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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룡 Oct 31. 2022

검은 꽃

김영하 저

회사 동료가 추천해서 읽은 책. 잊기 전에 짤막한 감상을 남겨본다.

김영하 작가는 스타일이 맞지 않아서 몇 권 보고 안 읽었는데, 회사 동료 말로는, 자신도 아주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검은 꽃>은 좀 다르다기에 추천을 믿고 펼쳐봤다. 멕시코 배경 이야기라는 말도 흥미를 자극했고.


(출처: 네이버 쇼핑)


<검은 꽃>은 우리나라가 아픈 역사다. 대한제국 시절, 황제가 러시아 공관에서 제대로 힘도 못 쓰던 때. 외세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라가 불안해서, 나라의 주권을 떠나 어차피 밑바닥 인생이라 더 잃을 것도 없어서, 혹은 왕실 사람으로서 나라의 핏줄을 잇기 위해서, 아무튼 각양각색의 이유로 조선 사람들이 머나먼 멕시코로 떠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생각해보면, 멕시코행 배를 탄 건 이종도를 빼면 대부분 하층민이다. 이종도도 핏줄만 황실이지 실제론 별 볼 일 없는 양반이었으니 어쨌든 부유한 사람은 없었다. 이보다 더 나빠질 것도 없고, 조선에 남아 있어서 좋을 것도 없기 때문에 다들 떠났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소유의 논밭 하나를 갖고 싶다는 조그만 기대에 부풀어 당시엔 꿈도 꾸기 힘들 만큼 머나먼 나라로 떠났다. 가는 뱃길이 얼마나 걸렸을까? 딱히 선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물이 풍족한 것도 아니어서, 그 노정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들은 일단 배에서 내리기만 하면, 내려서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돈이 굴러들어 올 줄 알았다. 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계약을 했다는 것도 모른 채.

오래전에 읽은 <노예 12년>이란 책이 떠오르는 부분이다. 노예 생활의 끔찍함은 그 책에서 너무 잘 봐서 읽지 않아서 이들의 미래가 어떨지 상상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일부 농장주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고, 적어도 계약 기간이 끝나면 약속대로 풀어주기도 했으니 <노예 12년>보단 나은 상태라는 생각도 했다.


노예 12년 - 자유가 없는 끔찍한 삶에 관해서는 이책을 추천한다 (출처: 네이버 도서)


사회 하층민의 탈출기, 예상하지 못한 노예의 삶, 나라 잃은 백성의 마음 같은 건 딱히 두드러질 게 없다. 이 책에서 내 맘에 들었던 점은, 우리가 잘 아는 우리 역사와 당시나 지금이나 우리와는 딱히 연결고리가 없는 중미의 역사를 연결해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난 역사를 좋아해서 유럽이든 중남미든 역사의 부분 부분은 어디선가 배우거나 읽어서 알고 있지만, 이를 우리 역사와 연결 짓거나 우리나라 모모 시대에 중남미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함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검은 꽃>을 통해 대한제국이 무너지던 그 시대 멕시코의 상황을 대충이나마 연결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나라 작가가 해외 역사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쓴다는 게 쉽지 않을 것이고, 그걸 우리나라와 연결 지을 소재로 만들기도 어려웠을 텐데, 그런 점에서 <검은 꽃>의 특수성이 있는 것 같다.


돈을 벌 줄 알고 외국에 나갔지만, 초반에 꿨던 꿈은 절망으로 변하고, 문화적 차이로 해를 입으면서 가까스로 살아가다는 우리 동포의 모습은 안타깝지만, 내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역시 당시 멕시코 대농장(아시엔다) 상황과 멕시코 혁명 부분이었다. 후반부 과테말라에서 독립 투쟁하는 마야인들을 도우면서 티칼 이야기가 나온 것도 반가웠다. 벌써 10년 가까이 지났지만, 멕시코시티에 가서 봤던 것들이 떠올라서 새삼스럽게 사진도 뒤져봤다. 티칼은 가보지 못했는데, 마야 문명이 테오티우아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고 테오티우아칸의 피라미드엔 올라가 봤으니, 책에 나오는 제1 신전이니 제2 신전이니 하는 것들이 대충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상상할 수도 있었다. 얼마 전에 읽은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도 중남미 문학가를 다룬 책이어서 거기서 배운 것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소설의 이야기 자체를 말하자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프게 여기는 시대여서 감정을 자극하긴 하지만 특별할 것은 없었다. 짧은 내용에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 앞부분에서 풀어놓은 몇 가지 썰이 뒤에선 수습이 안 되는 점이 아쉽다. 대농장의 부조리한 운영 때문에 4년 계약이 돼 있어도 실제론 번 돈을 전부 생활비로 쓰게 만들어서 돈을 모아 벗어나는 길이 완전히 차단돼 있다더니, 막상 꽤 많은 사람들이 계약 만료 전에 벗어났고,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시간이 훌쩍 지나가 다들 풀려났다, 정도로 얼버무렸는데, 노예 생활을 다루는 게 이 책의 주제가 아니라서 그렇다기엔, 그 후 각 인물들의 행적이 판타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이리저리 튄다. 사실에 근거했다고 한다면 정말 보통이 아닌 삶을 산 사람들이다.


농장주들은 농민들을 사실상의 채무노예로 묶어두고 영원히 그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농장주들은 싼 임금을 준 후 농장 내 매점에서 시내보다 훨씬 비싼 값으로 음식과 물건을 팔아 다시 그것을 거둬들였다. 농민들이 결혼을 하면 주례를 서고 거액의 주례비까지 챙겼다. 가족이 병들어 치료비가 들거나 죽어 장례를 치르는 경우, 형사사건에 휘말려 돈이 필요해진 경우, 농민들은 농장주에게 돈을 빌리고 채무노예가 되었다.


하와이의 농장주들이 이번 대한제국의 조치에 불만이 많습니다. 일본인이나 중국인보다 훨씬 일도 잘하고 말썽도 적어 모두들 대환영인데 갑자기 송출을 금지하니 어디서 이런 노동력을 데려오냐며 난리입니다.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이연수는, 처음엔 마치 깨어있는 신식 여성인 척해서 멕시코에 가서 대단한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10년 내내 남자들 손에 휘둘리다가 그 남자가 벌어놓은 돈으로 큰손이 된다. 이럴 거면 왜 애초에 깨어있는 사람처럼 그렸는지 모르겠다.

따지자면 이런저런 허점이 많지만, 소설은 소설이지 과학이 아니니까 너무 파고들진 않겠다. 힘 없는 나라를 떠났지만 언젠가는 돌아오리라고 믿었던 사람들, 하지만 돌아가기 위한 돈을 벌지도 못하고 그 사이 나라는 망해버려 망국의 백성이 된 사람들. 그들의 허망함과 부평초 같은 삶을 공감할 수도 있고, 도중에 나오는 에피소드도 각기 재미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유기적이지 못하단 느낌이다.


이정은 가끔 일기에다 이렇게 썼다. 국가가 영원히 사라질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혁명이 시작되고부터 이미 멕시코엔 국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우리 모두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어. 왜놈이나 되놈으로 죽고 싶은 사람 있어?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동료의 말대로 예전에 본 김영하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다르다는 건 확실하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그런 식으로 하와이나 멕시코에 납치되다시피 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나, 한국과 멕시코의 당시 상황을 번갈아 보여주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책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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