베개를 목에 두르고 설레는 표정이었고, 민재는 이어폰을 꽂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재야, 이어폰 좀 빼. 지금 중요한 이야기 하고 있잖아."
"뭔데요."
"거기 가면 학교도 새로 다녀야 하고, 영어로 수업이야. 알고 있지?"
"알아요."
민재의 대답은 짧았다. 알고 있다는 말이 준비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현주도 그것을 알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저 멀리서 정훈의 가족을 위한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자, 가자. 탑승 수속 시작한대."
정훈이 앞장서며 카트를 밀었다. 가족은 한 줄로 출국장 안으로 들어갔다.
비행기는 5시간 남짓을 날아 호치민 떤선녓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기내에서 문이 열리는 순간, 무겁고 습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한국의 여름과는 다른, 피부에 달라붙는 듯한 열기였다.
"더워..."
민서가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투덜거렸다.
"여기가 동남아니까 당연히 우리나라보다 덥지. 적응하면 괜찮아질 거야."
정훈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정훈의 셔츠도 이미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입국 심사대에 줄을 섰다. 정훈과 아이들은 무사히 통과했다. 다음은 현주 차례였다.
"마담, 플리즈 웨잇."
입국 심사관이 현주의 여권을 들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현주는 영문도 모른 채 심사대 앞에 멈춰 섰다. 다른 심사관 한명이 다가오더니 현주를 향해 이것 저것 물었다.
"여보, 저 사람,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현주가 정훈을 돌아보며 물었다. 정훈은 이미 심사대를 통과한 뒤라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잠깐만 기다려봐. 아마 서류 확인하고 있을 거야."
잠깐은 1시간이 되었고, 어느덧 3시간이 되었다. 현주는 별도의 사무실로 안내되었다. 통역도 없이, 현지어와 서투른 영어가 오갔다. 현주의 비자 서류에 기재된 회사 코드가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회사의 행정 착오였다. 정훈은 법인 인사팀에 전화를 걸고, 현지 담당자에게 연락하고, 다시 입국 사무실 앞에서 기다렸다. 아이들은 공항 의자에 앉아 지친 얼굴로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 엄마는 언제 나와?"
민서가 물었다. 정훈은 대답 대신 민서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10시간이 걸렸다. 현주가 입국 사무실에서 나왔을 때, 공항 밖은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현주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자기야, 괜찮아?"
현주는 대답 대신 정훈의 팔을 꽉 잡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무서웠어. 아무 말도 못 알아듣겠는데, 사람들은 계속 뭔가를 물어보고... 나 여기서 쫓겨나는 줄 알았어."
"미안해. 회사 쪽 실수였대. 다 해결됐어. 이제 괜찮아."
현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잡고 있는 손에는 힘이 풀리지 않았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출구 앞에 검은색 대형 SUV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차 옆에 단정한 흰 셔츠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법인에서 배정한 기사 흐엉이었다. 흐엉은 정훈의 가족을 발견하자 재빠르게 다가왔다. 허리를 깊이 숙이며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
"웰컴, 미스터 조. 아이 엠 흐엉. 유어 드라이버. 나이스 투 밋 유"
흐엉은 정훈이 손을 뻗기도 전에 캐리어를 하나씩 집어 트렁크에 실었다. 네 개의 캐리어와 박스 두 개. 혼자서 능숙하게 짐을 정리하는 모습이 마치 오래전부터 이 가족을 기다려온 사람 같았다. 짐을 다 싣고 나서 흐엉은 다시 허리를 숙이며 뒷문을 활짝 열었다.
"플리즈, 마담 앤 칠드런 퍼스트."
흐엉은 현주와 아이들이 먼저 탈 수 있도록 문을 잡고 서 있었다. 민서가 먼저 차에 오르자 흐엉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혈된 눈의 현주에게도 흐엉은 같은 미소를 보냈다. 마지막으로 정훈이 탈 때도 흐엉은 문을 잡은 채 기다렸다.
"땡큐, 흐엉."
정훈이 어색하게 말하자, 흐엉은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노 프라블럼, 보스."
문이 닫히고 차 안이 고요해졌다. 에어컨이 켜지며 공항의 습한 열기가 서서히 물러갔다. 가죽 시트의 시원한 감촉이 등에 닿았다. 정훈은 운전석에 앉은 흐엉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구김 없는 셔츠, 그리고 가족 앞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던 정중함. 한국에서 15년을 일하면서 이렇게 대우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직급이 올라갈수록 책임만 무거워졌지, 누군가 자신에게 허리를 숙이며 문을 열어준 적은 없었다.
‘이게 주재원이라는 거구나.’
동시에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10시간 동안 구금되다시피 한 아내, 지친 아이들, 그리고 낯선 나라의 밤 공기. 불과 몇 분 전까지 불안에 떨고 있던 가족 앞에, 깍듯한 기사와 번쩍이는 SUV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기묘했다. 마치 같은 무대 위에서 비극과 희극이 동시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사람에게 어떤 존재일까. 그가 허리를 숙이는 건 나라는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앉은 자리 때문이겠지.’
한국에서 정훈도 누군가에게 그랬다. 김 부장에게, 그 위의 상무에게, 또 그 위의 누군가에게. 허리를 숙이고, 보고서를 올리고, 늘 타인을 향한 존중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자신이 이제 누군가의 ‘미스터 조’이자 '보스'가 되었다. 기분이 좋아야 했다. 그런데 좋지만은 않았다. 이런 대우의 이면에 다가올 책임감이 그에게 마치 빚처럼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호치민의 밤거리가 스쳐 지나갔다. 수많은 오토바이의 경적 소리, 노점상의 불빛, 읽을 수 없는 간판들. 낭만적인 이국의 풍경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세계에 던져진 것 같은 불안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현주는 정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민서는 이미 잠이 들었다. 민재만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 여기서 잘 살 수 있을까?"
정훈은 대답 대신 룸미러를 올려다보았다. 거울 속에 흐엉의 눈이 잠깐 비쳤다. 흐엉은 묵묵히 전방을 주시하며 운전하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손, 단정한 자세. 그에게 이 밤은 일상이었을 것이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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